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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문

기본정보

신라의 진골 귀족 출신 저술가.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김대문(金大問)은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성덕왕대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계림잡전』, 『고승전』, 『화랑세기』, 『한산기』, 『악본』등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 『계림잡전』과 『화랑세기』는 고려시대까지 전해져 『삼국사기』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전문정보

김대문(金大問)은 신라 중대에 활약한 저술가이다. 그에 대한 간략한 기록은 별도로 입전되지 않은 채 『삼국사기』 권46 열전6 설총전에 부기(附記)되어 전한다. 이를 살펴보면 “본래 신라의 귀족가문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金大問 本新羅貴門子弟 聖德王三年 爲漢山州都督 作傳記若干卷 其高僧傳花郞世記 樂本漢山記猶存)”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김대문이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는 점과 그가 성덕왕대 한산주 도독을 역임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쓴 저술 중 일부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고려시대까지 전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확인된다.

김대문의 저술들을에 대해 살펴보면, 『고승전』은 책 이름으로 보아 고승들의 전기(傳記), 『악본』은 음악에 관한 서적, 『한산기』는 한산 지방의 지리지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저서들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전하는 바 없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경우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576)조에서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라는 문구가 인용되고 있다. 이처럼 『삼국사기』에 『화랑세기』의 일부가 인용된 것으로 보아 『화랑세기』는 『삼국사기』가 집필되던 고려시대까지도 실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다시 1995년에는 이른바 필사본의 모본(母本)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학계와 일반에 커다란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 책에는 모두 32명에 이르는 풍월주(風月主)들의 계보와 그 구체적인 삶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위작설이 제기되는 등 현재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권덕영, 2000)

한편, 위의 네 책 이외에 김대문의 저서로 전해지는 것에는 『계림잡전(鷄林雜傳)』이 있다. 『계림잡전』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528)에서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서술한 부분의 맨 마지막에 협주로 “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이다.(此據金大問鷄林雜傳所記書之)”라고 하여 그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왕호(王號)들의 유례에 대한 김대문의 해석을 인용하고 있다. 신라 왕호에 대한 해석은 불교 수용과 마찬가지로 신라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신라 왕호에 대한 김대문의 설명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저서들 중에서 『계림잡전』으로부터 인용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이기백, 1985)

오늘날 학계에서 김대문이라는 인물의 성격과 그의 저술 목적을 이해하는 시각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하나는 김대문을 신라 중대 “전제왕권(專制王權)”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보고 전통사상을 옹호하면서 “전제주의(專制主義)”와 결탁되어 있었던 유교사상을 배격한 인물로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김대문은 신라 진골귀족의 전통을 찬양하며 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계립잡전』이나 『화랑세기』와 같이 신라의 전통을 잘 나타내주는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이기백, 1985)

이와 달리 김대문이 유학자이며 그의 역사서술은 유교적 방법론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 되었다. 『삼국사기』 열전 중에서 김대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권46 열전6은 문장가(文章家)들과 유학자(儒學者)들의 전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김대문의 기록은 유학자전(儒學者傳)에 실려 있다. 이같은 『삼국사기』 열전의 입전 원칙을 따르자면 김대문은 유학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김대문은 유교사상으로 무장하고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을 지지한 인물로 이해되기도 한다.(조인성, 1998)

참고문헌

이기백, 1985, 「金大問과 그의 史學」『三國史記 硏究論選集(國內編)』3, 백산학회.
조인성, 1998, 「金大問의 歷史敍述 -思想的 背景을 中心으로-」『韓國古代史硏究』13.
권덕영, 2000, 「筆寫本 『花郞世紀』 진위 논쟁 10년」『韓國學報』99.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2남해왕)
第二南海王
南解居西干 亦云次次雄 是尊長之稱 唯此王稱之 父赫居世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作雲梯 今迎日縣西 有雲梯山聖母 祈旱有應] 前漢平帝元始四年甲子卽位 御理二十一年 以地皇四年甲申崩 此王乃三皇之<第>一云 按三國史云 新羅稱王曰居西干 辰言王也 或云 呼貴人之稱 或曰次次雄 或作慈充 金大問云 次次雄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或云尼師今 言謂齒理也 初南解王薨 子弩禮讓位於脫解 解云 吾聞聖智人多齒 乃試以餠?之 <古>傳如此 或曰 麻立干[立一作袖]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也 ?標准位而置 則王?爲主 臣?列於下 因以名之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 不足稱之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 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 此王代 樂浪國人 來侵金城 不克而還 又天鳳五年戊寅 高麗之裨屬七國來投
제2 남해왕(南海王)
남해 거서간, 또한 차차웅이라고 하는데, 이는 존장자에 대한 칭호로서 오직 이 왕만을 그렇게 칭하였다. 아버지는 혁거세이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또는 운제(雲梯)라고 하는데, 지금 영일현 서쪽에 운제산 성모가 있어 가뭄에 빌면 감응이 있다.] 전한 평제 원시 4년(기원후 4) 갑자에 즉위하여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 4년(23) 갑신에 세상을 떠났다. 이 왕이 곧 삼황(三皇)의 첫 번째라고 하였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피건데, 신라는 왕을 칭해 거서간이라고 하였다. 진(辰)의 말로는 왕이며 혹은 일러 “귀한 사람의 호칭을 부르는 것”이다. 또한 차차웅은 혹은 자충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차차웅은 방언으로 무(巫)를 뜻한다. 세인들이 무(巫)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그들을 경외하였는데, 마침내 존장자를 자충이라고 칭하였다”라고 일렀다. 혹은 이사금이라고 한다. 잇금을 뜻하는데, 처음에 남해왕이 죽자 아들 노례가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라고 하고 이에 떡을 물어 그것을 시험하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이와 같다. 혹은 마립간[“립(立)”은 “수(袖)”라고도 쓴다.]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이 이르기를 “마립이란 것은 방언으로 말뚝을 뜻한다. 말뚝의 표시는 지위에 따라 설치하는데, 곧 왕의 말뚝이 주가 되어 신하의 말뚝이 아래에 늘어서기 때문에 말미암아 그것으로 이름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론에 이르기를 “신라는 거서간·차차웅으로 칭한 자가 (각각) 1명, 이사금이라 칭한 자가 16명, 마립간이라 칭한 자가 4명인데, 신라 말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지음에 모두 칭하여 아무개왕이라고만 하고 거서간 등은 말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기에 적당하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일까? 지금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모두 두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인들은 무릇 죽은 뒤에 봉하는 자를 칭하여 갈문왕이라 하였는데, 상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왕 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또한 천봉 5년(18) 무인에 고구려에 속한 일곱 나라가 와서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