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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옥헌(중명전)

수옥헌(중명전)

분류 : 궁중건축
건축년도 : 1899년 신축,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 1902년 5월 재건 착수, 1925년 3월 화재발생 처음 수옥헌(漱玉軒)이었다가 1906년 이후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
소재지 : 정동 1-11번


1925년 서울구락부 화재사건


정동 1-11번지에 있던 옛 수옥헌(중명전) 건물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왕직(李王職)의 소유로 그대로 남았으나, 1912년부터 외국인클럽인 '서울구락부(Seoul Club)'에서 이를 빌려 사용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1925년이 되자 느닷없이 이 건물은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이층 전체를 태우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불가피하게도 중명전이 상당 부분 원형을 상실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아래에서는 당시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지면을 통해 보도된 화재사건에 관한 신문기사이다.



(1) <매일신보> 1925년 3월 13일자 :

[작효(昨曉) 정동(貞洞)에 대화(大火), 외교단구락부 소실(外交團俱樂部 燒失), 덕수궁이 가까웠음으로 군대까지 출동하였었다]

작 12일 새벽 3시경에 시내 정동(貞洞) 10번지의 1[정동 1-11번지의 착오] 서양사람의 공회당인 '서울'구락부(俱樂部) 이층 서적실(書籍室)에서 불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싸여 불이 점점 퍼져가지고 순식간에 집 전체가 불에 에워싸이고 말았으나 급거 출동한 각 소방대의 진력으로 동 4시경에 벽돌 이층 한채만 태운 후 진화하여 겨우 전소는 면하였는데 그 손해가 이만여원의 거액에 이르렀으며 더구나 이곳은 덕수궁(德壽宮), 미국영사관, 기타 외인의 큰 상점이 즐비한 곳이었으므로 일시는 적지 않이 소동을 일으켜 용산(龍山) 군대로부터는 약간의 보병(步兵)이 출동하여 궁전을 경호하였더라.

[원인수상(原因殊常), 혐의자 세명을 인치하고 취조]

정동화재의 발화원인이 매우 수상하여 소관 서대문서에서는 방금 그 곳에서 '쿡쿠'로 있는 오복삼(吳福三, 40) 외 두명을 불러 엄중한 취조를 계속중이며 이 집은 오만이천원의 화재보험에 붙어있어 사실손해는 없는 모양이라더라.

[혹(或)은 누전(漏電)인가, 불난 방은 문을 잠그고 아무도 출입을 않았다]

이에 대하여 '쿡쿠' 오복삼(吳福森)의 말을 들으면 "서양사람들이 대개 여덟 시면 돌아가고 그후부터는 이 집을 지키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불이 난 곳은 이층중에도 아주 구석방으로 책 혹은 헌신문들을 쌓아두는 곳인데 한달에 한번이나 사람이 들어갈까 말까 하는 곳이며 물론 어제 저녁에도 한명도 들어간 사람이 없습니다. 문은 앞뒤로 채여두어 바깥에서 누가 들어가려하여도 못 들어가게 됩니다. 불난 원인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그 방에는 전기의 '메돌(즉 미터)'이 있을 뿐인데 그렇다고 누전이라고 얼른 쉬웁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라.



(2) <동아일보> 1925년 3월 13일자 :

[양인구락부(洋人俱樂部)에 화재(火災), 작일 오전 두시, 손해 삼만원]

작일 오전 2시 30분경에 시내 정동(貞洞) 10번지[정동 1-11번지의 착오] 서양인들의 모임인 '서울구락부' 이층으로부터 발화가 되어 동 4시 30분경까지에 이층 양옥인 그 회관 한 채를 전소하여 버리고 겨우 진화하였다는데 손해는 삼만원 이상이 되리라 하며 원인에 대하여는 이층으로부터 누전(漏電)이 된 것이라는데 아직 자세한 것은 조사중이라 하며 마침 그 회관 부근에는 영미국의 각 영사관(領事館)과 외국인의 상인들이 많이 둘려있기 때문에 일시는 대혼잡을 이루고 용산(龍山) 보병대로부터 약간의 보병까지 출동하였었다더라. [사진설명] 거죽은 말쑥한 정동 불탄 자리=기사참조.



