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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개요
탑명 개요 인물/사상/설화 유물/문양/의례
불국사
3층석탑
(석가탑)
지정 국보 21호(1962. 12. 20) 김대성 전생설화
아사달/아사녀/무영탑
아비지/황룡사탑
법화경/호국불교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금동제사리외함
경주세계엑스포
위치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시기 신라 경덕왕(751) 추정
구조 6층 석탑/10.4m
의의 신라탑 완성

이 탑의 건립연대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정된다.
석가탑(釋迦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다. 이 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큰 돌로 된 지대석 위에 설치되어 있는데, 상하 기단은 각각 여러 개의 석재로 짜여져 있다. 하층기단은 기대(基臺)에 높직한 굽이 돌려져 있고, 중석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 2주씩이 각 면에 모각되어 있다. 갑석은 4매로 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활모양의 2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보다 높고 우주와 탱주가 2주씩 있다. 갑석에는 밑에 부연(副椽 :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고, 약간의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각형의 2단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층 옥신에는 4개의 우주가 있다. 각 층 옥개석은 조성수법과 형태가 같다. 옥개받침은 5단씩이고 위에는 각형 옥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4면의 합각은 예리하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만 남았으나 1973년에 실상사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의 상륜부를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연꽃을 조각한 탑구(塔區)가 있는데, 이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 한다. 이것은 탑의 정역(淨域)을 구별한 것으로, 연꽃 1송이에 1보살씩 8보살의 정좌라고도 하고, 또는 석탑에 직접 조각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팔방금강좌는 특별한 착상인 동시에 탑의 장엄을 한층 더하여 주는 희귀한 유구로 주목되고 있다.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석탑은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도 알맞고 극히 안정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목조탑파의 형식을 답습하였던 신라 초기의 석탑들과는 달리 완전한 신라식 석탑의 전형을 확립하였다.

이 석탑은 창건 이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한 훼손사건이 발생하여 손상됨에 따라 1966년 10월에 탑신부의 해체수리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해 12월에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옥신의 상면 중앙에 있는 네모난 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와 각종 장엄구 및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이 다라니경은 당나라의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를 사용한 목판인쇄물로서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현재 국보 제126호로 일괄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은 유례가 드문, 주목할 만한 예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관련 인물

(1) 김대성(金大城) - 700(효소왕 9)~774(혜공왕 10) : 신라 중대의 재상

“대정(大正)”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재상을 지낸 문량(文亮)이다.
745년(경덕왕 4) 이찬(伊飡)으로 중시가 되었으며 750년에 물러났다. 그 뒤 불국사의 창건 공사를 주관했는데, 이와 관련된 연기설화가 『삼국유사』에 실려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모량리(牟梁里 : 浮雲村이라고도 함)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아주 넓어 성과 같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이 가난해 기르기가 힘들었으므로 어머니가 부잣집에 가서 품팔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밭 몇 마지기를 주어 생활을 꾸려 나갔다. 하루는 점개(漸開)라는 중이 흥륜사(興輪寺)에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시주하기를 권해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이에 점개가 “불교 신자로서 보시를 잘 하시니 천신이 항상 보호해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어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라고 축원하였다. 대성이 이 말을 듣고 뛰어들어 와서 어머니에게 “제가 문간에서 축원하는 스님의 말을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을 생각할 때 전생에 착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지금 시주하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경작하는 밭을 법회(法會)에 시주해 후세의 복을 얻음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어머니가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밭을 점개에게 시주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죽었다. 그 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부르짖음이 있기를 “모량리의 대성이 지금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 하였다. 집안 사람이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과연 하늘에서 부르짖은 때 대성이 죽었다.

그러고 나서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손을 폈다. 그런데 손안에 “대성(大城)”이라는 두 글자를 새긴 금간자(金簡子)가 있어 이름을 대성이라 하였다. 또한 전세의 어머니를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부양하였다. 대성이 장성하자 사냥을 좋아해,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말하기를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하였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하기를 빌었더니 귀신이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지어주겠는가?” 하고 물어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꿈을 깨니 온 몸에 땀이 흘러 자리를 적셨다. 그 뒤로는 일체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해 사냥하던 자리에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 지금의 石窟庵)를 창건했다고 한다.


