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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자동차

왕실과 자동차

근대개항기 이후 서구문명이 낳은 근대문물이 우리 나라로 유입되는 경우 대개 국왕(대군주, 황제)이나 궁중사람들을 통해 제일 먼저 유입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름으로 진귀하고 생소한 물건들은 왕실에 먼저 진상되는 것이 전통의 관례임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러한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도 외교관이건 선교사이건 여행가이건 간에 이러한 물건을 가져온 서양인들을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일반인에게는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을 선물로 받거나 구득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계층은 사실상 그리 많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비록 서양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꺼리낌없이 수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점에서도 서양문물의 '제1호' 수용자가 바로 왕실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탓인지 근대 문명의 총아라고 일컬어지는 자동차의 경우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즉, 이것을 최초로 유입한 것이 대한제국 황제이며, 그것도 1903년이라는 설명이 거의 정설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속단인 듯하다. 아무리 관련자료를 섭렵해 보더라도, 적어도 대한제국기에 황제 또는 황후, 심지어 태황제나 황태자가 이땅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는 흔적은 전혀 보이질 않는 까닭이다.

지난 해 창덕궁(昌德宮) 안 어차고에 보존관리되고 있던 2대의 어차(御車)가 문화재청 고시 제2006-103호 (2006년 12월 4일자) 및 문화재청 고시 제2007-14호 (2007년 2월 9일자 변경고시)를 통해 등록번호 제318호 '순종어차'와 제319호 '순종황후어차'로 등록문화재로 등록고시된 바 있다. 이 어차들은 복원 수리과정에서 각각 미국 GM사가 1918년 제작 캐딜락 리무진과 영국 다임러사가 1914년에 제작한 리무진으로 조사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사자료가 말해주듯이 창덕궁에서 자동차를 운행하였던 시기는 1914년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것보다 훨씬 앞선 시기, 즉 대한제국시기에 황실에서 자동차를 굴렸다는 얘기는 적어도 사진자료 또는 공식기록 등 구체적인 물증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므로 이 얘기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대한제국 때는 물론이거니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기존의 황실이 이른바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된 이후로도 한동안은 자동차가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마차(馬車)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부분은 당시의 사진자료와 여러 신문자료를 통해서도 쉽사리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마차'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을 통해 흘러들어온 근대 문물의 한 유형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말고도 창덕궁에 자동차를 들여온 시기가 "1914년경"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또 있다. 이왕직 서무과에서 연차발행한 <이왕직직원록>에 드러난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료는 현재 1911년 9월판, 1914년 7월판, 1915년 4월판, 1918년 8월판 등 4가지를 활용할 수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 기재된 이왕직 직제표를 보면 '운전수(運轉手)'라는 항목이 등장한다. 이것으로 창덕궁에 자동차를 들여온 사실과 그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운전수(運轉手)와 어자(馭者, 마부)에 관한 부분을 뽑아보면, 이러하다.

(1) 이왕직 서무계 인사실, <이왕직직원록> (1911년 9월 현재)

"회계계 구사실(廐舍室) : 고(雇) 혼다 本田鑛五郞 월65원,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43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33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28원, 김동규(金東奎) 월26원, 이병희(李秉禧) 월25원, 이한명(李漢命) 월30원"

(2) 이왕직 서무계 인사실, <이왕직직원록> (1914년 7월 1일 현재)

"회계과 경리실 : 운전수(運轉手) 카토 세이키치(加藤誠吉) 월54원, 어자(馭者)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54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47원, 스기하라 겐노스케(杉原源之助) 월45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43원, 이한명(李漢命) 월30원, 이병희(李秉禧) 월30원"

(3) 이왕직 서무과, <이왕직직원록> (1915년 4월 1일 현재)

"회계과 : 운전수(運轉手) 카토 세이키치(加藤誠吉) 월65원, 어자(馭者)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54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47원, 스기하라 겐노스케(杉原源之助) 월45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43원, 이한명(李漢命) 월30원, 이병희(李秉禧) 월30원"

(4) 이왕직 서무과, <이왕직직원록> (1918년 8월 1일 현재)