(3) <조선일보> 1925년 3월 13일자 :

[정동(貞洞) 서울구락부(俱樂部), 금효(今曉) 2시(時) 소실(燒失), 원인은 누전인 듯하다고]

12일 새벽 새로 두시 삼십분경에 시내 정동(貞洞) 10번지[정동 1-11번지의 착오] 서울구락부(서양인의 구락부) 이층에서 불이나자 시내 각처의 소방대와 서대문(西大門) 본정(本町) 양 경찰서원과 헌병까지 출동하여 진화에 노력하였으나 불길은 걷잡을 새 없이 맹렬하여 마침내 벽돌양옥 한 채를 전소하고 말았다는데 그 원인인즉 이층에 잇는 전선인입실(電線引입室)에서 발화한 것을 보면 누전(漏電)으로 인한 것이라 하며 손해는 약 삼난원 가량이나 된다는 바 그 부근 일대는 모두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과 그외 학교 등 중요건물이 있고 더욱이나 깊은 밤중이므로 일시는 대혼잡을 이루었다더라.

[느낌 많은 수옥헌(漱玉軒), 고종황제께서 정사를 친재, 하시던 의미 많은 신축양옥]

이 집은 지금부터 이십오년 전에 고고종태황제의 명령으로 막대한 금전을 들여 신축된 서양식 전각으로서 수옥헌(漱玉軒)이라고 일컫는 집이며 조선근세사(朝鮮近世史)에 느낌 많은 일로전쟁(日露戰爭)을 전후하여 대략 십년 동안 고고종황제(故高宗皇帝)가 정사를 친재하시던 곳이요 친로파(親露派)가 중심으로 된 여러 인물들이 여러 가지 획책을 이 집에서 하여 고종황제의 아관파천과 기타 파란많은 사건이 생겨난 것이다. 그후 명치 45년(즉 1912년)에 이 집을 서울구락부에 빌려주게 되어 우금 계속하여 오다가 금번에 의외의 재난을 당한 것이라더라.


[원상회복(原狀恢復) 또는 배상청구, 아직도 미결정]

이 집을 밸려준 관계에 대하여는 이왕직 회계과에서 말하되 "당초에 이 집을 빌려줄 때에는 서울구락부로 사용하는 동안에만 빌려주기로 하고 빌려준 것인데 이제 의외에 화재를 당하였슨즉 그와 같이 신축을 청구할는지 또는 그에 상당한 배상을 청구할는지 그점에 대하여는 아직 결정한 바이 없다"고 하더라.

[보험(保險)이 있다, 구락부는 손해 없다]

그 손해가 전부 약 삼만원 가량이라 함은 별항과 같거니와 그집은 현재 빌어 있는 미국인이 기구와 건물에 각각 보험계약이 있으므로 그 보험금을 받으면 손해는 별로 없으리라더라.

상세설명

서울 정동의 한복판에 해당하는 정동제일교회의 길 건너편에는 정동극장이 있고, 그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明殿)이 나온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장소로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진 곳이다. 부끄러운 근대역사의 현장이기는 하지만 꼭 기억하고 보존되어야 할 공간인 셈이다.

이 중명전은 1983년 11월 11일 이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으나 관리상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최근 2006년 9월 21일자로 문화재청으로 소유권 이전과 더불어 지난 2007년 2월 7일 이후 사적 제124호 덕수궁에 추가되어 사적으로 편입된 상태이다. 하지만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치면서 건물의 원형이 이미 상당한 훼손을 입은 점은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건물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기록마다 약간씩 다르게 정리되어있어 자못 혼선을 주고 있다.

우선, 사적으로 승격되기 직전 시절에 중명전 앞에 세워져 있는 문화재 안내문안(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3호)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이 당시의 건물소유자는 문화관광부이며, 관리자는 재단법인 정동극장이었다.