(2) 경덕왕(景德王) - 742~765 재위(경덕왕 24) : 신라 제35대 왕

강대해진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치개혁을 시도했으며, 불교중흥에 힘쓰는 등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맞게 했다. 이름은 헌영(憲英). 성덕왕의 아들이며 효성왕(孝成王)의 동생이다. 왕비는 이찬(伊飡) 순정(順貞)의 딸 김씨와 서불한(舒弗)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이다. 효성왕이 자식이 없어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742년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뒤 왕권의 재강화와 귀족세력의 약화를 목표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개혁의 중심세력은 경덕왕과 신라 중대의 행정책임자였던 집사부의 중시(中侍)였다. 747년에는 중시를 '시중'(侍中)으로 변경했다.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를 두어 유학교육에도 힘썼다. 748년 정찰(貞察)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게 하여,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749년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명을 두어 기술 분야에도 관심을 보였다. 757년 9주(州), 5소경(小京), 117군(郡), 293현(縣)의 고유 지명을, 759년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귀족세력의 재부상과 문화의 발달 / 그러나 귀족세력을 누르고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경덕왕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가 말년에는 귀족세력과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757년 내외 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녹읍을 부활시켰는데, 이는 새롭게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경덕왕 말기에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이었던 상대등 신충(信忠)과 시중 김옹(金邕)을 면직시키고, 764년 만종(萬宗)과 김양상(金良相)을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했다. 김양상은 경덕왕 때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던 세력으로서,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죽이고 신라 하대를 여는 선덕왕으로 즉위했다. 개칭된 관직명들도 혜공왕대에 다시 환원된다.

경덕왕대에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으나, 당과는 11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발히 교류했다.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여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고 산업발전에도 힘썼다.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皇龍寺)의 종(鐘)을 주조하고, 굴불사(掘佛寺)를 비롯하여 영흥사(永興寺) . 원연사(元延寺) . 불국사(佛國寺) 등절을 세웠다. 석굴암도 이때 축조되었다. 경주 모지사(毛祗寺)의 서쪽 언덕에서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월성군 내납면 부지리에 있다.

탑 관련 설화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이 탑을 창건할 때에 신라보담 건축기술에 있어서 앞선 백제의 "아사달"이라는 유명한 석공을 초빙하여 공사를 했다. 온 신라의 많은 석공들을 제치고 이 공사를 맡게 된 "아사달"은 전심전력을 다 하여 돌을 다듬고 깎아 탑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였다.

세월은 흘러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는 남편의 일이 하루속히 성취되어 기쁘게 만날 날을 고대하다 못해 그리운 남편이 일하는 신라 땅 경주 불국사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성스러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불국사에는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정한 여자의 몸으로 공사를 진행 중인 "아사달'을 만난다면, 그의 믿음을 흩트러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 온 그녀는 한꺼번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남편을 만나려는 그 애틋한 사랑은 여기서 좌절될 수만은 없었다. "아사녀"는 매일 매일 불국사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에서나마 남편을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완강한 문지기의 저지로 그 작은 바람도 이룰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그 측은한 광경을 보아야 하는 문지기는 보다 못해 그녀를 달래기 위하여 이야기를 꾸며댔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하나 있소. 그 곳은 옛 부터 신령스러운 곳이라, 당신이 지성으로 빈다면, 탑의 공사가 완성되는 날에 그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춰질 것이니, 당신의 남편 모습도 볼 수가 있을 뿐 아니라, 그때에 찾아오면 만날 수도 있을 것이오."라 했다. 아사녀는 뛸 듯이 기뻤다. 그리운 남편의 모습을, 그 그림자만이라도 볼 수 있다는 말에 그녀의 기대감이 지친 가슴을 달랬다.

다음날부터 그 곳 못에서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행여나 그리운 남편의 모습이 나타날려나 싶어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탑의 그림자나 남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세월만 흘러갔다. 초조한 기다림 속에 견디다 못한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결국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후, "아사달"은 각고의 노력 끝에 석가탑을 완성시켰다. 그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가 몇 달 동안을 남편을 찾아 헤맸다는 소식과 자기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는 그 못으로 달려갔다.

