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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공

기본정보

왜국 출신으로 탈해왕 때 대보가 된 인물.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호공은 본래 왜인으로서 탈해왕 때에 대보(大輔)가 되었다. 『삼국유사』탈해왕조에 탈해에게 집을 빼앗겼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시조 혁거세거서간 38년(기원전 20)조에 의하면 호공은 본래 왜인으로, 바다를 건너왔으며, 마한에 사신으로 보내졌으며, 탈해이사금 2년(58)조에 대보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전문정보

호공은 『삼국유사』 권1 기이1 탈해왕조에 의하면 탈해와 집을 두고 분쟁을 벌일 끝에 집을 빼앗겼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38년(기원전20)조에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간 내용과 호공이 본래 왜국 출신으로서 박(瓠)을 차고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리웠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또한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63)조에 호공이 알지를 발견하여 왕에게 고하였고 알지가 커서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김알지와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

이때의 왕과 호공, 탈해의 관계를 엄격한 의미의 군신관계라기보다 세력연맹적인 성격을 지닌 관계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 이들 호공과 탈해는 독립된 이주민세력의 장(長)으로 이해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에 호공이 탈해왕 2년(58) 대보(大輔)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였는데, 대보는 귀족회의의 장(長)으로 보이며 이들이 대보의 지위에서 군국정사(軍國政事)를 위임했다는 것이다.(이종욱, 1982)

그렇다면 탈해는 어떻게 기존 세력을 밀어내고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탈해가 스스로를 야장(冶匠)이라고 한데서 그가 상당한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 야장은 대장장이의 의미로, 탈해세력이 철기문화를 지닌 도래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철이라는 매개로 탈해가 기존 세력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조현설, 1997)

이렇게 탈해 신화에 등장한 호공은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63)조의 김알지 신화에도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은 호공이 이미 탈해가 경주에 도래(渡來)하여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남해왕과 탈해왕을 연결시켰고, 다시 탈해와 알지를 연결시켜주는 중개자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려준다고 한다. 그런데 혁거세이사금 38년(기원전 20) 기록에도 등장하여 혁거세와도 연관을 갖는다. 이 기록대로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간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호공이 김알지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100세가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호공이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집단의 대표에 해당하는 호칭이라는 견해가 있다. 나아가 호공이 어떤 집단의 시조일 수 있다고 하였다.(조현설, 1997)