"이 건물은 경운궁(慶雲宮, 덕수궁)에 딸린 접견소 겸 연회장으로, 1900년에 지어졌다. 궁중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는 최초의 것이다. 원래 이 건물은 경운궁 안 평성문(平成門) 밖에 있었는데, 도로가 생기면서 궁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단순한 2층 벽돌집이지만 1층에 아치형 창과 2층 서쪽에 베란다가 꾸며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에서는 광무 10년(1906)에 황태자와 윤비(尹妃)가 혼례를 올렸을 때 외국사신을 위한 초청 연회가 베풀어졌으며, 그 전해에는 을사조약이 조인되기도 했다. 이곳은 일제 때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Seoul Union)라 하여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었다. 1925년의 화재로 인해 벽면만 남았던 것을 복구하였으므로 애초의 원형과는 다소 달라져 있다."
여기서는 이 건물이 "궁중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는 최초의 것이다"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경복궁 건청궁에 있었던 관문각(觀文閣; 1888년 5월에 신축공사의 약정이 이뤄지고, 착공 4년 후인 1892년에 준공을 보았음)이 건립된 때가 이보다는 월등히 빠르다. 또한 이 건물의 건립연대를 "1900년"으로 적은 것도 엄밀한 고증의 결과인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이 설명문에는 가장 결정적인 구절이 빠져있다. 이 건물은 '중명전'이기에 앞서 '수옥헌(漱玉軒)'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건 마치 덕수궁을 얘기하면서 원래 '경운궁'이었다는 내용을 빼먹는 것과 다른 바 없다. 중명전이라는 것은 나중에 고쳐진 이름으로, '중명(重明)'이라는 말은 본디 "일월(日月)이 함께 하늘에 있어 광명이 겹친다(거듭된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각각 제자리에 나란히 서서 직분을 다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수옥(漱玉)'은 원래 옥을 씻는다는 뜻으로, 폭포 따위에서 물방울이 흩어지는 모양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중명전, 아니 이에 앞서 '수옥헌'은 과연 언제 지어진 건물인가

확인해 보았더니, 이에 관한 최초의 흔적은 <독립신문> 1899년 6월 12일자에 수록된 "[잡보] 대관정 거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황상폐하께서 그저께 오전 11시반에 공동 대관정 덕국 친왕 사처에 거동하옵셨다가 환궁하신 후에 덕국 친왕을 미국 공관 옆에 새로 성조한 벽돌집으로 영접하여 오후 세시에 연향하신다더라."

여기에서 말하는 공동은 '公洞'이니 곧 지금의 '소공동'을 가리키고, 대관정은 '大觀亭'으로 미국인 선교사가 지은 것을 황실에서 사들였던 서양식 건물을 일컫는 말인데, 그 당시 독일황제의 동생인 하인리히친왕(Heinrich 親王)이 독일인이 경영하던 강원도 금성군(金城郡)의 당고개금광(堂峴金鑛)을 시찰하러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숙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 직후 이 집은 궁내부 찬의관(宮內府 贊議官) 겸 외부 고문(外部 顧問)이었던 윌리엄 F.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山島; 1874~1946)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위의 신문기사에 보면, "미국공관 옆에 새로 성조한 벽돌집으로 영접하여 ...... " 라고 적어놓은 구절이 보인다. 이 건물의 명칭이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이 벽돌집은 '수옥헌(漱玉軒)'인 것이 확실하고 또한 "새로 지었다"고 하였으니 이 수옥헌은 1899년 6월 직전에 완공된 사실도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당연히 앞서 1900년에 지어졌다고 했던 문화재 설명문안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수옥헌의 존재와 건립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이것말고도 더 있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이 남긴 (1904)가 그것인데, 여기에 수록된 '연표(年表)'에 보면 외교사와 관련한 여러 항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가운데 (210쪽)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899년 ㅡ월 ㅡ일(일자미상)] "이 해(즉 1899년) 동안에 미국공관 바로 서쪽의 궁궐구역에 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한 서양식 벽돌건물이 완공되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적시되지는 못하였으나, 1899년 중에 벽돌건물이 만들어졌다고 적은 내용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하여 <독립신문>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라 하겠으며, 이로써 수옥헌은 1899년 6월경에 완공된 도서관 용도의 서양건축물이었다는 사실이 정리된다.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인다면, 도서관 용도의 벽돌건물인 수옥헌이 건립되기 이전에도 이곳은 이미 '도서관 구역'이었다는 점이다.