어디에도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사달은 몇날 며칠을 아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못 가를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건너편에 보이는 바윗돌에서 홀연히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단숨에 그 바윗가에 다다른 아사달의 손에는 차가운 바윗돌만 잡혔다. 그는 미친 듯이 그 돌에 아내의 모습을 찾으며,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돌일 뿐! 아내는 아니었다. 아내의 모습을 돌에 새겨놓은 채, "아사달"은 힘없는 발걸음을 어디론가 옮겨갔다. 정처도 없이 아무도 지금까지 그의 뒷일은 아는 사람이 없다.

훗날의 사람들은 이 못을 그림자 못, 영지(影池)라 불렀다. "아사녀"가 애타게 "아사달"을 찾으면서 읊었다는 시 한 수가 민간에 전해 온다.

이내 살이 인생살이 이다지도 아플손가,
드는 칼로 베오인들 이 보다야 아플손가,
이내 살이 인생살이 이다지도 쓰달손가
소태나물 쓰다한들 이보다야 쓰달손가,

못살내라 못살내라 피가 말라 못살세라
못살세라 못살세라 임그리워 못살세라.

토함산 구름위에 탑이야 솟건 말던
원한의 저 못속에 그림자야 뜨던 말던

못속에 잠긴 달은 날 오라 손짓하니

아-으 님이시여! 이 세상 서러운 줄
님도 정녕 아오련만,
이내 몸 먼저 가오니 내 뒤를 따르소서.

물론 이 시는 후세 사람들이 "아사달'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함께 서러워하며 지은 것이라 여겨진다.

"영지(影池)" 서정봉(시인 : 1905- 동래출생)

어디서 오는 빛이 그리메도 덮이는가
이승과 저승으로 거울 속에 트인 길을

가만히 귀 기울이면 젖어드는 숨소리
애틋한 그날들이 하늘도 넘어서고

산넘어 울림하던 굽이굽이 그 사연이
여기와 굽어 보는가 출렁이는 무영탑.

탑에 얽힌 일화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이 다라니경은 당나라의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를 사용한 목판인쇄물로서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현재 국보 제126호로 일괄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973년 실상사백장암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결실된 부분을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탑 사찰의 연혁 및 특징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다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神琳).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에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32칸) . 천불전(25칸) 등이 있고, 이 두 개의 건물만큼 크지는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는 시왕전(十王殿, 5칸) . 십륙응진전(十六應眞殿, 5칸) . 문수전(5칸) 등이 있다.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4칸) . 서당(4칸) . 동별실(5칸) . 서별실(5칸) . 청풍료(淸風寮) . 명월료(明月寮) . 객실 . 영빈료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누 . 각 . 문 . 고 . 욕실 등이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887년(진성여왕 1)과 1024년(현종 15)에는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고, 1172년(명종 2)에는 비로전과 극락전의 기와를 갈았으며, 1312년(충선왕 4)에도 규모 미상의 중수를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는 대웅전과 관음전(觀音殿)과 자하문(紫霞門)을 중수하였고, 1470년(성종 1)에는 관음전을, 1490년에는 대웅전과 각 절을 중수하였다.

1514년(중종 9)에는 극락전의 벽화를, 1564년(명종 19)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 . 극락전 . 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광해군 4)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인조 8)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효종 10)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安養門).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대통령의 발원으로 중창되었다. 이때의 대 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장품 및 주변문화재

석가탑 주위에 연꽃 대좌 8개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를 8방 금강좌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석가 여래가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 여래를 상징하는 칠보탑이 땅에서 나와 큰 소리로 석가의 말이 진리라고 말하였다. 이때 제자들이 다보 여래를 뵙기를 청하자, 석가 여래는 백호에서 빛을 내어 찬란한 부처의 세계를 임시로 만들고, 팔방에 금강좌를 만들어 온 우주에 차 있는 부처님의 분신을 모여 앉게 하고 다보 여래를 친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석가탑 주위에 8방 금강좌를 놓은 까닭은 석가탑에 석가 여래가 상주한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1) 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유물(佛國寺 三層石塔 內 發見遺物)

