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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 터

이름

원각사 터

카테고리

극장, 주점

연번

113

설치연도

1991

위치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 구세군회관 방향 새문안교회 정문 옆

GPS좌표

37.570184°N 126.973816°E

표석문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극장 원각사가 있었던 곳. 1909년 이인직(李人稙1882-1916)의 설중매, 은세계 등이 공연되었음.

표석설명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이자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



한국 신극운동의 요람으로 1908년 창설되었으며, 그해 11월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처음으로 신극화하여 상연하였다. 원각사 건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두현(李杜鉉)은 그의 《한국 신극사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02년까지 국내에는 연극을 전문적으로 상연할 극장이 없었는데 1902년 정부에서 고종(高宗)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경예식장(稱慶禮式場)으로 봉상사(奉常寺) 구내(지금의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로마식 극장을 본떠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연회장소를 짓고 지금의 극장 명칭에 해당하는 ‘희대(戱臺)’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원각사의 전신이다.

그해 8월부터 칭경예식을 위한 준비로 협률사(協律司)라는 관청을 두어 기녀(妓女)들을 뽑아 연희(演戱)를 교습시켰다. 9월 17일로 예정된 칭경예식이 가을로 연기되자 그 동안 가무를 연습했던 사람들은 ‘협률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기녀 ·삼패(三牌) ·광대(廣大) 등을 모집하여 희대에서 가무의 공연과 활동사진 상영 등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협률사의 활동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하여 1906년 고종의 명으로 협률사를 혁파(革罷)하고 건물은 1907년 2월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 전용건물로 사용하였다.

협률사가 사설단체로 궁내부 관할에서 벗어난 뒤에도 이 건물은 계속 극장으로 사용되었으며 1908년 1월 하순, 관인구락부가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그해 7월 이인직이 이 건물에 원각사를 개설하면서부터 이 건물을 원각사극장이라 부르게 되었고 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고정되었다.

이리하여 궁내부에서 직할하는 국립극장이 된 원각사에서는 처음 2개월간은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華容道)》 등 판소리를 주로 상연하다가 11월 15일 《은세계》를 상연하였는데 당시 신연극이란 이름 아래 상연된 한국 신연극의 효시였다. 그러나 이 최초의 신연극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원각사는 한때 휴연(休演), 1909년 5∼6월에 이인직이 일본 연극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그곳 연극을 답습한 후 《천인봉(千仞峯)》 등의 새 극본을 상연하려 했으나 실행치 못하고 《춘향가》를 공연하였으며 다시 일본에 다녀와서 《수궁가》를 공연하였다. 그 이후 국민회 본부사무소로 사용되고 1909년 11월에 폐지되었다.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으로서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서 의의가 있다.

얽힌 이야기

협률사에서 원각사로



한국근대연극사(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에 의하면 협률사는 황실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탄생한 극장이라고 나와 있다. 고종황제가 등극 40주년 경축식을 전후해 창설된 군악대 운영을 위해 하사한 내탕금 4만원으로 세워졌다. 극장의 책임자도 참령 장봉환이었으며, 극장 건물은 궁중의 혼상제례와 종묘사직의 춘추향제 담당의 내무부소관 봉상시 건물 일부를 터서 만들었다. 협률사는 먼저 전국의 명기들로 전속단체를 꾸렸다. 두 번째로는 고종의 칙명을 받은 김창환, 송만갑이 전국의 명인 명창을 수소문해 170여 명의 대단원을 모으게 된다. 김창환이 대표이며, 이동백, 송만갑, 강용환, 염덕준, 허금파, 강소향 등 남녀 명창과 박유재, 문영수, 홍도, 보패 등 경서도 명창 등이 그들이다. 협률사는 영친왕 등극 40주년 기념식을 형식적으로 치른 이후 일반적인 영업극장으로 운영되게 된다. 첫 일반 공개 공연이 12월 2일의 <소춘대유희>라는 것이었다. <소춘대유희>는 기녀들의 춤과 판소리, 명창들의 판소리, 재인들의 무동춤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연희였다. 재래의 전통연희가 서구의 실내극장으로 들어간 공연이다.

'그래도 막은 오른다. 연극·영화 70년의 애환 <6> 최초의 극장' 기사에 의하면 협률사가 최초의 극장으로서 관객을 모았던 초창기는 비교적 분위기도 좋았을 뿐 아니라 이들 예술가들에게도 응분의 예우를 하여 벼슬까지 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박기홍,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등에게는 국창이라는 칭호를 붙였고 특히 박기홍에겐 의관을, 송만갑에겐 금관자에 감찰을, 이동백에겐 옥관자에 통정이라는 벼슬까지 내렸으니 당시 국악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박의관, 송감찰, 이통정이라 존칭하였다.

참고문헌

1. 원각사ㆍ협률사는…, 헤럴드 경제, 2008.09.18

그래도 막은 오른다. 연극·영화 70년의 애환 <6> 최초의 극장 (2), 동아일보 생활/문화, 1975.09.06

2.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참고이미지
원각사 화재 당시 모습 원각사 화재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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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 구세군회관 방향으로 오다가 콜드스톤을 지나 새문안 교회 정문 옆 인도 변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