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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소동

영아소동

1883년 서울에서는 "영아소동"이라고 불리는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공사관의 서기인 찰리-롱이 서울 주변에서 한국 어린이들을 촬영한 일부 사진 음화를 도둑맞은 것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찰리-롱의 음화가 사라진지 며칠이 지난 뒤 최초의 어린이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어린이는 행방불명되었으나 이후 살해되어 잔혹하게 시신이 훼손된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곧 다른 어린이들도 시신이 훼손된 유사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서양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서양인들 특히 선교사들이 갓난아이들을 납치해 죽인 다음 물에 끓여 이들의 눈을 빼서 밀가루에 넣고 간 다음에 유리판에 펼쳐 말려서 사진이나 약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영아소동이 발생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당시 젖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이 깡통에 보관된 우유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신 이들은 선교사들이 한국 여자들을 납치한 뒤 이들의 가슴을 절단해 우유를 만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사람들은 살해당한 아이들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이들의 분노는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향했다. 당시 고아원이라는 개념은 한국인들에게는 상이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집안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비밀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에서 노예로 팔거나 또는 "식탁용으로 살찌우기 위해" 어린이들을 모으고 있다고 생각했다. 외교사절들이 어린이들을 먹고 있다는 소문도 서울 거리에 나돌았다. 당시 작성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일부 중국인들이 돌리는 악의적인 소문에 의하면 미국공사 자신도 식탁 위에 구운 아기를 올린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서양 외교관들은 소동을 진정시켜 달라고 한국정부에 탄원했다. 한편 한국의 관료들은 외국인들이 어린이를 구입하지도 먹지도 않는다고 부정하기 보다는 이 문제를 지금 조사하고 있다는 의심을 부풀리는 포고령을 발표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파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보면 이를 따라가 추적하고 이들의 거처를 당국에 알려 만약 죄가 있으면 처형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사태가 악화됨에 따라 폭도들이 서울에 있는 외국인 거주지역을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팽배했다. 이에 미국공사 딘스모어는 제물포에 정박 중인 미군함 에섹스호로 전보를 보내 일단의 해병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곧 28명의 해병을 파견했고, 이들은 12시간 동안 걸어서 새벽 2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조정의 관료들은 군대의 파견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며 항의했다. 그러나 다음 날 프랑스와 러시아 해병들도 도착하면서 서울의 상황은 현저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서양인들이 여성의 가슴을 도려내기 위해 죽이지도 않았으며 어린이들도 먹지 않았다는 포고령을 발표했고, 사태는 드디어 종식되었다.

당시 이러한 소동에 대한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다. 찰리-롱은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이러한 소동의 배후인물이며 그가 갓난아이들을 도륙하라고 명령을 내린 장본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대원군이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는 고종을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중국공사인 위안스카이도 고종의 통치를 불안하게 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서양인들이 어린이들을 학살하고 능욕하고 있다고 서울 거리에 헛소문을 퍼트리도록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을 동원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영아소동은 서양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심과 불신을 이용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리스트
Terry Bennett, Korea Caught In Time (Reading, UK: Garnet Publishing Limited, 1997).
McCune and Icenogle, Disgruntled View of Korea: Charles Chaille-long 1887-1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