◈ 국 보 : 126호
◈ 분 류 : 금속공예류기타
◈ 지정일 : 1967.09.16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 시 대 : 통일신라시대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탑 내부에 사리봉안을 위한 공간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중심부에 놓여졌던 사리외함과 함께 안에는 알형으로 생긴 은제의 사리 내·외합과 금동사리합,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각종 구슬과 함께 있었다. 사리함의 주위에는 청동제비천상과 동경, 목탑, 경옥제곡옥, 구슬, 향목 등이 놓여있었다. 사리함의 바깥 기단부 바닥에서는 비단에 쌓인 종이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종이가 한데 뭉쳐져 글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사리외함은 4면에 덩굴무늬를 좌우대칭의 모양으로 뚫어 새겼으며,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도 무늬를 뚫어 새겼다. 지붕 위에는 덩굴무늬를 새기고 지붕 꼭대기, 모서리, 지붕 마루에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지붕 끝에는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달아놓았다. 안정된 각부 비례와 정제된 모습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사리합 중에서 가장 세련된 작품이다. 은제 사리내·외합은 계란모양으로 은으로 도금하였으며 8세기 중엽 양식을 보인 화려한 연꽃무늬와 작은 동그라미를 찍어 만든 어자문(魚子文)으로 장식하였다. 금동 방형사리합은 앞·뒷면에 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보살이 있는 모습과, 옆면에 인왕상을 선각(線刻)하였다. 뚜껑에는 3층 탑 모양의 작은 꼭지가 있으며 합 속에는 향나무로 깎은 작은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중엽에 간행된 것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 되는 곳에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발견 당시 부식되고 산화되어 결실된 부분이 있었는데 20여 년 사이 더욱 심해져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대대적으로 수리 보강하였다. 불경이 봉안된 석가탑은 751년 불국사가 중창될 때 세워졌으므로, 이 경은 그 무렵 간행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본문 가운데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의 집권 당시만 썼던 글자들이 발견되어, 간행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유물 중에서 직접 사리용기로 쓰였던 유리제사리병 1, 향목제(香木製)의 장경사리소병(長頸舍利小甁), 은제(銀製) 소대(小臺) 1 및 그 안에 들었던 금제(金製)의 소합(小盒) 1 등은 사리(舍利)가 든 채로 모조(模造)된 일식(一式)의 사리장치와 함께 탑 안에 수장(收藏)되었으나, 그 중 유리제사리병(琉璃製舍利甁)만은 사찰측의 실수로 인해 파손됨에 따라 사찰에서 모조품을 대체해서 넣었음이 후에 판명되었다.

(2) 금동제사리외함(국보 126-1)

사리공의 중심부에 놓여졌던 너비 17.2cm, 높이 18cm의 전각형 금동 사리외함 안에는 난형(卵形)으로 된 은제(銀製)의 2중(重) 사리합을 중앙에 안치하고, 그 둘레에는 장방형의 금동(金銅) 사리합(舍利盒) 1좌(座), 은제(銀製) 사리소대(舍利小臺) 1좌(座), 목판인쇄(木板印刷)의 다라니경권(陀羅尼經券) 1축(軸) 등이 비단에 싼 향류(香類), 각종 구슬과 함께 장치되어 있었다.

은제(銀製)의 비천상, 동경(銅鏡), 소형목탑비취곡옥(小形木塔翡翠曲玉) 등은 섬유편(纖維片) 및 잡물(雜物)과 함께 사리공 안에 놓인 금동사리외함(金銅舍利外函) 둘레에 깔려 있었으며, 이 금동사리외함(金銅舍利外函) 기단부 바깥바닥에는 비단 보자기에 싸인 서명(書銘) 4각형 종이뭉치가 장치되어 있었으나, 종이뭉치는 거의 내용을 조사할 수 없이 되었다.

