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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여

기본정보

남부여(南扶余)는 백제의 국호이다. 성왕이 재위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면서 새로 정한 것으로 백제의 부여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정보

남부여(南扶余)는 백제의 국호로 성왕이 재위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면서 새로 정한 것이다. 이것은 백제의 부여계승의식을 강조한 것인데, 대내적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경쟁했던 점이 고려된 것이다.

전문정보

남부여(南扶余)는 백제의 성왕이 재위16년(538)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면서 새로 정한 국호이다. 이 사실은『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에서도 확인되며 “남부여(南扶餘)”로 표기하였다.『삼국유사』 권2 남부여․전백제조에서『삼국사기』를 인용하여 남부여에 대해 서술하였다.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 바꾼 것은 시조 온조왕으로부터 내려온 부여족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도가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부여족의 정통성을 차지하기 위한 고구려와의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도학, 1995) 즉, 성왕은 무령왕대에 고구려를 누차 격파하면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여 사비천도를 맞아 부여적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한 것이다.(노중국, 2005)

백제가 부여계통인 것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었고 백제 스스로도 그렇게 밝혔다.『주서』권49 열전41 백제전에 “백제는 그 선조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 하다(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위서』권100 열전88 백제국 조에 수록된 개로왕의 표(表)에 따르면 “신(臣)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와 선대(先代)에는 (고구려와) 우의를 돈독히 하였는데, 그들의 선조인 검(釗-고국원왕)이 우호를 깨뜨려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隣好 親率士衆 陵踐臣境)”라는 내용이 보인다. 여기에서 부여 출자의식이 국가간의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며,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립 상황에서는 부여 계승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반전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남부여라는 국호가 멸망때까지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1995년에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서 “백제창왕(百濟昌王)”이라는 표현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했음에도 창왕 즉 위덕왕대에 와서 이미 백제(百濟)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성왕의 의도가 위덕왕대에 부정되고 있었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김주성, 2007)

참고문헌

이도학, 1995,『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노중국, 2005, 「백제 사비시기 문화의 특성」『백제 사비시기 문화의 재조명』,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김주성, 2007, 「百濟 武王의 卽位過程과 益山」『마한․백제문화』17.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六 聖王 [名明穠 <武>寧子 癸<卯>立 理三十一年] 戊午 [移都泗<沘> 稱南扶余]
제26대 성왕[이름은 명농으로 무령왕의 아들이다. 계묘년에 즉위하여 31년간 다스렸다.] 무오[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남부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