"회계과 : 운전수(運轉手) 카토 세이키치(加藤誠吉) 월70원, 어자(馭者) 후루카와 테츠타로(古川鐵太郞) 월57원, 아베 후쿠마츠(阿部福松) 월50원,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 월49원, 스기하라 겐노스케(杉原源之助) 월48원, 이한명(李漢命) 월33원"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운전수의 직책이 공식 등장하는 것은 1914년부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1912년판 및 1913년판 <이왕직직원록>의 내용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제부터 '운전수'의 직책이 신설되었는지는 정확히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어차의 제작연도가 1914년 이후의 것이라는 점, 이왕직(李王職)에 운전수의 직제가 처음 보이는 것이 1914년판부터라는 점에 비춰 본다면, 창덕궁에 자동차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14년(이거나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라고 보면 큰 오차는 없을 듯싶다.

그리고 이보다 더 직접적인 증언 하나가 남아 있다. 전직황제였다가 일제에 의해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격하된 순종이 승하한 직후 <매일신보> 1926년 5월 10일자에는 '융희황제(隆熙皇帝)를 모시던 사람들(3) 친용자동차(親用自動車) 운전수(運轉手) 나카야마군(中山君)'이라는 제목의 연재기사가 수록되었다.

"겉은 자지빛ㅡ 속은 샛노랑ㅡ 대하는 이의 마음까지 숭엄하게 하는 이화표 자동차가 융희황제를 뫼시게 되기는 대정 육년(즉 1917년) ㅡ 이제로부터 약 9년전 가을이었섰다. 융희황제께서 자동차를 새로이 타시고 덕수궁에 문후를 가실 때에 부왕을 그리시는 전하께서는 그 신속함에 만족하옵시어 그 때에 배승하였던 민병석 자작에게 "참 자동차가 좋고나" 하시던 말씀을 들은 이는 자동차 운전수 중산말길(中山末吉, 나카야마 스에키치)군이었섰다.

그는 본시 통감부에 배근하다가 다시 한국황실에서 용두마차를 쓰게되자 명예있는 마차의 교자가 되어 태조고황제(고종태황제의 착오)와 융희황제를 내리 뫼시다가 마침내 대정 6년에 이르러 마차가 폐지되고 자동차로 뫼시게 되자 중산군은 즉시 자동차운전술을 연구하여 마차교자로써 ㅡ 자동차운전수로 세태와 함께 업을 갈게 되었던 것이다. 길은 행인도 얼씬도 못하게 순사가 치워놓겠다, 자동차의 기계는 좋겠다, 환도(핸들)를 잡은 중산군은 그야말로 태연자약히 최후까지 융희황제의 홍릉능행을 삼가 뫼신 것이었섰다.

금곡능행으로 말년의 일을 삼으시던 융희황제께서는 어느 때에든지 생각나시는대로 자동차 대령분부가 내리시었는지라, 이로 인하여 중산군은 일시도 자동차 격납고에서 멀리 떠나보지를 못하였섰다 하며 그 중에도 일요일 같은 날에 능행이 계실 때에는 반드시 친명으로 "일요일에 부려서 미안하다" 하옵시는 내의의 사찬이 있어서 중산군은 항상 우애 깊으신 은덕에 감읍하였섰다고 한다. 전후 십칠년 동안 융희황제를 뫼시던 그는 요사이도 매일 이왕은 전하를 뫼시고 낙선재에서 빈전인 선정전으로 왕복을 하니 그의 감개야 어떠하랴."

여기에 등장하는 나카야마 스에키치의 이름도 위의 <이왕직직원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다만 신문기사에서는 1917년 이후 마차 교자에서 자동차운전수로 전환하였다고 하였으나, 위의 직원록에서는 자동차운전수가 아니라 '어자'의 항목에 여전히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의아하다.

이 기사를 보면 1917년에 이르러 마차가 폐지되고 융희황제를 자동차로 모셨다고 하는 것은 이때에 창덕궁으로 처음 자동차가 도입되었다는 얘기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시점부터 순종이 처음으로 자동차를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창덕궁에 이미 자동차는 도입되어 있었으나 줄곧 창덕궁을 벗어나 행차를 할 때에는 줄곧 마차(馬車)만을 사용했던 것이었다.