(3) 은제사리외합(국보 126-2)

사리외함 안에 놓였던 사리합이다. 크기는 지름 6㎝, 높이 11.5㎝ 이고 계란 모양이다. 은제(銀製) 사리외합(舍利外盒) 및 사리내합(舍利內盒), 사리외함(舍利外函)의 내저(內底)에 마련한 연화좌(蓮華座) 위에 놓였던 중심 사리합(舍利盒)이다. 은지(銀地)에 도금한 이 내외합(內外盒)에는 8세기 중엽 양식을 보인 화려한 타출(打出) 복엽(複葉) 연화문과 권점(圈點)으로 된 어자문(魚子文)을 장식했다

(4) 은제사리내합(국보 126-3)

사리외함 안에 놓였던 사리합이다. 크기는 지름 5㎝, 높이 6.5㎝ 이고 계란 모양이다.

(5) 유향(국보 126-4)

불교의식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향으로 3봉이 비단에 쌓인 채 발견되었다.

(6) 금동방형사리합(국보 126-5)

크기는 가로 6㎝, 세로 3.3㎝, 높이 5.5㎝이고 합(盒)의 앞뒷면에는 3층 탑상(塔像)과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 양 측면에는 인왕상이 선각(線刻)되어 있고, 뚜껑에는 3층 탑형의 작은 꼭지가 있으며 도금색이 찬란하다. 이 합 속에는 향목(香木)으로 깎은 소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7)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 국보 : 126-6호
◈ 분 류 : 목판본류
◈ 수 량 : 1축
◈ 지정일 : 1967.09.16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 시 대 : 통일신라시대
◈ 지정문화재 :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 (국보 126)

신라시대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라니경〉의 목판본.
751년(경덕왕 10)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목판 권자본(卷子本)이다. 이 판본은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3층석탑(석가탑) 보수공사중 2층 탑신부에서 금동제 사리함 등의 여러 유물과 함께 발견되어 이들 유물과 함께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형태를 살펴보면 전체길이 약 650㎝, 종이의 폭 6.5~6.7㎝, 위아래 판광(板匡) 5.3~5.5㎝이다. 발견 당시 위는 상당히 산화되어 앞부분이 여러 조각으로 떨어져 있을 정도로 많이 손상되어 11항이나 없어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1989년 수리하여 거의 복원되고 현재는 3줄만이 일실된 채로 남아 있다. 이 경의 간행연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첫째, 많은 학자가 수긍하는 751년경이라는 설이다. 석가탑은 751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이후에는 수리된 기록이 없으며 함께 발견된 유물도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내용 가운데 대체로 690~704년에 사용된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 4종이 총10회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706년경이라는 설이다. 〈다라니경〉은 704년에 한역(漢譯)되었고 한국에는 706년 황복사탑에 이미 모셔졌기 때문이다. 셋째, 고려시대라는 설이다. 유물 가운데 나타난 관직명칭이나 유물이 고려시대의 것이라 볼 수 있으므로 고려시대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한편 중국에서 목판을 가져다가 찍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외국인도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는 751년경설을 지지하고 있다. 이 경은 글자체가 방필(方筆)에 원필(圓筆)을 곁들인 육조체(六朝體)이며 판각술은 비교적 치졸해 초기의 판본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770년경에 인쇄되어 그동안 세계 최초의 목판본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 한국의 〈다라니경〉 7종 중 4종만을 발췌.판각한 것이며 판각술도 치졸하고 인쇄방법도 훨씬 뒤떨어진 데 반해 이 경은 완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판각술도 매우 정교하고 인쇄도 일본의 것보다 더 발전된 방법이 사용되었다. 즉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판본이면서 훌륭한 형태를 갖춘 목판본이다. 이 경의 발견으로 한국에서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외 유물 목록

