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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고이화

해녀 고이화

제주도 북제주군 하도리 1855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고이화씨(여, 1915)는 1931~1932년 구좌, 우도, 성산에서 일어났던 해녀항일운동에 참가한 우도 출신의 해녀로 지금까지 생존해 계신 분이다. 고이화의 아버지는 참봉벼슬을 해서 우도에서는 고선달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여덟 살이나 위였는데 우도에서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대상군 해녀였다. 이화는 형제간 4남매 중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해서 섬의 농사용 땅이라곤 한해에 보리 서너 섬 수확할 밭뛔기 정도가 있어, 이곳 사람들은 누구나가 바다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화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웠는데, 항상 남보다 물질을 잘 하여 '애기상군' 호칭이 늘 그녀를 따라다녔다. 여느 집처럼 고이화도 형제간 중에는 막내였지만 집안의 가정경제를 책임져야만 했다. 15세부터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로 출가 물질을 다녀왔고, 출가 물질을 해서 번 돈으로 300평짜리 집터를 사고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녀는 16세에 처음 해녀항일운동에 참가했다. 우도 초등학교에서 15일간 훈련을 받았다. 테왁(두렁박)을 둘러메고, 왼손에는 빗창, 오른손에는 호미, 그리고 속옷, 물적삼, 초신을 신고서 우도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돌면서 훈련했다. 당시 우도 해녀들은 270명 정도가 참여했으며 훈련을 담당했던 선생들은 고태주, 고원한, 신재홍, 이두삼 등이다. 해녀항일에 대한 기억으로 그녀의 머리에 남은 영상은 일본 순사에게 매를 맞아서 평생 몸에 지니고 다닌 몸의 상처였다. 고이화가 겪은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면 우도의 해녀들은 낚시 거루배인 돛을 단 풍선 10척에 나눠 타서 종달리 모래사장에 모여들었다. 일본의 순사들은 헛총을 쏘면서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세화지서 연단 위에서 강연을 하고 말을 잘 듣지 않아 저항의 기미를 보이면 허리띠를 풀어서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화의 가슴에는 당시 허리띠로 매를 맞고 치료한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해녀들은 다시 우도로 배를 타고 돌아갔다. 고이화는 4.3 사건 때 시집 형제와 남편을 모두 잃었다. 할머니는 아들 셋과 딸 하나에 서른 세 명의 손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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