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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주몽(朱蒙)의 어머니.
생몰년 : ?-기원전 24

일반정보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주몽(朱蒙)의 어머니로서 하백(河伯)의 딸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구려조에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 유화인데 여러 아우들과 나와 놀고 있는데, 그 때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였다. 나를 웅신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속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단군기에서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고 부루라 이름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한 뒤에 주몽을 낳은 것이다. 단군기에서는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것이다] 부모가 중매없이 사람을 따른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가서 살게 하였다.(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邊室中 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産子 名曰夫婁 今據此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서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대답하였다. ‘나는 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좆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다’.(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 曰 我是河伯之女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鴨?邊室中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라고 하였다.

『삼국지』 위서(魏書) 열전 동이(東夷) 고구려(高句麗)에서는 “나라 동쪽에 대혈(大穴)이 있어 수혈(隧穴)이라 불렀다. 10월에 나라에서 대회가 열릴 때에 수신(隧神)을 맞아 나라의 동쪽으로 돌아와 제사하는데, 신좌(神座)에는 목수(木隧)를 두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대혈이 있던 나라 동쪽에서 수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유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나오는 신모(神母)를 유화로 상정하여 그것을 맥류(麥類)경작과 관련된 농업신으로 보기도 한다. 동명왕이 부여를 탈출할 때 신모가 오곡(五穀)의 종자를 준 것은 농업신, 지모신(地母神)과 관련되는 것이며 신라의 알영(閼英)도 비슷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김철준, 1975)

동명왕신화에서 유화에 대해서는 동부여왕 금와의 시비(侍婢)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금와는 유화를 만난 후 그를 실중(室中)에 유폐시켰는데 유화가 시비 이상의 존재였다면 실중에 가둔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으며, 결국 유화가 죄가 있었기 때문에 갇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죄는 논형(論衡)계의 기록처럼 금와의 시비였던 유화가 하늘에서 기운을 받아 주몽을 잉태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 동명왕조에서 금와가 유화를 태후의 예로 장사지낸 것에 대해서 유화를 천신적 존재인 해모수의 아내로서의 자격이 아닌 시비였음에도 불구하고 태후의 예로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건국신화에 관련된 중국측기록에서 해모수?유화가 나타나지 않고 『삼국유사』등에만 보이는 이유도 신화가 후대에 전승되면서 그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첨부된 결과라고 하였다.(권태효, 1994) 그러나 유화가 동부여의 금와와 같은 집단 내에 거주하고 상당한 예우를 받은 것에 대해서 그들이 농경문화라는 문화적 동질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유화는 지모신적인 존재였으며, 금와는 그 탄생과정에서 보듯이 다산(多産)의 생산성을 표상하는 동물인 개구리와 관련이 있으므로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김화경, 1998)

고구려에서는 신묘(神廟)가 두 곳에 있었는데 부여신(夫餘神)과 고등신(高登神)이 그것으로서 각각 하백의 딸인 유화와 그 아들인 주몽에 비정된다고 하였다. 그 중 부여신인 지신적(地神的)존재였으며 수신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하였다. 수신은 목각상으로 안치되었는데 부여신 역시 목각의 부인상으로 모셔졌다. 수신은 지신, 곧 지모신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 목각상 역시 부인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신상과 부여신상은 같은 모습을 하였을 것이며, 어쩌면 동일신이었는데 사서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하여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후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이 고등신, 즉 주몽과 관련한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냈다면, 유화 등 지신족계통의 조상신들에게는 이와 별도로 제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김두진, 1999)

고구려의 국가제사 중 하나인 태후묘(太后廟)에 지낸 제사가 있었는데 이는 부여의 동명전승과 주몽전승이 고구려에 의해 일원화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태후묘에 대한 제사는 고구려가 동부여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선택하였으며 이후 신묘(神廟)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주서(周書)』와 『북사(北史)』에 나오는 부여신묘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부여신묘가 태후묘라면 동부여의 복속 이후 5세기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에 따라 부여신묘라고 불린 것으로 해석하였다. 부여신묘가 이와 다른 별도의 신묘라면 『주서』와 『북사』가 대상으로 한 시기인 6세기 중엽 혹은 그 이전시기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평양천도 이후 평양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평양지역에 대한 국가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부여신묘가 국가이데올로기의 표상으로서 기능했을 것이란 점을 들었다.(박승범, 2001)

