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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환 일대기 편

내용요약 - 그 사람, 안순환

1907년 어느 날. 고종이 양위되기 며칠 전이었다. 대전 앞에 수 십 명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곧 고종의 마지막 수라상이 올려지고, 고종이 방 안에서 묵묵히 밥 한 그릇을 비워냈다. 고종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이들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고종이 양위되자 궁의 살림을 맡아 보던 사람들까지 모두 해고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안순환이 있었다. 고종의 식사가 끝나자 신하들 중 몇 명은 격분을 또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순환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깨문다. 이들의 울음 소리가 고종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일까. 고종이 친히 나와 대전에 앉았다. 주저앉아 통곡 하던 신하들이 놀라 일어나고, 고종은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짐의 살림을 맡아 하느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그대들 덕분에 내가 마지막까지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먹고 떠날 수 있게 되었구나.”

다시 누군가 참던 울음을 터뜨렸다. 고종도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쳤을까 자리를 일찍 뜨고 신하들은 마지막 예를 올리고 궁을 빠져 나간다.

지금으로 치면 갑자기 실업자가 된 격이다. 평생 직장이라 여겼던 곳에서 어이 없이 해고 당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모셨던 사람에 의해서가 아닌 이 집 살림을 노리는 옆집 괴한에게서 파직을 당한 격이라 더욱 기가 차는 노릇이었다. 고종의 요리사 즉 궁중숙수였던 안순환, 그의 충격은 더욱 컸으리라.

안순환은 부친인 참봉 순식(호는 송석재)과 모친인 숙인 청주 한씨 사이에서 고종 신미(1871년) 2월 8일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습이 걸출하였다고 한다. 젖도 떼기 전인 두 살 때에 생모를 여의고 수양모 전씨가 거두어 키웠으나, 열 살에 수양모마저 세상을 떠나 열 살 배기 소년 안순환은 세 끼 호구를 때우러 수양아들하던 집을 떠났다. 그 때부터 혹독한 고생살이의 시작이었으니, 생가 친척집을 기웃거렸어도 그들도 살기 어려운 처지뿐이라 가난뱅이 집 더부살이로는 배고픈 설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체격이 거대하고 마음이 담대했던 그는 눈물 머금을 새도 없이 몇 년은 머슴신세, 몇 년은 객주집 하인, 어디서 또 몇 년은 음식점 조수로 세월 가는 동안 온갖 험사를 겪어내면서 음식에 관한 한 대숙수가 되어갔다.

임오군란(1882년 6월, 그의 나이 12세), 갑신정변(1884년10월)을 소년시기에 겪고, 갑오경장 ,동학난(1894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훤출한 이십 대의 청년이 되었다. 어려서는 기개만 믿고 문예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다만 성실과 근면함으로 근본을 삼았다고 한다. 한편 안순환의 소년 청년시기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가 조선시대 사대 완력가 중 마지막 하나라고 칭했다.


*


경성부 삼각정 당시 안순환의 집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했다. 그는 그 날의 충격에 한 사흘을 심하게 앓았다. 방 안에 누워 식음을 전폐하고 간신히 물만 마시던 그가 자정이 넘은 시간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방 안의 자개로 짠 자신의 고급 옷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자개장을 향해 기어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그 자개장 밑으로 손을 쑥 넣는다. 그의 손에 딸려온 비단 지갑. 그 안엔 당시 지폐가 수북히 들었다. 그간 그가 모아놓은 거금이다.
다음 날 날이 밟자 그는 꾸역꾸역 밥 한 공기를 다 비우고 차비를 한다. 그리고 어젯밤 베개 맡에 넣어두고 잤던 비단 지갑을 들고 시내로 나간다. 그는 대문을 나서며 생각한다.

‘더 이상 이렇게 주저앉아있을 수 만은 없다.’

나라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차 기울고, 1910년 8월 29일(국치일) 대한제국이 합병 문서에 조인하여 완전히 일본인의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기까지 최소의 인원을 제외한 나인, 별감, 내시 등 모든 인원을 정리해고함에따라, 이제까지 궁 안의 음식과 온갖 연회를 시원시원하게 진두지휘하던 거구의 위엄 있는 사나이 안순환이 정리해고된 인사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제부터 당신들 남은 인생을 내게 주시게. 살길을 찾으려 한다면 나를 믿고 따라와 준다면 여러분의 몫은 챙겨줄테니 염려 붙들어 매고 따라만 오시겠가?”