동환 (국보 126-7)
경옥제곡옥 (국보 126-8)
홍마노환옥 (국보 126-9)
수정절자옥 (국보 126-10)
수정보주형옥 (국보 126-11)
수정환옥 (국보 126-12)
녹색유리환옥 (국보 126-13)
담청색유리제과형옥 (국보 126-14)
유리제소옥 (국보 126-15)
향목편 (국보 126-16)
청동제비천상 (국보 126-17)
동경 (국보 126-18)
동제채자 (국보 126-19)
목탑 (국보 126-20)
수정대옥 (국보 126-21)
홍마노 (국보 126-22)
수정제가지형옥 (국보 126-23)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24)
유리소옥 (국보 126-25)
심향편 (국보 126-26)
섬유잔결 (국보 126-27)
묵서지편 (국보 126-28)
인근 지역의 특징

(1) 가람배치 및 당우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을 향한 신라인의 염원은 세 가지 양상으로 이곳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① 석단(石壇)과 석교(石橋)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이 석단은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나타낸다. 석단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에 있고, 대척적(對蹠的)으로 병렬된 2단의 석주(石柱)에 있다.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고, 굵고 굳센 돌기둥과 돌띠로 둘러 견고한 통일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반석 같은 굳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이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국보 제23호인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와 극락전을 향하는 국보 제22호인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 . 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계단은 33천(天)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의 정화에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1686년(숙종 12)과 1715년(숙종 41)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없어졌던 돌난간도 복원하였다.

②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이다.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므로 불신에서 발하는 자주빛을 띤 금색 광명이 다리 위를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에서 자하문이라 한 것이다. 세간의 번뇌를 자금색 광명으로 씻고 난 뒤, 들어서게 되는 관문이다. 자하문의 좌우에는 임진왜란 후의 중건 때에 만든 동서회랑이 있었지만 1904년경에 무너졌다. 회랑의 양 끝에 역시 경루와 종루가 있었지만 동쪽 경루는 일찍이 없어지고 서쪽의 종루만 남아 있다가 1973년 복원 때에 좌경루(左經樓)와 더불어 옛 모습을 찾았다.

이 회랑은 대웅전의 옆문과 통하게 되어 있는데, 회랑의 구조는 궁중의 것과 비슷하다. 국왕은 세간의 왕이요, 불(佛)은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참배객은 최초의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나가게 된다.

③ 범영루와 경루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였으며, 아래에는 오장간(五丈竿)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108이라는 숫자는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751년(경덕왕 10)에 건립하였고, 1593년(선조 26)에 불탄 뒤 1612년(광해군 4)과 1688년(숙종 14)에 중건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 단청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중건된 것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3층으로 된 아담한 누각이다. 범영루의 동편에는 좌경루가 있었으나 조선 말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을 1973년의 복원공사 때 재건하였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한 곳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④ 석가탑과 다보탑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국보 제21호로,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두 탑은 불국사의 사상 및 예술의 정수이다. ≪법화경≫에 근거하여 세워진 이 탑은 영원한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보신불인 석가모니불이 이곳에 상주한다는 깊은 상징성을 가진 탑으로서, 불교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시키고자 노력한 신라 민족혼의 결정이기도 하다. 석가탑 내에서 발견된 유물인 국보 제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표현하는 일곽의 중심을 이룬다.

현존하는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중창된 것이나, 그 초석과 석단 등은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珏羅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⑥ 무설전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이다.

표훈 등 몇 명의 대덕(大德)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이 건물도 1593년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708년(숙종 34)에 중건하여 1910년 이전까지 보존되었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하였다.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이므로 아무런 불상도 봉안하지 않고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만 사용하였으며, 무설전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⑦ 극락전과 안양문 입구에서 연화교.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곽도 751년에 지어졌고, 그 당시에는 회랑을 비롯하여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 및 석조물들은 극락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신라 중기의 전형적인 정토계 사찰의 구조로서 매우 정돈된 것이었다. 안양문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26년(인조 4)과 1737년(영조 13)에 중창하였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며,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안양문을 넘어서면 극락전에 이른다. 견고한 석단 위에 목조로 세워진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750년에 오환(悟還).무숙(武淑) 등이 중창하였고 1925년 3월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목조의 수미단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까지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의 두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의 중수 때 이곳으로 옮겼던 것으로, 지금은 비로전으로 옮겼다. 극락전 안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통하여 올라가는 길에는 3열로 지어 쌓은 계단이 있다. 그 각각은 16계단이어서 모두 합하면 48계단이 된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48원(願)을 상징한 것으로, 48원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건립한 법장비구(法藏比丘)의 뜻을 기린 것이다.