가령, 알렌의 책을 바탕으로 편집된 김원모 교수의 <근대한국외교사연표> (단대출판부, 1984)에는 알렌 공사가 1897년 9월 30일에 발송한 "주한미국공사관 주변과 도로의 약도(Rough Sketch of Surroundings and Approaches to U.S. Legation, Sept. 30, 1897)"가 수록되어 있는 바 여기에 보면 수옥헌 자리에 이미 '국왕의 도서관(King's Library)'라고 표시된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보면 아관파천 이후 정동일대에 경운궁을 수축하면서 이곳을 진작에 왕실도서관 용도로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상태에서 1899년에 이르러 이곳에다 추가하여 '서양식 건축물'을 건립한 것이 바로 수옥헌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알렌이 정리한 '연표'에는 수옥헌과 관련한 기록이 여럿 더 보인다. 이 부분을 마저 소개하면, 이러하다.

"[1901년 11월 15일] 미국공관 서편에 인접한 제실도서관(帝室圖書館, Imperial Library)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다(destroyed).

[1902년 5월 3일] ...... 위의 칭경예식과 관련하여 궁궐 내에 대규모 관람시설이 착수되었다. 또한 연회시설이 총세무사의 옛 관사 자리에서 지어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화재로 파괴되었던 황실도서관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재사건은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梅泉野錄), 권3>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 바, 그 내용은 이러하다.

"수옥헌(漱玉軒)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문화각(文華閣)과 정이재(貞彛齋)도 소실(燒失)되었다."

이와 아울러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1901년 11월호에는 이 날의 화재사건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503~504쪽) [뉴스 칼렌다] 이달 16일 새벽 2시경, 미국공사관 바로 서쪽에 붙어있는 제실도서관(Imperial Library, 수옥헌을 말함) 후면의 외곽건물의 하나가 원인불명의 사유로 화재가 발생하였다. 만약 거기에 어떠한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본 건물로 번지기 이전에 불길은 쉽사리 진화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이 장소는 방치되어 있는 듯이 보였으며, 물동이 서 너개가 없었던 탓에 정부는 매우 귀중한 건물을 잃고 말았다. 도서관에는 숱한 귀한 서책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피아노 한 대를 포함한 가구 일체와 함께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대한제국 관보> 1901년 11월 19일자 및 21일자 에는 이곳 "수옥헌(漱玉軒)이 실화(失火)"된 사실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11월 21일자 관보에는 "조(詔)하여 가라사대 문화각(文華閣) 소재 보책(寶冊)과 인(印, 도장)이 회록중(回祿中)에 깎여나간(손상된) 것이 많도다. 이의 개조수보(改造修補) 등을 영하여 궁내부 장례원, 농상공부에서 곧 택일하여 거행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수옥헌은 완공 이후 불과 2년만에 화재로 파괴되고 말았는데, 1902년 5월 이후 재건되는 과정에서 그 외형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1899년 3월에 아펜젤러 목사가 직접 촬영했다고 알려지는 '미국공사관 일대의 전경사진' (배재학당 소장자료;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된 유리원판자료에도 이와 동일한 판형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됨)에 보면 수옥헌 건물은 지금과는 그 모습이 현저하게 다른 '단층건물'로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언제부터 수옥헌(漱玉軒)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중명전(重明殿)이라는 이름은 또 언제부터 통용되기 시작했던 것일까

수옥헌의 용례는 <각사등록자료> 의정부찬정 탁지부대신이 의정부의정 앞으로 보내는 "궁내부 소관 덕국친왕 도경시 접대비를 예산외 지출청의서"(1899년 8월 7일자)가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인 듯하다. 여기에는 앞서 잠깐 설명했듯이 독일 하인리히친왕이 서울에 왔을 때의 '접대비 내역'이 정리되어 있다.

