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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시대 : 1924
인물 : 김지섭(金祉燮:1884.7.21~1928.2.20)
신분 : 의열단원

시대적 배경

3·1운동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장기적인 독립 전쟁 대신 소수의 결사를 조직해 암살, 파괴활동을 벌여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해 항일민중폭동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9일에 만주 길림성에 있는 한 중국인 농부의 집에서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결성했다. 성립 당시의 의열단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권준, 서상락의 13명으로 추정하며, 1925년경에는 70명 정도였다. 단장격인 의백에는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의열단은 결성 직후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희생하기로 한다.' 등의 공약 10조를 발표했는데, 과격한 투쟁, 엄격한 행동지침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암살 대상인 '7가살'을 정했는데 이는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인사였다. 그리고 파괴 대상인 '5파괴'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과 그에 관련된 시설을 지목했다. 그리고 암살과 파괴 계획을 실천하고자 폭탄 제조기술을 익혔다.
1920년에 근거지를 베이징으로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중심 노선에 반대하던 한국인의 지원을 받았다. 의열단은 초기에, 부산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박재혁, 1920년 9월 14일), 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최수봉, 1920년 12월 27일),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김익상, 1921년 9월 12일),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저격 의거(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1922년 3월 28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효제동 의거(김상옥, 1923년 1월 12~22일), 도교 궁성 폭탄투척 의거(김지섭, 1924년 1월 5일),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나석주, 1926년 12월 28일) 등을 단행했다. 1923년에는 김원봉의 부탁을 받은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의열단 선언문을 썼다.
1926년을 전후하여 의열단은 활동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그 동안의 활동이 일본의 권력 핵심부에 타격을 가하고 큰 충격을 주었으나, 단원들의 희생도 많았다는 반성이 내부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같은 암살, 폭력을 통한 충격요법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반성하고, 전 민중을 기반으로 하는 무장투쟁을 꾀했다. 이를 위해 민족협동전선의 구축, 통일적인 독립당의 환성, 그리고 세계 혁명과의 연결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한편, 민족 세력의 대동 단결을 위해 다른 민족 단체와 함께 한국대일전선연맹을 발족시켰고, 이를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시켰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으로 의열단은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의열단의 투쟁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세부 사항