⑧ 관음전 무설전 뒤의 한층 높은 언덕에 있다.

751년 김대성이 6칸으로 지었던 것을 1470년(성종 1)에 중수하였는데, 1593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버렸다. 그 직후 1604년에 해청(海淸)이 중창하였고, 1694년(숙종 21)과 1718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원래 이 관음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관음상은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전단향목(數檀香木)으로 만든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상과 함께 영험력이 크다 하여 매우 존숭받았다고 한다.

이 관음상은 1674년(숙종 즉위년)과 1701년.1769년의 세 차례에 걸쳐 개금(改金)되었다. 마지막 개금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이 관음상이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언제 관음상이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는 1973년의 복원 때 새로 조성한 관음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⑨ 비로전 관음전 아래 서편에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따로 건립한 것은 ≪화엄경≫에 의한 신앙의 흐름이 불국사의 성역 안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수하였으나, 조선 말에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었다. 1973년의 복원공사 때에 현재의 건물을 지어서 극락전에 임시로 안치하였던 국보 제26호인 비로자나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⑩ 부속 암자 및 기타 유물 불국사를 처음 지을 때 토함산 일대에는 일곱 개의 암자가 있었다.

토함산에 칠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칠보동산이라고 하였으며, 따라서 일곱 군데에 암자를 짓고 금.은.진주 등 칠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지를 찾을 수 없다. 불국사 북쪽 탑동에는 김대성이 751년에 창건하였던 몽성암(夢成庵)과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된 암자들을 통합하여 만들었던 심적암(沈寂庵), 1653년에 승려 지원(智元)이 치술령 서쪽 기슭에 세웠던 보덕굴(普德窟).중굴.상굴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청련암(靑蓮庵).백련암(白蓮庵).운수암(雲水庵).천검암(天劍庵).운창암(雲訟庵).신도암(信道庵).임방암(林坊庵)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칠보교 앞에는 두 쌍의 간주(竿柱)가 서 있고 거대한 석조(石槽)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국사 경내에는 보물 제61호인 사리석탑(舍利石塔) 외에도 5기의 부도가 있다. 또한, 경내가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경주국립공원(慶州國立公園) -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에 조성된 국립공원.

찬란한 신라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유적과 자연경관이 잘 어우러진 역사공원이다. 1968년 12월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 138.2㎢. 1971~81년까지 국보 18점, 보물 35점, 사적 65곳, 명승 5곳, 천연기념물 3종, 지방문화재 68점 등 총 194점의 문화재를 복원.정화하였으며, 앞으로도 개발가능한 비지정문화재 161점이 남아 있는 문화재의 보고이다. 소금강지구.남산지구.단석산지구.대본지구.서악지구.화랑지구.토함산지구 등 7개 지구로 이루어졌다. 천연기념물인 등나무.주엽나무.왕버들을 비롯하여 방울소나무.붉은꽃만병초.비자나무.소나무.주목.진달래 등의 식물 782종이 자라고 있으며, 노루.다람쥐.산토끼 등의 포유류와 조류 78종, 특수종으로 알려진 대륙붉은개구리와 소경거미를 비롯하여 곤충류 143종 등이 서식하고 있다.