창덕궁의 순종이 자동차를 이용한 사례는 <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자에 창덕궁 대조전이 불탔을 때 "...... 일시 식물본관 앞 수정에 넘어셨으나 너무 추운 연고로 다시 자동차로 비원 연경당에 이어하옵시기를 배정하였다가 대강 진화된 아홉시 후에 다시 자동차로 근시 제인을 데리시고 인정전 동행각되는 성정각(誠正閣)에 듭시와 좌정하옵신후 ......"라고 하여 자동차를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고, 이후 <매일신보> 1918년 10월 16일자에는 '서오를 능행'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창덕궁 이왕전하(昌德宮 李王殿下)께서는 기예정(旣豫定)과 여(如)히 15일 오전 10시 자동차(自動車)로 돈화문 어출문(敦化門 御出門)하사 민장관(閔長官), 국분차관(國分次官), 윤찬시(尹贊侍), 무등제사과장(武藤祭祀課長)의 호종(扈從)으로 고양군 신도면(高陽郡 神道面)의 서오릉(西五陵)에 능행(陵行)하시와 친(親)히 봉심전알(奉審殿謁)하옵시고 주찬(晝餐)을 료(了)하옵신 후 오후 2시 환궁(還宮)의 로(路)에 등(登)하사 중도(中途) 덕수궁(德壽宮)에 문안(問安)하옵시고 오후 4시 환궁(還宮)하옵셨더라"고 하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무렵부터 창덕궁에 거처하던 순종은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부분은 앞서 창덕궁 어차(御車)의 운전수 나카야마 스에키치(中山末吉)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이렇게 보면 궁중에 자동차가 유입된 시기는 지금껏 잘못 알려진 1903년도, 1911년도 아니라 '잠정적이나마' 1914년이라고 정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고종과 순종의 경우 제 아무리 문명의 이기였다고 할지라도, 절대적으로 '자동차' 보다는 '마차(馬車)'를 선호하였음은 한치의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참고자료목록]

- <대한제국 관보> 2006.10.20일자, "문화재청공고 제2006-303호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공고" [순종어차/순종황후어차]

- <대한민국 관보> 2006.12.4일자, "문화재청고시 제2006-103호 등록문화재 등록고시" [제318호 순종어차/제319호 순종황후어차]

- <대한민국 관보> 2007.2.9일자, "문화재청고시 제2007-14호 등록문화재 변경고시" [제318호 순종어차/제319호 순종황후어차]

- 이왕직 서무계 인사실, <이왕직 직원록> (1911년 9월 현재)

- 이왕직 서무계 인사실, <이왕직직원록> (1914년 7월 1일 현재)

- 이왕직 서무과, <이왕직직원록> (1915년 4월 1일 현재)

- 이왕직 서무과, <이왕직직원록> (1918년 8월 1일 현재)

- <제국신문> 1902.8.12일자, "마차준비(馬車準備), 칭경예식에 일본과 아국과 청국의 대사가 나온다 ......"

- <황성신문> 1907.11.23일자, "어마차매래(御馬車買來), 황후폐하와 순비전하께옵서 어승하실 마차 2좌를 ......"

- <제국신문> 1902.8.12일자, "안남매마(安南買馬), 마차에 소용할 말 수백필을 또 안남에 주문하여 온다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8.5.13일자, "마필주문, 궁내부에서 마차메는 말 오필을 일본에 주문 ......"

- <대한매일신보> 1910.6.22일자, "어마연습(御馬鍊習), 대황제폐하께옵서 창덕궁내에서 마차을 어운동하옵시기 ......"

- <매일신보> 1917.11.11일자, "대조전 회록, 처참의 극, 불측의 화"

- <매일신보> 1918.10.16일자, "서오릉 능행"

- <동아일보> 1921.7.6일자, "녹음리의 창덕궁, 양전하의 근절은 매우 강녕, 옹주는 매일 계속하여 통학"

- <매일신보> 1926.5.10일자, "융희황제를 모시던 사람들 (3) 친용자동차(親用自動車) 운전수(運轉手) 나카야마군(中山君)"

상세설명

근대개화기에 서양에서 유입된 각종 근대문물의 기원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다 보면, 아주 의외다 싶을 정도로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거나 아주 부정확한 기록만 남아 있는 분야도 간혹 눈에 띈다. 근대 문명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自動車; 自車)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자동차(自動車)는 처음에 '자동차'라기 보다는 대개 '자동거'로 발음이 되었다. 이는 전차(電車)를 '전거'로, 열차(列車)를 '열거'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전거(自轉車)의 경우도 '자전차'가 아닌 '자전거'라고 불렀던 것도 이러한 이치이다.