한편 하백의 딸인 유화와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접촉을 각각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수신족(水神族)과 천신족(天神族) 사이의 접촉과 마찰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건국신화를 전하는 모든 자료에 건국의 시조인 주몽이 한결같이 천제의 손이며 하백의 외손임을 자랑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두 족속의 관계는 살벌한 적대관계라기보다는 통합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 태어난 주몽은 천신과 수신의 혈통을 아울러 지니고 있지만 그가 활약하는 단계에서는 수신 지향의 신성성이 퇴색하고 천신 지향의 신성성이 강화되었다고 하였다. 주몽 자신이 항상 천제의 손자임을 강조했고 여러 문헌에서 고구려가 해모수의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주몽의 집단은 해모수집단과 혈연관계를 가진 천신숭배부족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몽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물의 힘을 빌려 선주자 집단인 송양(松讓)을 항복시켰기 때문에 수신적인 권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서대석, 2001)

해모수가 유화를 깨어 사통한 웅신산을 “고마뫼” 곧 개마산(蓋馬山)으로 보고, 백두산을 일명 개마산으로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백두산으로 간주하기도 한다.(이병도, 1997)『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웅심산(熊心山)”이라 하였다. 「동명왕편」에 인용된 『삼국사』에는 유화 등이 “압록에서 나와 웅심연못 가에서” 놀았다고 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철준, 1990, 『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권태효, 1994, 「東明王神話의 形成過程에 대한 一考察 -동명왕신화에서 제기되는 의문점을 중심으로-」『口碑文學硏究』1.
이병도, 199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김화경, 1998, 「高句麗 建國神話의 硏究」『震檀學報』86.
김두진, 1999,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일조각.
박승범, 2001, 「고구려의 국가제사」『史學志』34.
서대석, 2001, 『한국신화의 연구』, 집문당.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고구려)
高句麗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邊室中 <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産子 名曰夫婁 今據此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 將謀害之 蒙母知之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是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稟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稟離 乃夫婁王之異稱也]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 화주 또는 성주 등이라고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다. 『국사』고려본기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휘는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한 뒤 부루가 죽은 후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 유화인데 여러 아우들과 나와 놀고 있는데, 그 때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였다. 나를 웅신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속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단군기에서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고 부루라 이름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한 뒤에 주몽을 낳은 것이다. 단군기에서는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것이다] 부모가 중매 없이 사람을 따른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가서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깊숙이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췄다. 몸을 이끌어 피하니, 해그림자가 또 쫓아와 비추었다. 그로 인해 잉태하여 한 개의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만 하였다. 왕이 그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매우 영리하고 보통과 달라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번 쏘면 백번을 다 맞추었다. 나라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금와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다. 장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듣지 않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준마를 알아보아 적게 먹여 수척하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해하려고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말하기를 “국인이 장차 너를 해하려고 하니 너의 재략으로 어디를 간들 못하겠는가? 마땅히 속히 도모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가다가 엄수[지금은 자세하지 않음]에 이르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하는데 쫓는 자가 거의 미치니 어찌하랴?”고 하니,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건너자 다리가 없어지니 뒤쫓던 기병이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초가를 비류수 가에 엮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본래 성은 해씨이다.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햇빛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로서 성을 삼았다] 이 때 나이 12세였으니 한 효원제 건소 2년 갑신(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왕이라 칭하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21만 5백 8호였다. 주림전 제21권에는 “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였는데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여 왕이 된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기운이 하늘로부터 와서 그 때문에 내가 임신한 것이다’고 하였다. 아이가 태어남에 미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먹이어 죽지 않더니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고 하였다.[곧 동명제가 졸본부여왕이 된 것을 말한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별도이므로 부여왕이라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