소금강지구는 경주의 소금강이라 불리며,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백률사(柏栗寺).숭신전(崇信殿).헌덕왕릉(憲德王陵) 등이 있다. 남산과 금오산 일대를 포함한 남산지구는 거대한 노천박물관으로 수많은 불교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36개의 계곡에 110여개의 절터, 61개의 석탑, 78개의 불상 등이 있으며, 남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능선에 위치한 남산성터는 약 5㎞에 이르는 성곽으로 3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124호)과 불곡석불좌상(佛谷石佛坐像:보물 제198호)이 있다. 그밖에 경애왕릉(景哀王陵:사적 제222호).헌강왕릉(憲康王陵).석불입상.와룡사(臥龍寺) 등이 있다. 특히 남산관광도로를 오르는 서쪽에는 왕의 향락을 위한 주연이 베풀어졌던 포석정이 있는데 신라의 종말을 알리는 경애왕의 비극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단석산지구는 신라시대 화랑의 수련장이었던 단석산을 비롯하여 신선사마애불상군(神仙寺磨崖佛像群:국보 제199호), 신선사 등의 유적이 있다. 대본지구는 감포읍 대본리 일대로 해중릉인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이 있으며,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문무왕이 죽은 뒤 용이 되어 동해의 왜적을 막겠다는 유언에 따라 만든 것으로 한동안 왜적의 침입이 멎었다고 한다. 서악지구에는 신라무열왕릉(사적 제20호)을 비롯하여 문성왕릉.진흥왕릉 등의 고분군과 선도산성 및 서악동마애석불(西岳洞磨崖石佛)이 있다. 특히 무열왕릉에 조각된 귀부와 이수는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화랑지구는 소나무가 울창한 옥녀봉 기슭에 김유신묘(사적 제21호)와 금산재(金山齋)고분군이 있다.

토함산지구는 면적이 가장 넓으며,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불국사는 토함산 서남쪽에 있으며, 540년(법흥왕 27)에 창건하여,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이 중건하였다. 한국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미와 문화재가 많은 최고의 사찰이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목탑의 기법으로 세운 화려하고 정교한 석탑인 높이 10.4m의 다보탑(多寶塔:국보 제20호)과 높이 8.2m의 단순.간결하면서도 우아한 3층석탑(국보 제21호)이 있다. 이밖에 청운교백운교(국보 제23호).연화교칠보교(국보 제22호) 등이 있다. 토함산 동쪽에 있는 석굴암석굴(국보 제24호)은 한국 불교조각의 정수로서 석가여래좌상의 안배(按排) 등 전체적인 설계와 기법이 뛰어나 오묘한 구조를 이룬다.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장관이다.

이밖에도 경주시 곳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국보 제31호)를 비롯하여 계림.분황사 모전석탑.분황사.안압지.천마총.황룡사지 등의 많은 유물.유적이 남아 있다. 인왕동에는 1975년에 준공된 경주국립박물관이 있으며, 전시실은 본관 2층 8실과 별관으로 되어 있다. 10만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2,211종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별관에는 천마총과 98호 고분,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신라 1,000년의 찬란했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박물관 서쪽에 있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에밀레종)과 고산사지3층석탑, 천마총의 금관 등이 있다.

또한 보문호 주변에는 대단위종합위락시설인 경주보문단지가 조성되어 모든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민속축제로 매년 10월에 신라문화제가 열리며, 서제(序祭).가장행렬.민속놀이.불교행사.예술제.학술제 등 신라문화를 재현하고 있다.

(3) 토함산 - 오악(五嶽) 중의 하나

오악 - 우리나라의 이름난 5개의 산.
『삼국사기』 제사지에 의하면 동악인 토함산, 남악인 지리산, 서악인 계룡산, 북악인 태백산, 중악인 부악(지금의 팔공산)을 합쳐 부르던 명칭이다. 5악은 삼국통일 직후에 성립되어 국가적으로 중요한 제사인 중사(中祀)가 행해졌다. 그러나 통일 이전에는 남악을 경주 남산, 서악을 경주 선도산(仙桃山), 동악을 토함산, 북악을 금강산(소금강산), 중악을 단석산(斷石山)으로 정해 이를 합쳐 부르던 명칭이었다. 이들 5악은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나, 통일 이후 영토가 확장되면서 새로 설정되었다. 토함산은 왜적의 방어, 태백산은 고구려, 계룡산은 백제, 지리산은 가야지역의 수호 등 호국의 임무를 띠었다.

이러한 5악관념의 성립을 넓은 영토를 일원적으로 지배하려는 전제왕권의 성립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조선 세종의 북진개척 이후에는 새로운 영토개념과 재래의 풍수지리사상이 혼융되어 동의 금강산, 서의 묘향산, 남의 지리산, 북의 백두산, 중앙의 삼각산(북한산)을 가리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