자동차의 유래에 대해 어떤 자료에서는 막연히 1903년에 도입되었다고도 하고, 창덕궁에 보존된 어차(御車)가 국내 최초의 자동차라는 잘못된 얘기가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윤준모가 지은 <한국자동차70년사> (교통신보사, 1975)에는 서두에 이러한 얘기가 등장한다.

"우리 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3년, 인천 팔미등대가 오늘날까지 72년간 항로를 밝혀온 그 '빛의 의지'를 처음 점화한 때이다. 고종황제가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외국공관을 통하여 미국에서 승용차 1대를 들여온 데서 비롯된다. ...... 그 후 1911년 황실용으로 영국제 '리무진' 1대와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총독용으로 역시 영국제 '리무진' 1대를 구입하였다. 그러니까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의 일이다. 당시 일본 고베에 주재하던 주일 프랑스영사가 경성주재로 전임해 올 때 그가 사용하던 승용차 '프랑스'제 적색 '렌티아' 1대와 발동선 1척을 반입해 온 것이다. 그래서 모두 4대로 늘어났는데 이 당시의 자동차는 ...... 이때만해도 일반 민간인은 자동차를 타볼 생각은 꿈에도 못했고 일부 부유층에서만 인력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철도사십년약사> (1940)에서는 자동차 도입의 역사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490쪽) 조선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수입된 것은 명치 44년(즉 1911년) 이왕직(李王職)에 1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1대가 관청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동차영업은 45년(즉 1912년) 4월 경성부 황금정(黃金町)에 거주하는 오리이 카이치(織居加一)가 승용자동차의 임대영업을 개시하여 인력거, 마차와 머리에 방울을 단 조선말 등이 통행하는 시중을 1대 1시간 5원(圓)의 시간대(時間貸)로 일반의 요구에 응한 것을 그 창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무리 자료를 뒤져보더라도, 명확하게 1903년의 시점에서 자동차가 도입된 흔적을 입증하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화보잡지 <더 그래픽(The Graphic)> 1909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한 장의 삽화("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등장한 자동차")가 서울 거리에 자동차가 나타났음을 입증할 수 있는 최초의 흔적인 듯하다. 여기에는 남대문 앞에서 질주하는 자동차에 놀라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한국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화이트 증기차'는 미국 클리브랜드에 있는 화이트 모터 컴파니(The White Motor Company)가 생산한 것으로 1900년에서 1910년까지 제작되었다고 알려진다.

"[서양에서 온 새로운 귀신 한국의 수도에 첫 출현] 일본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신문 '대한매일신보'의 편집자 만함씨(Mr. Marnham)은 몇 달 전 우리의 컬럼을 전해 듣고 이러한 편지를 썼다 : '내 사진은 서울 거리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자동차의 첫 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명이 낳은 최신 성과물이 이토록 멀고도 덜 알려진 지구의 한쪽 구석까지 어떤 식으로 침투하게 되었는지를 묘사해주는 것으로 독자 여러분들의 흥미를 돋울 것이다. 이 자동차는 30마력짜리 화이트 스팀카(White Steam Car)로 이것이 큰길을 따라 나타나는 걸 발견한 한국사람들은 들고 있던 짐을 팽개치거나 이 새로운 귀신으로부터 보호되기를 기도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조랑말이나 황소들도 그들의 주인만큼이나 깜짝놀라 자신들의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주위의 가게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삽화에는 "'알프레드 만함'의 사진을 보고 찰스 크롬비(Charles Crombie)가 그렸다'는 표시가 남아 있다. 1908년 5월 27일 이후 어네스트 베델을 대신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 된 알프레드 만함(Alfred Weekley Marnham, 萬咸)이 이 사진을 언제 촬영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추가설명이 없으나, 사진 자체의 진위를 의심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에서 위의 상황은 실제로 벌어진 일을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최소한 1909년 이전에 서울 거리에 자동차가 등장했다는 흔적은 만함의 사진에서 그려낸 삽화 이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황성신문> 1906년 5월 15일자에 수록된 '자동차회사(自動車會社)'라는 제목의 기사는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외국인의 손이 아닌 우리들 스스로의 수중에 자동차가 직접 도입되어 운영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북송현거(北松峴居) 권병수(權丙壽) 씨등(氏等)이 경원간(京元間)에 자동차회사(自動車會社)를 창립(創立)하고 철도부설(鐵道敷設)하기 전(前)에는 경원간(京元間)에 사용(使用)하되 임용(賃用) ○○하여 행객(行客)에게 편리(便利)케 하기 위(爲)하여 자동차(自動車) 5좌(坐)를 구매(購買)하였는데 기 규칙(其 規則定款)이 여좌(如左)하니

