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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예술 생애

1. 입문과 수련으로서의 요람기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양반가의 2남2녀의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해주 최씨 문중의 최승희의 아버지는 고종 代에 小科에 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대대로 지방의 토지를 관리해왔던 신분이다.

직업이라고 해야 집에서 서당을 열어 가까운 이웃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또 그는 한시를 읊기도 하는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가정에서는 술이라도 한잔하기라도 하면 최승희의 손을 잡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최승희의 작품 중에는 이러한 모습을 힌트로 '에헤라 노아라'라는 작품을 굿거리장단으로 안무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5살에 숙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항상 1등의 성적을 놓치지 않았고, 2번이나 월반하여 4년 만에 소학교 과정을 마칠 정도로 총명한 소녀였다.

그 후 1922년 11살 되던 해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진학했으나 그해,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대대로 관리해오던 토지들이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최승희의 가계는 기울고 말았다.

하지만 최승희의 우수한 성적과 재능을 인정하여 학교 측에서 장학생으로서, 학비면제, 학용품 지급을 받게 되어 여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집안의 형편이 무척 좋지 않았지만, 부모님과 형제의 애정을 듬뿍 받고 큰 최승희였다.

이러한 최승희에게 세상의 현실을 보게끔 눈을 띄워준 것은 큰 오빠인 최승일이었다. 그녀의 자서전에 “오빠는 나에게 대상을 정확하게 관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또 힘든 고난을 견디어내는 각오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라는 글이 남아있다.

큰 오빠 최승일의 영향으로 소설과 시를 많이 접한 최승희는 보통의 소녀들과는 달리 애정소설이나 의미 없는 이야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현실에 앞의 “생활의식이 풍부한 작품”을 애독하고, 특히 石川啄本본의 시와 단가를 좋아했다.

성적이 우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최승희를 모교 숙명여학교에서는 학교의 명예를 높일 것으로 생각하여 동경의 음악학교에 진학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소학교를 월반하였기에 연령이 맞지 않다는 즉 어리다는 이유로 1년을 연기한다는 총보를 받게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사회인이 되어 자립하겠다는 생각을 굳힌 최승희는 동경유학을 단념하고 교원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서울 사법학교에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연령의 이류로 일년간 입학이 유보되었다. 총명하고, 밝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슬럼프에 빠져 집에 쳐 밖혀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최승희를 보고 있던 오빠 최승일이 경성일보에 게재되어 있던 石井漠 무용단의 서울공연의 알림과 단원 모집의 광고에 눈이 멈추었다.

일본 대학에 재학 중에 石井漠의 공연을 본 최승의 오빠 최승일은 최승희에게 무용가가 될 것을 권유하였다.

무용예술에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강한 마음에 사로잡힌 최승희는 입단을 결심하고, 이틀 후 동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石井漠의 첫 서울 공연 당시,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선인의 우수한 무용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양 민족의 융합을 위해서만이 아닌 당시의 조선민족을 세상에 떠 올리기 위해서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활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으로 제자로 맞아들여 열심히 지도했다.

최승희 또한 그에 응하여 가르침에 열의를 다하여 공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최승희의 자서전에 “石井 선생 문하의 3년간은,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하고 기분 좋은 즐거운 나날이었다. 무한한 희망과 제한 없는 이상을 가지고 모든 것을 익혀나갔다. 무용연습은 물론, 밥 짓는 방법, 죽을 끓이는 방법, 세탁방법, 음악 감상법, 또 피아노 치는 방법, 이외에도 시간이 있을 때면 의상을 만드는 방법, 의상의 색을 고르는 방법까지 배웠다.”고 회상하고 있다.

