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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전주성(全州城)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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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全州城)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894년(고종 31) 5월 31일~6월 6일
전투지역 : 전북 전주
상세내용

1894년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성에서 벌인 전투.

황토현전투와 황룡촌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1만여 명의 엄청난 위세를 과시하며 31일 아침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마침 이 날은 전주성 서문 밖에 장이 서는 날이었고, 동학농민군은 장꾼과 섞여 이미 수천 명이 시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정오 무렵 장터 건너편 용머리 고개에서 동학농민군이 대포와 총을 쏘며 전주성을 공격하자 장꾼과 농민군은 한데 섞여 서문과 남문으로 밀려들어왔다. 동학농민군은 동문을 제외한 서·남·북문에서 공격을 가하며 황룡촌전투에서 노획한 대환포로 서문을 깨뜨렸다. 곧 성문이 열렸고 전봉준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을 무혈 접수했다.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전쟁 전기간을 거쳐 동학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자 최후의 승리였다. 전주는 호남지역의 정치·경제·군사의 중심지이고 왕가의 발원지였으므로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당시 정부측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한편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은 황룡촌전투 이후 원병의 지원을 받아 다시 전열을 수습하고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6월 1일 전주 용머리고개에 도착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다음 날이었다. 관군은 전주 남쪽 고지 일대에 진을 치고 본영을 용머리 고개 남쪽 산 중턱에 설치했다. 전주성 남쪽을 빙둘러 요소요소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관군과 성을 차지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대적함으로써 전주는 일촉즉발의 전운 속에 휩싸였다.

수성과 공성의 입장이 바뀐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싸움은 관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관군은 6월 1일 결진과 함께 곧바로 농민군이 주둔하는 전주성을 향해 야포공격을 퍼부었다. 동학농민군은 성벽에 의지한 화승총부대의 사격 엄호를 받으며 출격하여 완산의 관군 진지를 서쪽과 남쪽의 두 방향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유리한 지형에 진을 친 관군은 농민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으며, 기세가 꺾인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과 관군간의 사활을 건 대접전은 6월 6일 이루어졌는데, 농민군은 이 날 상오 10시 무렵 서문과 북문으로 진출하여 사마교(司馬橋)와 부근 하류를 건너 유연대를 공격했다.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관군은 남쪽으로 도주했고 이를 추격한 농민군은 일거에 다가산을 점령한 뒤 관군의 본영이 있는 완산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관군은 끝까지 유리한 지형에 의지하여 집중 사격으로 동학농민군을 패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측은 1,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피해를 입어 전의를 상실하였으나, 관군 역시 전주성을 무력으로 공략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양군간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6월 11일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정부가 수용하는 조건으로 양군은 전투 중지를 합의하게 되었고 동학농민군은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