" ...... 二千十八元五角二전 大觀亭漱玉軒修理費及各樣火具兵丁把守幕所費 (중략)
...... 九角八전 漱玉軒 前○燈籠所排束줄價 (하략)"

이러한 기록을 보면, 고종황제가 하인리히친왕(親王)을 불러 접대했다는 "미국공관 옆에 새로 성조한 벽돌집"이란 바로 이 '수옥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수옥헌'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 시절부터 사용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수옥헌이라는 명칭은 그 후로도 아주 다양한 기록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특히 1904년 4월 14일에 발생한 경운궁 대화재 이후에 고종황제가 이곳으로 피난하여 거처를 옮겼으므로, 수옥헌은 그야말로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할 때마다 번번히 역사의 현장으로 자리매김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한 행사, 접견, 회의, 연회 등은 대부분 돈덕전, 구성헌, 수옥헌 등에서 이뤄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지금은 을사조약의 체결장소가 '중명전'으로만 통칭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과연 '수옥헌'은 언제부터 '중명전'으로 바뀌었던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고증할 만한 기록과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가령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뀌는 것 같이 약간이나마 그 이유와 시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으면 좋을 텐데, 수옥헌과 중명전에 관해서는 그러한 기록을 아직 보질 못했다.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언제부터 '중명전(重明殿)'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냐 하는 부분이다.

확인가능한 관련자료를 종합해 보았더니, 중명전의 흔적은 광무 10년(즉 1906년) 가을부터 목격된다. 가령 <일성록(日省錄)>에 남아 있는 용례를 살펴보면 '중명전'이라는 말은 "1906년 9월 28일자(음력)"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비서감일기>의 경우에도 <일성록>과 동일하게 "1906년 9월 28일(양력 11월 14일)" 기사에서의 중명전의 첫 용례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사후에 발간된 그의 전기인 <일당기사(一堂紀事)> (일당기사출판소, 1927)에도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뀐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엿보인다. 즉, 여기에 수록된 '연보(年譜)'에 보면, 수옥헌이라는 구절은 1906.1.1일, 1906.9.13일 항목에 등장하고 반대로 중명전이라는 구절은 1907.5.22일, 1907.8.7일, 1907.9.3일, 이렇게 세 차례 등장한다.

따라서 수옥헌이 중명전으로 전환된 것은 1906년의 아주 늦은 가을 언저리가 아닌가 추정된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혹여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고쳐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것과 무슨 연관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입증된 바가 없다.

그런데 수옥헌과 중명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덕수궁사(德壽宮史)> (이왕직, 1938)의 저자 오다 세이고(小田省吾)는 중명전은 수옥헌의 일부이자 주요건물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제4 수옥헌(漱玉軒, 平成門外)] 수옥헌이라 하는 것은 본궁 서측의 평성문 밖에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현재 미국영사관의 서방에 위치한 전각의 총칭이다. 그 주요건물을 중명전이라 하고, 주위에 다수의 소건물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대략 좌기와 같으나 중명전 외는 전부 폐멸되어 금일 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함은 아쉽다."

여기에서 보듯이 오다 세이고는 수옥헌을 중명전 일대의 전각을 총칭하는 말로 정리하고 있고, 중명전은 수옥헌 구역의 중심건물로 규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 수록된 여타 전각의 내력에 있어서도 " ...... 수옥헌으로 옮겨졌다"고 적어놓은 사례들이 적잖이 보이고 있어, 수옥헌을 단일 건물이 아니라 일정한 구역을 뜻하는 말로 풀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옥헌을 하나의 구역을 총칭하는 용어이고, 중명전을 수옥헌의 일부로만 이해하는 오다 세이고의 설명은 적합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오다 세이고의 설명을 전적으로 그대로 따르기는 지극히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듯이, 수옥헌은 1899년에 미국공관 서쪽에 지어진 단일한 벽돌집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고, 그후 1906년 늦가을에 이것의 이름이 중명전으로 고쳐진 것이 분명한 까닭이다. 다시 말하여 수옥헌은 여러 전각의 총칭이라기 보다는 단일건물에 국한된 명칭인데, 수옥헌은 곧 중명전인 동시에 중명전은 곧 수옥헌으로 판단한다.

