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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벌도리

기본정보

사로국을 구성한 육촌 가운데 하나인 돌산고허촌의 촌장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소벌도리(蘇伐都利)는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으로, 사량부(沙梁部) 정씨의 시조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소벌도리가 형산(兄山)으로 내려와 고허촌의 촌장이 되었으며, 유리왕 9년(32) 정씨 성이 하사됨으로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에 의하면 박혁거세의 알을 처음으로 발견 해 집으로 데려온 인물이기도하다.

전문정보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사로국을 구성한 육촌 가운데 하나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이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에는 소벌공(蘇伐公)으로 되어 있는데, 소벌공은 혁거세의 강림을 맞이하고 그를 양육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곧 육촌장 중에서 소벌공이 가장 유력한 촌장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의 기록을 통해 소벌도리가 형산(兄山)으로 내려와 고허촌장이 된 사실을 알 수 있으나, 혁거세를 양육했다는 기사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전한지절원년임자(前漢地節元年壬子 : 기원전 69)에 육촌의 촌장들이 각기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암상에 모여 군왕을 삼을 것과 수도를 정할 것을 의결하였다는 것을 통해 소벌도리 역시 이 회의에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권1 기이1 혁거세조에는 소벌도리를 “사량부 정씨의 시조(是爲沙梁部 鄭氏祖)”라고 했으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조에는 “고허부는 사량부라하고 성은 최(高墟部爲沙梁部 姓崔)”라고 하여 양 사서의 기록상 차이가 보인다. 또한 양 사서를 통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점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육촌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육촌의 위치와 더불어 육촌장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육부가 성립되기 이전에 사로육촌이 존재하였다고 전하며, 유리이사금 9년(32)에 육부명을 개칭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사로국 건국 이후 어느 시기엔가 6촌이 6부로 개편되었던 사실을 말해주는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6촌이 6부로 개편되었던 사실을 전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리이사금 9년(32)의 육부명 개칭 기사는 연구자들에 따라 논의가 분분하다. 일부 연구자들의 경우는 위의 기록을 그대로 믿어 유리이사금대에 사로육촌이 육부로 개편되었다고 보기도 하였고(이종욱, 1982), 일부는 그 시기를 뒤로 늦추어 파악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또 일부는 육촌 관련 사료의 신빙성 문제를 들어 아예 그에 관한 내용이 후대에 부회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주보돈, 1992)

『삼국유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촌장들의 시조 신화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곧 육촌장들의 선조가 모두 하늘로부터 산에 내려왔으며, 이들이 육촌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육촌장의 이름과 천강 설화는 후대의 꾸민 설화로 보고,(이병도, 1976) 육촌장들의 합의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를 건국했다는 내용의 신화는 상고기가 아닌 중고기에 그 기본 골격이 마련되었다고 하여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전덕재, 1996)

그러나 육촌이 지닌 천강 신화는 대부분의 고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신화이다. 육촌 집단이 경주 일대에 정착하며 토착 세력화하였고, 여기서 각 촌의 촌장들은 어떤 필요성에 의해 시조 신화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육촌집단은 고조선의 유민으로 이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 전반경 경주 일대에 정착하였으며, 이것을 “처음에 시조가 어떤 산이나 봉에 내려왔다.”는 단순 구조의 신화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단순 구조의 짧은 기록 속에서나마 촌장들이 천강자의 신분을 가진 시조의 후예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구조적 특징은 각 촌들이 아직까지는 발전이 미약한 사회 단계에 머무르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는 육촌장의 시조 신화 자체가 혁거세 신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이며, 결국 육촌은 사로국의 형성보다 선행된 사회라는 것을 시사한다.(김병곤, 2003)

또한 시조 천강을 언급한 것은 재래의 지배 이념인 종교적 권위를 표현한 것이며, 하늘과 혈연적으로 관련된 육촌의 시조와 그 후손들이 각 촌을 다스리는 촌장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곧 당시 육촌 사회에 있어서 하늘과 산이 갖는 무한한 힘, 권위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종교적 신성성이 촌락 지배력의 근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육촌장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에서 촌락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는 한마디로 종교적 권위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들을 제정일치적 성격이 짙은 장(長)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육촌장들은 이러한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고 전통적 관습과 혈연적 우위를 바탕으로 대대로 촌장가의 지위를 유지하며, 그들의 지배력을 합리화 시키던 제정일치적 성격이 짙은 존재였다.(김두진, 1999)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종욱,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일조각.
주보돈, 1992, 『韓國社會發展史論』 일조각.
전덕재, 1996, 『新羅六部體制硏究』일조각.
김두진, 1999, 『韓國 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일조각.
김병곤, 2003, 『신라 왕권 성장사 연구』 학연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替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 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 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致也 下例<如>] 三曰 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部 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 西村屬焉 四曰 ?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 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 有古墟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 金山加利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部又作韓?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 東村屬焉 六曰 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勿伊村仍仇?村閼谷[一作葛谷]等 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
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이라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지타(只他)라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部) 또는 한기부(韓?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32)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상세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