최승희가 石井漠의 연구소에 입문하였을 당시, 大正天皇이 돌아가신 때로 마침 연구소가 있는 곳을 영구열차가 통과하게 되었다. 모두들 선로에 나와서 돌아가신 분을 애도하며 묵념을 하고 있었으나, 최승희만은 머리를 숙이지 않고 뒤도 돌아보고 있지 않았다. 石井漠은 후에 최승희에게 그 이유를 묻자 20세기를 살아간 조선인이라는 책에 “나는 일본의 천황에게 애도의 마음이 생기기 않습니다.”라고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石井漠은 아무말도 못하였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최승희를 훌륭한 무용가로 키워야겠다는 책임을 느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후 1927년 가을 석정막 무용단은 10월 25일과 26일 이틀간의 공연 예정으로 조선에서의 제 2 회 공연을 위하여 서울을 향했다.

최승희에게는 최초의 서울 공연이 되었다. 고향에서의 최초의 무대는 솔로 작품으로 '세레나데'라는 소품이었다. 서울 출신으로 조선의 처녀 무희는 '조선의 꽃'이라 높이 상찬하였고, 천부적인 자태와 선련된 표현력으로 관객을 압도하였다.

2. 창작과 공연 활동 및 성숙기

1) 한국적 소재를 통한 작품개발


1926년 석정막의 일행을 따라 일본으로 가서 현대무용 교육을 받게 된 최승희는 1927년 제 2 회 이시아 바꾸 무용 발표회에 출연하면서 일본 무용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때 일본의 언론은 최승희를 크게 부각시켜 연일 보도하는 등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어서 1928년 제 3 회 석정막 무용공연이 석정막 후원회를 주최로 단성사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최승희는 2 작편의 독무로 출연하여 국내 무대에 선 보이기도 했다.

최승희는 1929년 여름 석정막 무용단에서의 3년 동안 쌓은 수업에 종지부를 찍고 무용단을 탈퇴한 후 경성에 돌아와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무용소를 개설한 후 그녀는 1930년 2월 1~2일 경성 공회당에서 매일신보 주최로 최승희 무용 연구소 창작무용 제1회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이 공연은 기대만큼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리고 독자적인 창작무용을 만들고 그 무용을 보급하기 위해 자선공연 등에 자주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최승희는 춤 그 자체뿐 아니라 미모가 빼오나 일본의 미인에 4등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이후 최승희는 와세다 대학 러시아어과에 다니고 있던 남편 안막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좌익 문학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되고 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지에 게재한 논문이 문제가 되어 안막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최승희는 석정막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1934년 최승희는 일본에서 자신의 제 1회 공연을 갖게 되는데 이 공연을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 탄생이라는 극찬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제 1 회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최승희는 다음해에 신작발표회를 연이어 개최하게 되는데 1935년 10월 2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통해 최승희는 “다재다능한 안무의 재능을 가진 성숙한 무용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후 오오사카, 칸다, 오까야마, 히로시마 등 일본 전역의 순회공연과 무용영화 <반도의 무희>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근대무용의 수법에 자신의 조선무용을 보다 풍부하게 보다 복잡한 예술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나가면서 그녀의 존재는 무용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2) 유럽과 미국의 순회공연 및 해방까지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최승희는 미국공연을 계획하게 되는데, 미국공연 전 일본에서 고별 공연을 1937년 7월 27일 동경극장에서 개최하게 된다. 이 공연에서 최승희는 <무녀>, <봉산탈춤에서>, <신라관녀의 춤>, <염양춤>, <아리랑>, <금강산 쌍산>, <선험자>, <오리엔탈>, <고구려의 수인>, <방아타령>, <천하대장군>, <검무>, <무녀의 춤>, <습작제 Ⅰ>, <조선풍의 듀엣>, <코리안 댄스>, <에헤라 노아라>, <왕의 무> 등을 발표하면서 확고한 조선무용의 수용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서울로 돌아와 해외공연에서 사용할 음악을 녹음하고 1937년 11월 미국 공연의 길에 올랐다. 최승희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길드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미국에 미국의 공연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반인 운동에 휩싸인 미국의 분위기 때문에 재패니즈 댄서라 기록된 공연포스터로 인해 재미 한인들의 반발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 공연을 중시하고 최승희는 1938년 12월 유럽 공연의 길을 떠났다.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극장인 살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의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유럽에서의 공연에서 최승희는 조선의 무용가임을 분명히 밝혔다고 제자이면서 동서인 김백봉은 밝히고 있다. 파리의 공연에서 찬사를 받은 춤은 <초립동>과 <보살춤>이었다. 초립동의 경우에는 초립 모자를 유행시킬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9년 세계 2차대전의 반발로 최승희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2번째 공연을 하게 되는데 유럽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의 브로드웨이에 있는 센트 제임스 극장에서의 공연은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이러한 해외공연은 150회 개최되었으며, 세계적인 무용가로 명성을 얻는데 성공하게 된다.