더구나 오다 세이고는 수옥헌과 중명전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규명에 있어서 스스로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 보인다. 즉, 그가 1938년에 <덕수궁사>를 정리하기에 앞서 <조선> 1934년 11월호에 발표한 "덕수궁 약사(德壽宮 略史)"에서는 이와 다른 맥락에서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85~86쪽) [수옥헌(漱玉軒)] 본궁의 서쪽, 평성문 밖 미국영사관의 서쪽에 있다. 또한 중명전(重明殿)이라고도 칭한다. 다르게는 많은 부근의 건물을 포함했다.

[중명전(重明殿)] 순서양식으로 수옥헌(漱玉軒)의 별칭이다. 알현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외국인구락부가 되어 중명전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걸고 있는데, 이 건물은 최근 화재를 당하여 지금부터 약 9년전에 재건되어진 것이다. 예전부터 이층구조로 그 서측의 낭하(廊下)는 옛 모습을 남고 있다고도 이른다. (사진참조)"

이러했던 그가 어떤 이유에선지 1939년에 재정리한 <덕수궁사>에서는 수옥헌은 중명전을 포함하는 일대 전각의 총칭이라고 그의 견해를 완전히 고쳐버렸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이러한 오다의 '변화된' 주장에 대해 명백한 문헌상의 증거가 제시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수옥헌과 중명전의 존재에 대해 몇 년 사이에 오히려 더 헷갈려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도 싶다. 하기야 오다의 주장과 논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옥헌이건 중명전이건 구체적인 문헌자료를 통해 누구라도 그것을 잘 가려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수옥헌을 여러 전각들의 총칭으로 보는 오다의 견해는 가령, 선원전 구역을 일컬어 흔히 '영성문 대궐'이라고 총칭하기도 하거나 '대한문안'이라고만 표시해도 그것이 덕수궁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용법일 수도 있겠지만, 수옥헌을 중명전이 아닌 여타 전각을 모두 아우러는 총칭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명백하게도 오다 그 자신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만을 두고 볼 때, 그냥 "수옥헌은 단일건물이며 이것은 곧 나중에 중명전으로 바뀐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수옥헌은 그저 중명전일 뿐이며, 중명전은 곧 수옥헌인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을사조약'이라는 치욕을 당한 것은 ㅡ 흔히 알려진 대로 '중명전'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ㅡ 바로 '수옥헌' 시절의 일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목록]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略史", <朝鮮> 1934年 11月號, pp.39~103
- 小田省吾(오다 세이고),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윤일주, <한국양식건축80년사> (야정문화사, 1966)
- 윤일주교수논문집편찬회, <한국근대건축사연구> (기문당,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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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재보호재단·중앙문화재연구원, <덕수궁> (2003)
-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 국립고궁박물관·민족문제연구소,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특별 기획전, 대한제국 1907 헤이그특사" (문화재청, 2007)
- 윤일주, "경운궁(덕수궁)의 양관건축에 대하여", <부산대학교논문집> 제6집 91965년 12월, pp.151~157
- 김순일, "경운궁의 영건에 관한 연구 ; 공사의 체제와 집행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년 6월)
- 한영우, "1904~1906년 경운궁 중건과 '경운궁중건도감의궤'", <한국학보> 제108집 (2002년 가을호) pp.2~30
- Horace Allen, (1904)
- 통감부철도관리국, <한국철도선로안내> (1908), "남대문정거장급부근평면도"
- <독립신문> 1899년 6월 12일자, "대관정 거동, ...... 미국 공관 옆에 새로 성조한 벽돌집 ......"
- (Nov. 1901), "[News Calendar]" pp.503~504
- <매일신보> 1925년 3월 13일자, ""작효(昨曉) 정동(貞洞)에 대화(大火), 외교단구락부 소실(外交團俱樂部 燒失), 덕수궁이 가까웠음으로 군대까지 출동하였었다"
- <동아일보> 1925년 3월 13일자, "양인구락부(洋人俱樂部)에 화재(火災), 작일 오전 두시, 손해 삼만원"
- <조선일보> 1925년 3월 13일자, "정동(貞洞) 서울구락부(俱樂部), 금효(今曉) 2시(時) 소실(燒失), 원인은 누전인 듯하다고"
- <대한민국 관보> 2007년 2월 7일자, "문화재청 고시 제2007-11호 사적 제124호 덕수궁 추가 지정(중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