참고문헌

이종욱, 1982,『新羅國家形成史硏究』, 일조각.
조현설, 1997,「호공의 정체와 신화적 성격」『東岳語文論集』3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4탈해왕)
第四脫解王
脫解齒叱今[一作 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 壬寅年至者 謬矣 近則後於弩?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 有船來泊 其國首露王 與臣民鼓?而迎 將欲留之 而舡乃飛走 至於?林東下西知村阿珍浦[今有上西知下西知村名] 時浦邊有一? 名阿珍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 此海中元無石? 何因鵲集而鳴 拏舡尋之 鵲集一舡上 舡中有一<櫃>子 長二十尺 廣十三尺 曳其船 置於一樹林下 而未知凶乎吉乎 向天而誓爾 俄而乃開見 有端正男子 幷七寶奴婢滿載其中 供給七日 ?言曰 我本龍城國人[亦云 正明國 或云 琓夏國 琓夏或作 花廈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嘗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 自五歲六歲 繼登王位 敎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 然無<揀>擇 皆登大位 時我父王含達婆 ?積女國王女爲妃 久無子<胤> 禱祀求息 七年後 産一大卵 於是大王會問群臣 人而生卵 古今未有 殆非吉祥 乃造<櫃>置我 幷七寶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便有赤龍 護舡而至此矣 言訖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 作石塚 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峰如三日月 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 否 爭訟不決 乃告于官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堀地?看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焉> 時南解王 知脫解是智人 以長公主妻之 是爲阿尼夫人 一日吐解登東岳 廻程次 令白衣索水飮之 白衣汲水 中路先嘗而進 其角盃貼於口不解 因而?之 白衣誓曰 爾後若近遙 不敢先嘗 然後乃解 自此白衣?服 不敢欺罔 今東岳中有一井 俗云 遙乃井 是也 及弩?王崩 以光<武>帝中元<二>年丁巳六月 乃登王位 以昔是吾家取他人家 故因姓昔氏 或云 因鵲開<櫃> 故去鳥字 姓昔氏 解<櫃>脫卵而生 故因名脫解 在位二十三年 建初四年己卯崩 葬?川丘中 後有神詔 愼埋葬我骨 其??周三尺二寸 身骨長九尺七寸 齒凝如一 骨節皆連<鎖> 所謂天下無敵力士之骨 碎爲塑像 安闕內 神又報云 我骨置於東岳 故令安之[一云 崩後 二十七世文<武>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五日辛酉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威猛曰 我是脫解也 拔我骨於?川丘 塑像安於<吐>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祀不絶 卽東岳神也云]
제4탈해왕
탈해이질금(脫解齒叱今)[혹은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함]은 남해왕(南解王)때에 [고본(古本)에 임인년(壬寅年)에 왔다한 것은 잘못이다. 뒤의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보다 뒤질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지 않았을 것이요, 앞의 일이라면 혁거세(赫居世)때 일일 것이니 임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민(臣民)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지금도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라는 마을 이름이 있다] 마침 갯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하니 혁거세의 고기잡이 할미였다.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 본래 바위가 없었는데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배를 끌고 가서 찾아보니 까치가 배위에 모여들고 그 배 가운데 궤(櫃) 하나가 있었는데 길이가 20척(尺), 폭이 13척(尺)이나 되었다. 그 배를 끌어다 수림(樹林)밑에 두고 길흉을 알지 못하여 하늘을 향해 맹세하였다. 조금 있다가 궤를 열어보니 단정한 남자아이와 아울러 칠보(七寶)와 노비가 그 가운데 가득 차 있었다. 7일 동안 대접하였더니, 이에 말하길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 [또는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혹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은 왜(倭)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28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台)에서 나왔고, 5,6세 때부터 왕위를 이어 만민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올바르게 하였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아서 비(妃)를 삼았더니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할 때, 7년 뒤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대왕이 군신에게 묻되 사람으로서 알을 낳음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이것이 불길할 징조이라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또 칠보와 노비를 배안에 가득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마음대로 인연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왔노라‘고 말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동안 머무르면서 성 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 같이 둥근 산봉우리가 있어 지세(地勢)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이에 내려와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묻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에 가서 이것이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호공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여 서로 다투어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거하겠느냐하니, 동자가 말하길, ”우리는 본래 대장쟁이었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이 탈해의 슬기있음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었다. 하루는 토해(吐解)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구해오라 하매, 백의가 물을 떠가지고 오다가 도중에 먼저 맛보고 드리려하니 그 물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로인해 꾸짖으니, 백의가 맹세하기를, “이후에는 가깝거나 멀거나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 하니, 그제야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에 우물 하나가 있어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이 돌아가매 광무제(光武帝〕중원中元 2년 정사(丁巳)(57)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옛적 내 집이라 해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혹은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자(鵲字)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성을 석씨라고 했고, 궤를 열고 알에서 벗어져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다. 재위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79)에 돌아가니 소천구(疏川丘)에 장사지냈던바, 그 뒤에 신의 명령이 있어 “ 나의 뼈를 삼가 묻으라” 하였다. 그 구개골의 둘레가 3척 2촌이고, 몸의 뼈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며, 이는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는 모두 연결되어 참으로 천하무적의 역사(力士)다운 골격이었다. 뼈를 부시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내에 모시었더니 신이 또 말하길 내 뼈를 동악에 두라”하므로 모시게 하였다.[혹은 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 27대 문무왕 때인 조로(調露)2년(680) 경진(庚辰) 3월15일 신유(辛酉)밤에 태종(太宗)의 꿈에 매우 사나운 모양의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좇았으므로 지금까지 나라에서 국사가 끊이지 않았으니, 곧 동악신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