일본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에서 얻은 민족무용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으나 반대로 시대적인 환경에 기인해 최승희는 일본 귀국 공연 후 일본 경시청에 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후 최승희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군부대의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일본인 무용 동기생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었다.

“위문 공연을 갈 수밖에 없었어요. 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군대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니까 최승희 본인이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 군대가 강제적으로 보낸 거예요. 이런 것에 대해서 최승희를 오해하고 있는 한국인이나 북조선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안타깠습니다.”

이후 최승희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가지 중국과 만주 전역을 떠돌며 공연을 하며, 중국의 경극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최승희는 경극이 대사 위주로 되어 있는 것을 춤으로 형상화할 수 있도록 조언을 했으며, 실제로 <패왕별희>와 같은 작품을 안무하기도 했다. 이후 남편의 북한행에 따라 최승희는 월북을 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최승희의 월북 이전의 활동까지 만으로 한정하여 살펴보는 관계로 이상으로 최승희의 창작활동을 마치고자 한다. 이때까지의 최승희의 활동은 세계적인 무용가였으며, 그의 다양한 한국적인 현대무용은 세계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인식시키는데 기여한 점이 높다고 평가할 만 하다. 또한 한국의 민족무용의 창작화 작업에 주력했던 측면에서 최승희야 말로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후진양성을 위한 집대성기(월북이후)

1945년 8월 드디어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했고,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선은 불운하게도 남북이 분단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때 최승희는 해방을 중국에서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해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중국에 주재했던 조선인으로 구성된 공산군과 평양으로 들어갔다. 안막은 대학시절부터 프로레타리아 문학 활동을 할 만큼 사회주의를 신봉하던 처지라 해방 후 자신의 거처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승희는 1946년 김백봉과 자신의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남한으로 들어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남한의 사정은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조사하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최승희는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신문에 자신의 억울함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남한에서 친일파로 몰렸던 상황에서도 최승희는 남한에서 자신의 예술 활동을 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그와 같이 증언' 하고 있다.


“바깥 분위기가 최승희 선생님을 굉장히 압박했어요. 말하자면 예술인들이 친일파라고. 자기네들은 일제 때 곱게 지냈답디까. 일종의 시기로 인해 활발하게 연구소 설치를 못하고 미국에서 초청공연이 있어 그 준비나 해볼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안막 선생님께서 평양으로 오라고 하는 기별을 하셨어요.”(이경자, 최승희 제자)


“해방이 되었는데 진짜 여기서 우리 무용계 사람들이 무용인을 육성해서, 말하자면 무용계를 빛낼 수 있는 것은 남한이지 않느냐, 그런데 당신 같은 세계적인 무용가가 고국에 돌아와서 무용하는 후배들을 기르지 않고 이북으로 간다니 말이 되느냐. 그런데 자기 남편이 안막인데, 배까지 보냈으니 할 수 없이…”(안경호, 마국 NBC카메라 기자)