제일관(第一款) 자동차 주지(自動車 主旨)는 이외국모제(以外國模製)로 하되 ○속자발전기기차(○屬自發電氣機車)하야 활동자전(活動自轉)을 신속거래(迅速去來)케 할 사(事)

제이관(第二款) 탑객차(搭客車)에는 이등(二等)을 분(分)하야 매차(每車)에 가탑수(可搭數) 십인(十人)하고 절부(切符)는 의임차열(依賃車列)하야 매상(賣想)할 사(事)

제삼관(第三款) 물품수운(物品輸運)도 의이관절부례(依二款切符例)하야 임대(賃貸)할 사(事)

제사관(第四款) 도로위험처(道路危險處)에는 자본사(自本社)로 출자수축(出資修築)할 사(事)

제오관(第五款) 영업세단(營業稅段)은 해사무실시후(該事務實施後)에 정세납상(定稅納上)할 사(事)이더라."

이것 말고도, <대한매일신보> 1906년 9월 21일자 및 <만세보> 1906년 9월 22일자에도 이와 관련된 보도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권병수는 전선사장(典膳司長)을 지낸 사람으로 경무사(警務使) 출신의 구연소(具然韶)와 더불어 동업하여 자동차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신문기사에 드러난 문맥으로만 보자면, 이때에 5대의 자동차를 단지 주문만 하였다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구입하여 서울에 당도한 상태였다는 것는지는 분명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몇 달의 시차를 두고 <만세보> 1906년 10월 14일에는 '자동차 운행구역(自動車 運行區域)'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다시 등장한다.

"경성(京城)사는 권병수(權丙壽) 구연소(具然韶) 양씨(兩氏)가 자동차(自動車)를 사용(使用)하기 위(爲)하여 농상공부 인허(農商工部 認許)를 승유(承有)하고 위선(爲先) 경성내외부근도로(京城內外附近道路)에 구역(區域)을 정(定)하고 행객하물(行客荷物)을 전운사용(轉運使用)할 차(次)로 자동차(自動車) 대중소(大中小) 10량(兩)을 구래(購來)하야 12월 1일부터 개시(開始)한다는데 구역개록(區域開錄)함은 좌(左)와 여(如)하더라.

1. 자대안동사가(自大安洞四街)로 경사동 지저동(經寺洞 至苧洞) 2구(區)

1. 자대안동사가(自大安洞四街)로 경황토현신문외마포(經黃土峴新門外麻浦) 2구(區)

1. 자이현(自泥峴)으로 경수표교 지교동재동(經水標橋 至校洞齋洞) 3구(區)

1. 자일본이사청전(自日本理事廳前)으로 경대한문 지서십자각북장동(至西十字閣北壯洞) 2구(區)

1. 자전동(自典洞)으로 경종로 지용산(經鍾路 至龍山) 3구(區)

1. 자서소문(自西小門)으로 경동대문외 지뚝도(經東大門外 至纛島) 3구(區)

우 차임(右 車賃)인 즉(則) 매구(每區)에 신화 이전식 작정사(新貨 二錢式 作定事)더라."