김지섭은 1884년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현 안동군 풍산읍) 오미동(五美洞)의 풍산 김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자(子)는 위경( 卿), 호는 추강(秋岡)이며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학문에 출중하여 사서삼경에 능통하는 등 천재라는 칭호를 받으며 자랐다. 21세때에 경북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겸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일제에 대해 불만과 의문을 갖고 있던 의사로서는 공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지섭은 동지들인 김원봉(金元鳳), 곽재기(郭在驥)등과 구국의 방략을 강구하며 국내에서의 독립운동보다는 해외로 나아가 널리 동지를 규합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는데 결심을 굳혔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920년 5월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중국 만주로 들어간 의사는 연해주, 북경, 상해를 순방하며 조국독립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1922년 여름 상해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는데 그에 앞서 동년 4월에 고려(高麗)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원이 되었다. 이때 김지섭은 장건상(張建相)과 상의하여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이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충당할 의도로 가입하였고, 실제 동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많은 동지들과 더불어 참석하였으며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김지섭의 본격적인 의열단 활동은 1923년 3월 국내 일제기관들의 파괴공작을 실현하기 위해 폭탄 반입 시도로 전개되었다. 폭탄 36개를 상해에서 천진(天津)으로 수송하여 이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하여 안동현(安東顯)에 중계소까지 설치하여 김시현(金始顯), 유석현(劉錫鉉), 황옥(黃玉) 등으로 하여금 서울에 반입토록 하였다. 그 후 동년 3월 15일 조선총독부, 경찰서 등 기관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일제의 주구인 황옥의 밀고로 사전에 탐지되어 3명의 동지들이 검거되었다. 다만 김지섭은 교묘한 변장술로 위기를 모면하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동년 12월 재차 국내에 잠입하여 당시 판사 백윤화(白允和 )에 거사자금조로 5만원을 요구하다 거절당하고 오히려 백윤화의 배신으로 동지 윤병구(尹炳九)가 체포되는 불상사가 초래되면서 거사계획은 초래되면서 거사계획은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23년 9월 일본 동경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자 일제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우리 교포 6,600여 명을 학살하여 민중폭동을 미연에 방지한 폭거가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의열단원들은 일제의 만행에 분노가 충천하던 차에 1924년초 일본 동경에서 소위 제국회의(帝國議會)가 개최되어 일본총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과 조선 총독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게 되었다. 의열단은 이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들을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온 천하에 알림으로써 관동대지진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우리 동포의 원한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다. 김지섭은 이 거사계획을 들고 자원하고 나서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폭탄을 지니고 일본 국내로 잠입하기가 쉽지 않았고 더욱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본 현지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열단은 당시 상해에 거주하던 일본인 공산당원들을 포섭하여 잠입방법을 알아보았는데 한 일본인의 형이 일본 삼정(三井)물산회사 소속의 석탄운반선인 천성환(天城丸)의 선원으로 그 배가 지금 상해 대안(對岸)인 포등(浦東)에 정박중이라는 사실과 이들 외항선원들이 흔히 밀수와 밀항을 주선하여 부수입을 올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교섭 끝에 의사를 아편밀수업자인 중촌언태랑(中村彦太郞)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승선케 했다. 1923년 12월21일 상해를 떠난 천성환은 10일만에 12월 31일 일본 구주(九州) 복강현 팔번(八幡) 제철소 앞 해안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동안 폭탄 3개를 행낭에 숨긴 채 밑창에 숨어 열흘 동안 해를 못보고 하루 1,2번 주는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전혀 운동할 겨를이 없어 탈진상태였지만 독립운동에 이미 몸을 던진 의열단원의 기백으로 버텼다. 이후 김지섭은 거사 자금의 부족으로 바로 동경으로 향하지 못하고 며칠 현지에서 머물면서 돈 될 만한 것을 팔아 자금을 만든 후 비로소 동경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겪은 고초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24년 1월 5일 새벽에 동경에 도착한 김지섭은 이미 기차안에서 의회가 휴회중이고 또한 의회가 언제 개회될지는지도 미상이라는 신문보도를 읽고는 목적을 변경하게 되었다. 오랜 생각끝에 일 왕궁으로 뛰어 들어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결심을 굳힌 의사는 우선 거사하기 전 현장답사를 하여 이중교(二重橋)와 앵전문(櫻田門)을 살피고 이중교가 바로 궁성 정문앞에 다리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오후 7시경 이중교로 다시 향하였다. 일본인 관광객과 동행하여 이중교 앞으로 나아가니 일경(日警)하나가 밤이 되면 배관(拜觀)을 금하니 돌아가라는 말에 일본인은 갔으나 의사가 그대로 남아 있자 누구냐고 묻는 순간 의사는 품에서 폭탄을 하나 꺼내 그 경찰에게 던지고는 쏜살같이 정문을 향해 다리로 뛰어 들었다. 이때 다리 저편에서 군인하나가 나와 총을 겨누고 길을 막자 의사는 두번째 폭탄을 던졌으나 맞지 않고 정문 돌단위에 떨어졌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폭탄이 모두 불발이었다. 김지섭은 뛰어나온 군인과 격투를 벌이며 남은 폭탄 하나를 던졌으나 그것마저도 불발이었고 곧 체포되고 말았다. 이는 장시간 배를 타면서 습기에 노출되어 폭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김지섭의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으나 이 사건이 일제에게 주는 충격은 매우 컸다. 당시 청포(淸浦) 내각은 내각조직을 중지하였고, 산본(山本) 내각은 긴급각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한 끝에 내무차관을 견책에 처하고 경시총감 등 경찰수뇌부를 파면하였다. 김지섭은 엄중한 취조끝에 동경 시곡(市谷)형무소에 수감되어 8개월간 지루하고 악독한 고문의 예심을 받아가며 감옥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우리 교포들은 사식(私食)을 차입시켜 주는 등 조국의 열혈청년을 진한 동포애로 감싸 주었다.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공판이 열리는 동안 김지섭은 당당히 자신이 조선독립당원이자 혁명사원임을 주장하였고 일제의 악정과 만행을 일일이 열거하여 통렬히 규탄하였는데 일제는 왕궁침입이 곧 국가에 대한 반역임을 들어 무기징역을 구형하였다. 상고를 취하한 의사는 시곡형무소로 재수감되었는데 조국의 서울 형무소로 이감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묵살하고 천엽(千葉) 형무소로 이감시켜 버렸다. 이곳에서 복역중 1927년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28년 2월 20일 오전 의사는 적국의 차디찬 옥중에서 뇌일혈로 향년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참고 문헌

國家報勳處,《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8卷, 1990.
《高等警察要史》.
《騎驢隨筆》.
《武裝獨立運動秘史》.
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文一民,《韓國獨立運動史》.
金承學,《韓國獨立史》下卷.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