그러나 남한에서의 냉대와 친일파로 몰리는 상황은 최승희를 북한으로 내 몰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으며, 이때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최승희가 북으로 넘어오기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러한 제반의 상황에 의해 최승희는 결국 1946년 7월 자신의 고향이자, 자신이 자유롭게 예술을 발표하기를 원했던 서울을 등지고 월북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평양에서는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임시인민위원회가 열리고, 그들만의 국가가 설립하기 위한 토대를 완성하던 시기였다. 이때 최승희는 자신과 제자 김백봉과 안제승을 데리고 월북을 하게 되는데, 최승희의 예술성을 높이 샀던 김일성은 대동강변의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게 해주었다. 이후 최승희 무용연구소에는 각지에서 선발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김일성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게 된 최승희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자신의 예술을 위해 춤을 창작하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새 민주조선 건설시기 무용예술의 창작방향을 밝혀, 국가적인 사업으로 무용예술인대열을 세우고 모든 창작여건을 보장해주는 등 무용창작사업에서는 새로운 전환이 일어났으며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북한 이민의 충성심을 형상화하는 것은 해방 후 무용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예술에는 제한된 사상과 이념이 있어서는 순수한 예술로서 인정하기 힘들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생각하여 보자면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권유로 인한 타의적인 월북생활에서의 무용작품 활동에는 자유롭지 못하였다고 엿보여진다.

해방 직후의 북한의 무용계는 “불과 몇 안 되는 무용인들의 활동으로 독무와 듀엣과 같은 일부 작품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던 시기를 극복하여 무용소품을 독무, 중무, 군무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시켰고 다양한 무용소품의 왕성한 창작으로 신인무용수를 키우고 예술인들의 기량을 높이는데 중요한 의의” 3) 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북한의 무용계의 더욱 높은 성과로는 “민속무용들의 발굴되고 그것이 무대예술작품으로 정리” 4)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10월 민속창작무용인 봉산탈춤을 발굴 연구하기 위한 봉산탈춤보존회 설립각 지방에서 추어지는 민속무용과 민족무용 유산물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정리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사업을 국가적으로 장려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무용예술분야에서의 무대예술이 아닌 야외에서 추어지던 무용을 발굴하여 무대예술작품으로 재창조 작업을 하였다. 무대예술로서의 재창조 작업의 최승희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농악무>가 있다. 그 외에 솔로 작품인 <칼춤>과 <장고춤>이 있다. 1947년 8월 토지를 부여받은 농민들의 생활을 그린 <봄타령>을 창작하였고, 같은 시기에 안성희의 <목동과 처녀>를 민요 고사리에 맞추어 얌전한 처녀와 활발한 총각의 성격을 살려 민족적 색채가 진한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1949년 무용극 <반야월성곡>을 무용연구소에서 창작공연 하였고,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19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을 데리고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차이코프스키 극장과 스타니슬라브스키 극장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고 이미 무용가로 성장한 최승희의 딸 안성희는 평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위문공연단에 선발되어 남쪽 전선으로 떠났다. 그리고 한때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한때 최승희는 어머니로서 딸의 운명까지도 좌지우지 하는 전쟁에 대한 분노를 무대에서 표현했다. 작품 <조선의 어머니>가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951년 최승희는 민족청년예술단을 인솔하고 동베를린에서 열린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귀국길에는 모스크바와 여러 도시에서 공연했다. 최승희는 북조선에 돌아가기 전에 딸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부속 발레학교에 입학시켰다. 이곳은 오늘날 모스크바 예술대학이 되었다. 안성희는 모스크바에서 2년간 공부를 하고 <집시>라는 작품으로 공산권에서 인정받는 무용가가 됐다. 그리고 3년 후 딸은 동 베를린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대상을 타는 등 어머니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였다.

1952년 최승희는 다시 중국 땅을 밟았으며, 중국에서 최승희는 경극을 현대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며 중국 무용계의 많은 제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19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최승희는 무용단을 이끌고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고, 그때마다 민족무용을 보급시키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9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상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승희는 이러한 위기 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 8.15)을 남겼다. 한국 춤의 기본 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져지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들에 의해 최승희의 말년 예술활동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측면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최승희는 해방이전까지 무용시 위주의 작품을 창작하였다면, 월북 이후 극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무용극 형식의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둘째, 최승희는 월북 이후 자신이 효시를 이루었던 신무용의 체계적인 정립을 위한 '조선민족무용기본'등을 통해 무용수들의 기량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체계를 확립하였다고 밝혀지고 있다.

셋째, 최승희는 신무용의 움직임의 체계적인 정립 이후 자신의 예술세계를 밝힐 수 있는 학적 정립에도 주력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