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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우로음각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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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음각간

기본정보

생몰년 : ?~249 혹은 253.
신라 상대의 왕족․장군.

일반정보

『삼국사기』에는 “석우로(昔于老)”로 나온다. 신라 제16대 흘해이사금의 아버지이며, 부인은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命元夫人)이다.

전문정보

우로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과 신라본기에 각기 실려 있으나 열전의 기사는 본기의 그것을 재록․집성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본기에 보이는 기사 내용이 열전에서는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우로의 출자(出自)에 대하여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14년조에서는 나해왕의 태자라고 하였으나, 『삼국사기』 권45 열전5 석우로조에서는 단순히 나해왕의 아들 혹은 각간(角干) 수로(水老)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다. 이처럼 기록에 따라서 우로의 출자가 다르게 기술된 것은, 우로가 원래는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맏아들인 이음(利音) 또는 나음(奈音)이 나해왕 25년에 죽자 그를 이어 태자가 되었던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나해이사금조에 보이는 나해의 왕자 이음(利音) 또는 나음(奈音)의 관력(官歷)이 우로보다 훨씬 앞서고 있어, 아무래도 이음(利音)을 태자(太子), 우로를 차자(次子)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또한 석우로의 생존 연대에도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우로가 죽을 때 그의 아들은 유약(幼弱)하였다고 했는데, 그가 후일 흘해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로의 아들인 흘해의 즉위 연대인 310년은 우로가 죽었다고 하는 249년 또는 253년으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에, 흘해의 당시 나이는 60세를 전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흘해왕 즉위조에서는 그가 즉위시에 나이가 어렸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356년에 훙(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모순은 신라의 세계(世系)가 후에 조작된 근거로서 신라의 초기 편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한 자료로 보기도 하지만,(김광수, 1973) 기년상의 문제로 돌리기보다는 나해왕․우로․흘해왕으로 이어지는 계보상에 수정이 가해진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이종욱, 1980)

그 중 나해왕과 우로의 사이는 우로의 활동시기로 보아 대체로 부자간이 거의 틀림없다. 더욱이 우로의 부인인 명원부인은 조분왕의 딸로 되어 있다. 우로와 명원부인은 제9대 벌휴왕에서 시작된 가계상에서 보면 6촌간이 되어 서로 같은 세대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로에서 점해왕 사이에 일정한 수정이 가해진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구체적으로 몇 세대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이에 한 두 세대가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제11대 조분왕과 제15대 기림왕 사이에 2대가 있었다면, 제10대 나해왕과 제12대 점해왕 사이에도 2세대 또는 3세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흘해이사금 즉위년조에서 우로가 어린 흘해를 보고 자기의 가(家)를 흥하게 할 인물이라고 했다는 기록은, 우로의 생시에 흘해가 어느 정도 성장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우로와 흘해왕이 부자간이 아니라면, 흘해왕은 우로의 손자가 되며, 흘해왕의 아버지가 이러한 말을 한 것을 후일 우로가 한 것처럼 된 것은 아닌가 짐작된다.(이종욱, 1980)

나해왕 14년(209)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라를 침입하여 그 왕자가 구원을 요청해오자 이찬 利音과 함께 6部의 군사를 이끌고 이를 섬멸하고 포로가 된 6천 명을 빼앗아 되돌려 주었으며, 조분왕 2년(231)에는 이찬으로서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군(郡)으로 삼게 하였다. 조분왕 4년(233)에는 왜인이 쳐들어 왔을 때에 사도(沙道)에서 화공법(火攻法)으로 왜의 전함을 불태우고 섬멸시켰다. 조분왕 15년(244)에는 이찬(伊飡)에서 서불한(舒弗邯)으로 승진되면서 병마관계의 일을 주관하였다. 245년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해오자 나가 막았으나 패배하여 마두책(馬頭柵)에까지 후퇴하여 지켰고,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사기를 진작시켰다. 247년 신라의 세력권내에 있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반하여 백제와 결합하려고 하자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점해왕 7년(253)에는 왜의 사신을 접대하면서 왜의 왕과 왕비를 가리켜 희롱한 것이 화근이 되어 왜인의 침입을 초래하였으며, 왜의 진영에 스스로 가서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왜군을 물러가게 하였다. 우로가 죽은 해를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에서는 첨해왕 3년(249)이라 하였고, 『삼국사기』 권45 열전5 석우로조에서는 첨해왕 7년(253)이라고 적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라에 온 왜국의 사신을 죽였고, 이 때문에 왜인이 금성(金城)을 침공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이와 같은 우로 전설은 원래 계절풍을 이용한 왜구의 침범이 잦았던 동해안의 우유촌(于柚村)지역에 퍼져 있던 민간전승이었는데, 뒤에 신라왕족의 영웅설화로 변개, 확대되어 정리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85)

참고문헌

김광수, 1973, 「新羅 上古世系의 再構成 試圖」『東洋學』3.
이종욱, 1980,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이기동, 1985, 「于老傳說의 世界」『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歷史學會編),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六 乞解尼叱今[昔氏 父于老音角干 卽奈解王第二子也 庚午立 治(四)十六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 己丑始築碧骨堤 周□萬七千二十六步 □□百六十六步 水<田>一萬四千七十□]
제16대 걸해니질금[석씨이다. 아버지는 우로음 각간으로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오에 즉위하여 46년간 다스렸다. 이 왕대에 백제 군사가 처음으로 와서 침범하였다. 기축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쌓았다. 주위가 □만 7천 26보이고, □□백 66보이며, 논이 1만 4천 7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