일본에 먹혀 나라가 망하는 것은 한식이냐 청명이냐 하는 판에, 장차 대궐을 나가면 어떤 곳에서 어떤 꼴을 하고 살다 죽을가 염려하며 을사년 이후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안순환의 배짱이나 신망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는 시내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는 함께 일하던 숙수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곳 저곳을 수소문해 기생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구체적인 계획을 꼼꼼하게 종이에 기록하는 안순환. 그는 요리의 대가였지만, 이미 사업가의 기질도 타고났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그는 황토마루에 서 있다. 그의 동료 숙수들과 기생 몇이 그 곳을 방문했다. 안순환은 쪼그리고 앉아 바닥 흙을 만져본다. 마치 금가루를 만지는 듯 그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안순환은 1909년(1903년이라는 설도 있음-저각서예가 강무) 이곳 황토마루에 ‘명월관’이라는 요리집을 세운다.

안순환의 지휘 하에 개업을 단행한 조선 최고의 요릿집 명월관은 임금의 지척에서 놀던 궁기와 임금의 수라간에서 자랑하던 궁중 나인들이 솜씨 겨뤄 직접 만든 요리를 즐길 수 있었다. 방안으로 척 들어서 높디높은 대궐 안에 부리던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비단 보료에 엉덩이를 붙이면 중국풍의 화류나무나 흑단 검고 매끄러운 고급 팔걸이에 손을 괴시라 하고, 물 찬 제비 같은 재치와 숙련된 교양미를 갖추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바가 많은 명기를 놓고 대들이로 실어 들이는 궁중요리로 가득했다.

명월관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까지만 해도 근대적인 분위기의 레스토랑은 거의 없었고, 특히 당대 엘리트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그들만의 담론을 형성할 공간은 대부분 사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젠 광화문 세종로 터에 생긴 큰 대중적 식당에서 기생들의 춤과 노래를 들으며 시국이며 문학 등을 논할 수 있으니 글자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요리집이 된 것이다.

개업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송병준이 요리집을 찾는다. 안순환과 송병준은 이미 가까운 사이었다. 안순환이 궁중의 음식을 책임지는 전선사의 최고 수장인 장선으로 있을 때, 그는 송병준과 함께 일본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송병준의 일본 파견시 수행 요리사로 함께 따라갔던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다. 안순환은 웃으며 그를 맞이한다.

“안순환 장선, 소식은 들었네만 아주 으리으리하구려. 이런 요리집 차릴 밑천은 다 어디서 난 게야?”

송병준은 농을 섞어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안순환은 절대 손님에게 감정을 섞어 대하지 않는다. 특히 그는 명월관에서 일하는 모든 종업원들에게도 이같이 당부했다. 안순환은 이미 송병준을 단골로 잡아두기로 작정했다.

“어서 들어가 앉으시지요.”

명월관에서는 겸상이 없는 궁중 의례를 따라 손님 일인당 본상과 곁상을 차려준다. 즉 서민도 나랏님이 먹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릇도 모두 은을 사용해 12첩상과 육회 등 별찬이 가득했다. 왕이 살아있던 시절, 왕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로 충격적인 모험이었다. 궁에서만 구경하던 이런 상을 요리집에서 받아본 송병준은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이후 송병준은 최남선, 김기진, 백석, 이광수등을 데리고 와 쏠쏠한 수익을 내주었고 자신은 궁중 의례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것을 내심 즐겼다.

수익은 늘고 규모도 커지며 명월관은 더욱 번창했다. 안순환은 요리밖에 모르는 장인보다 찬방 잡부에서 정삼품으로 출세한 수완 좋은 경영자이자 야심가다. 송병준 같은 실력자와 친분을 유지하는 현실 감각도 있었다. 언론 플레이도 능했다. 신문에 자주 광고를 냈고, 1915년에는 경성과 지방의 신문사 기자단을 불러 기자대회를 열 정도였다.
안순환은 1928년 5월 1일자 <별건곤> 식도원주(食道園主)에 '조선요리의 특색'이란글을 실었다.그 글에서 안순환은 서양음식, 중국음식, 일본음식과 조선음식을 비교하면서 "조선음식은 첫째, 제철에 나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 많고. 둘째, 양념으로 인해 음식 맛이 좋고. 셋째, 음식배열의 규칙이 정연하고. 넷째, 여러 가지 음식을 한상에 모아 놓아서 손님을 접대하는데 좋다"고 했다.

역시 조선요리 대가(大家)답게 조선요리의 특징을 너무 잘 표현한 지적이다. 이렇듯

안순환은 궁에서는 왕을 모시는 최고의 요리사였으나 이를 악물고 시작한 사업에서는 최고의 경영자였다. 주변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고객에게 객관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일개 기생의 아이디어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는 훗날 관립극장인 원각사까지 인수해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