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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설화 속 인물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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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갈래 : 전설
시대 : 조선
신분 : 승려
지역 : 영남
출처 : 계압만록 (154)
내용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헌종 기유(己酉, 1849)에 안성 청룡산에 있는 부친 남연군의 묘소에 성묘 가는데, 길가에 한 스님이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흥선이 가까이 가서 보니 이승(異僧) 같아서 데리고 점사(店舍)에 들어가 밥을 함께 먹고, 얘기를 해 보니 풍수지리에 밝았다. 이에 흥선이 부친 묘를 이장해야 하겠다고 말하니, 이튿날 스님은 같이 가서 남연군 묘소를 보고 좋지 않다고 말하고, 한 곳에 왕이 날 자리가 있다면서 덕산 가야동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절 법당 뒤의 지점을 지시하고는, 이장할 날짜를 정하고 약속했다. 약속한 날 흥선이 관을 운반해 가니, 스님은 절 법당에 불을 질러 태우고, 타지 않는 구리 부처만 쇠망치로 부숴 골짜기에 묻었다. 그리고 지정한 자리에 묘를 썼다. 이때 가야동에 오래 살고 있던 윤식이 와서 ‘왕기(王氣)’가 있다는 이 산에 묘를 쓸 수 있느냐고 항의하니, 스님은 남연군 역시 왕자왕손이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해 임자(壬子, 1852)에 고종이 태어났고, 계해(癸亥, 1863)에 왕위에 오르니, 흥선이 대원군이 되었다. 이후로 그 스님과 매우 가까워졌으며, 그 묘를 다시 크게 만들고 각종 석물을 해 세웠다. 그리고 근처에 새로 보덕사를 지어 사치스럽게 시설을 꾸몄다. 이렇게 되니 오래 살았던 윤식은 세력에 밀려 그 곳을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이 정만인이라고 하며, 왜승과 양승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흥선이 그 스님에게 소원을 말하라 했는데, 스님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인판(印版)해 출간하게 해달라고 했다. 곧 흥선이 명령을 내려 팔만대장경을 인판하는데, 경판을 모두 쌓아놓았던 판각에서 끌어내 먹을 묻혀 인쇄하게 되니, 결국 경판 쌓았던 건물이 비게 되었다. 이때 스님은 가운데 건물이 비었을 때 그 안에 들어가서, 땅바닥을 파고 애초에 그 속에 묻어 두었던 보물인 ‘해인(海印)’을 꺼내 홈쳐 달아났다. 이 스님이 본래 해인사의 보물인 ‘해인’을 홈치려고 했는데, 경판들이 가득 쌓여 있어 바닥을 팔수가 없어서, 흥선을 대원군이 되게 해 경판 인쇄를 핑계로 다 들어내게 하고, 들어가 땅 속의 ‘해인’을 홈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해인’은 그것을 가지면 신통조화의 재능을 부릴 수 있는 보배인데, 해인사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고, 경판은 신라 지장왕 때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고 한다. 전설에는 ‘해인’이 묻혀 있었을 때에는 판각 건물에 새가 배설물로 더럽히는 일도 없었고, 거미가 줄을 치지도 않았으나, ‘해인’을 훔쳐간 후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가야산은 호중(湖中) 명산인데 흥선이 천장(遷葬)할 때와 고종이 탄생할 때, 그리고 고종이 등극할 때 울음소리가 났다고 한다. 무진(戊辰, 1868)의 사건 전에도 울었다고 하는데, 이 해 4월 서양 도적들이 배를 타고 구만포로 들어와 이 무덤을 도굴해 갔다. 도굴 당한 후 다시 무덤을 만들 때 관이 어디로 가고 없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그냥 봉분을 만들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보고했다. 흥인군 이재원이 와서 보고도 무사한 것으로 알고 돌아갔다고 하니 한심한 일이다. 이렇게 도굴 사고가 있는 것은 혹시 앞서 구리 부처를 부숴 버린 일에 의한 재화가 아닌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