무척 아쉽지만, 이것을 마지막으로 이 회사의 운영이나 활동에 관한 흔적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나라 자동차 유입의 기점이 정말로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인지를 단언하기는 다소 조심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자동차의 증가추세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어 개략적인 흐름은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한 통계수치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그저 참고 삼아, 그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옮겨둔다.

(1) 조선총독부, <조선토목사업지(朝鮮土木事業誌)> (1937), p.71,

"명치44년말(1911년말) 현재 육상운반수단; 자동차 2, 인력거 1217, 하차 1804, 하우차 38337, 하마차 585, 객마차 110."

(2) 아오야기 츠나타로(靑柳綱太郞), <최신경성안내기(最新京城案內記)> (조선연구회, 1915), p.182,

"대정3년도(1914년도) 조사보고; 자동차 8, 마차 6, 인력거 1281, 자전거 630, 하적우마차 431, 적하차 2320."

(3) 이시하라 토메키치(石原留吉), <경성안내(京城案內)> (경성협찬회, 1915), p.89,

"경성최근조사 ; 자동차 12, 마차 9, 인력거 1287, 자전거 2000, 운반마차 435, 운반차 2330."

그런데 오카 료스케(岡良助)의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 (박문사, 1915)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서울 시내에는 영업용(營業用)으로 외국인 테일러씨와 경성자동차상회의 2곳이 있으며, 차체(車體)는 7대가 보유하고 임대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테일러씨'는 금광기술자, UPI통신, AP통신 서울특파원의 신분으로 태평로와 소공동 지역에 '테일러상회'를 운영했던 알버트 W.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서울 종로구 행촌동 1번지에 건설한 서양식 벽돌집 딜쿠샤(DILKUSHA, 1923)의 주인이기도 했으며, 현재 양화진외국인묘지에 그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땅에 상륙한 최초의 자동차가 과연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확실히 1910년대는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의 출발점이었다.



[참고자료목록]

- 윤준모, <한국자동차70년사> (교통신보사, 1975)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제3권)> (서울특별시, 1979)
- 이용선, <거부실록> 제4권 (양우당, 1983), "풍물백경 (10) 자동차"
- 김은신, <한국 최초 101장면> (가람기획, 1998)
- 백성현·이한우,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새날, 1999)
- 김태수,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황소자리, 2005)
- 유모토 고이치(湯本豪一)·연구공간 수유+너머 동아시아근대세미나팀, <일본 근대의 풍경> (그린비, 2004)

- 이경훈, <한국근대문학풍속사전 : 1905~1919> (태학사, 2006)
- 1909.2.20, "A Motor Car in the Land of Morning Calm"
- 1909.3.7, "L'effect produit par la premiere automobil qui penela dans une ville coreenne"
- 靑柳綱太郞(아오야기 츠나타로), <最新京城案內記> (朝鮮硏究會, 1915)
- 岡良助(오카 료스케), <京城繁昌記> (博文社, 1915)
- 石原留吉(이시하라 토메키치), <京城案內> (京城協贊會, 1915)
- 朝鮮總督府鐵道局, <朝鮮鐵道四十年略史> (1940)
- <매일신보> 1936.1.3일자, "현대조선 원조(元祖)이야기 (1) 교통편"
- <조선일보> 1968.4.11일자, "차(車) : 특별연재 개화백경 (5)"
- <황성신문> 1906.5.15일자, "자동차회사(自動車會社)"
- <대한매일신보> 1906.9.21일자, "자동차 영업(自動車 營業)"
- <만세보> 1906.9.22일자, "자동차 인허(自動車 認許)"
- <만세보> 1906.10.14일자, "자동차 운행구역(自動車 運行區域)"
- <대한매일신보> 1907.10.23일자, "동창사 인허, ...... 셋째해에는 자동거를 제조하야 ......"
- <대한매일신보> 1907.10.26일자, "동창사 영업, ...... 제삼회에는 자동거를 제조하야 ......"
- <대한매일신보> 1908.12.20일자, "자동차 사용, 조치원정거장에서 군산항구까지 ......"
- Robert Neff, "Korea's Introduction to the Automobile", 2007/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