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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김해송(金海彸). 1911~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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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송(金海彸). 1911~1950(?)

가수․작곡가.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송규(金松奎)이며, 주로 사용한 예명 김해송 외에 김수월(金水月), 우미하라 마쓰오(海原松男)라는 예명을 드물게 쓰기도 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고바야시 히사오(小林久男)이며,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마쓰미 토시오(松海敏夫)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1933년에 평양 광성(光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그밖에 공주사범학교, 숭실전문학교, 일본 조치(上智)대학을 다녔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1933년 졸업 이후 행적과 음악을 익힌 경로는 분명치 않으나, 악단에서 연주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3월부터 오케(Okeh)연주단에 참여하여 기타와 하와이안기타를 연주했다. 1935년 가을에 정식으로 오케레코드에 입사하여 자작곡 <항구의 서정>을 11월 신보로 발표하면서 가수 겸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6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오케레코드에서 같이 활동하던 가수 이난영(李蘭影)과 서울의 유명 음식점인 식도원(食道園)에서 결혼했다. 1938년에 잠시 빅타(Victor)레코드로 전속을 옮겼다가, 곧 이어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로 다시 옮겨 1939년 상반기까지 활동했다.

이후 부인 이난영이 부른 <다방의 푸른 꿈>을 복귀작으로 해서 오케레코드로 돌아왔고, 복귀한 뒤로는 주로 작곡가로 활동했다. 음반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동시에 조선악극단 소속으로 무대 공연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여, 박시춘(朴是春)·이복본(李福本)·송희선(宋熙善) 등과 함께 남성보컬팀 아리랑보이즈의 일원으로 직접 무대에 서기도 하고, 악극을 비롯한 다양한 공연에서 작곡이나 편곡을 담당했다. 1943년 말부터 1945년까지는 부인 이난영 등과 함께 약초(若草)가극단으로 소속을 옮겨 활동했고,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에는 새로 창립된 만타(萬朶)악극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해송이 가수로서 발표한 대표적인 작품은 <우리 둘은 젊은이>, <첫사랑>(이상 1936년), <천리춘색>, <라쿠카라차>(이상 1937년), <전화일기>, <내 채찍에 내가 맞았소>, <명랑한 양주>, <청춘계급>, <개고기 주사>(이상 1938년), <나무아미타불>(1939년), <빛나는 수평선>(1940년) 등이며, 작곡가로서는 <첫사랑>, <알아 달라우요>(이상 1936년), <연락선은 떠난다>, <천리춘색>, <고향은 부른다>, <요 핑계 조 핑계>(이상 1937년), <전화일기>, <내 채찍에 내가 맞았소>, <명랑한 양주>, <청춘계급>, <선창에 울러 왔다>, <개고기 주사>, <오빠는 풍각쟁이>(이상 1938년), <나무아미타불>, <다방의 푸른 꿈>, <코스모스 탄식>, <뒤져 본 사진첩>(이상 1939년),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 <화류춘몽>, <화륜선아 가거라>, <불어라 쌍고동>, <잘있거라 단발령>(이상 1940년), <역마차>, <요즈음 찻집>, <선창>(이상 1941년), <낙화삼천>, <경기 나그네>, <목화를 따며>(이상 1942년), <어머님 안심하소서>(1943년) 등이 대표작이다. 가수로서는 80곡 이상, 작곡가로서는 190곡 이상 발표한 것으로 확인되며, 그 가운데 <전화일기>, <사나이 걷는 길>, <구곡간장>(이상 1938년)은 ‘치안방해’ 등의 이유로 판매 금지, 가두 연주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했고, 그해 12월에는 직접 K.P.K악단을 조직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악극단으로 발전시켰다. K.P.K악단은 1950년 6․25 발발 직전까지 <물레방아>(1946년), <천국과 지옥>, <남남북녀>, <이소랑전>(이상 1947년), <아라리아의 노래>(1948년), <육탄 십용사>, <도란도도>(이상 1949년), <칼멘환상곡>, <로미오와 줄리엣>, <자매와 수병>(이상 1950년) 등 대규모 악극을 공연했다. 1947년 8월에 결성된 대중음악협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11월에 결성된 전국가극협회에서는 작곡위원을 맡았다. 1947년 8월 이후 음반 생산이 재개되자 고려(高麗)레코드, 오케레코드, 럭키(Lucky)레코드, 아세아(Asia)레코드 등에서 <흘러온 남매>(1947년), <울어라 은방울>(1948년), <백팔염주>, <선죽교>, <약산 진달래>(이상 1949년), <저무는 충무로>(1950년) 등을 작곡, 발표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북한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북한군이 서울에서 퇴각할 때 북으로 끌려가는 도중 폭격을 맞아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북한에서는 자진해서 입북한 뒤 지병인 폐결핵에 폭격으로 인한 부상이 겹쳐 사망했다고 쓰고 있으나, 그가 폐결핵을 앓았다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