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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종

기본정보

지증왕6년(505) 우산국을 정벌한 인물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지증왕 6년(505)에서 진흥왕 23년(562)까지 50여년 활동하면서 우산국정벌, 신라 영토 팽창, 국사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는 등 신라의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

전문정보

박이종(朴伊宗)은 신라 지증왕(智證王) 13년(512) 우릉도(于陵島)를 정벌한 신라의 장군이다. 박이종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지철로왕(智哲老王)조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우릉도의 오랑캐가 조공하지 않아서 왕이 박이종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위협하여 섬의 오랑캐들이 두려워 항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지증왕 6년(505) 우릉도를 정벌한 인물로 박이종을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우릉도의 정벌 기사와 같은 내용으로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지증왕(智證王) 13년 6월조와 『삼국사기』권44 열전(列傳)4 이사부(異斯夫)전을 통해서 같은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사기』기록과 『삼국유사』 기록의 차이점은 박이종을 이사부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이종의 성씨가 박씨로 지칭되고 있는 반면, 『삼국사기』열전에서는 이사부의 가계도에 대해서 내물왕의 4세손 즉, 김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이종의 우산국 정벌 이외에 치적에 대한 기록으로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왕 6년(505)에 “실직주를 설치하여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는데, 군주의 명칭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하여 실직주의 첫 번째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군주는 기록상 주(州)의 책임자로 볼 수 있다. 이 군주의 위상에 대해서, 한 번씩 지나가는 외관 정도로 평가하여 이사부의 위상이 높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 되는 견해가 있다.(한우근, 1960) 반면, 군주는 최상의 외관으로서 군주를 지낸 37명 모두가 진골만이 임명되었으며, 그 기능이 신라의 영토확장과 지방제도의 확립과 함께, 최고의 외관직이었음을 밝혀 이사부의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신형식, 2004)

이후 박이종의 기록은 진흥왕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2년(541)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내외병마사를 맡겼다”는 기록을 통해서, 이사부가 병부령이라는 군정권의 최고의 자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영토 확장에도 큰 공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단양적성신라비(丹陽赤城新羅碑)」에 의하면, 이찬 이사부는 파진찬 두미(豆彌)와 아찬 비차부(比次夫)·무력(武力)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이기백, 1978) 그리고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흥왕(眞興王) 11년(550)에 따르면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공취하여 성을 증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11년(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하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 이사부는 이 두 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이어 금현성 탈환을 위해 재차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흥왕(眞興王) 23년(562)조와 열전 44 사다함(斯多含)조를 통해서 대가야지역 영토를 넓히는데 큰 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23년 (562)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 때에 사다함(斯多含)이 5,000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削檀門)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중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본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진흥왕 6년(545) “7월에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아뢰어 국사(國史)를 편찬할 것을 건의 하고 있다.” 고 하여, 국사를 편찬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는 등 박이종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명식, 2004)

참고문헌

한우근, 1960, 「고대국가성장과정에 있어서의 대복속민시책 (상)」『歷史學報』12·13合.
이기백, 1978, 「丹陽赤城碑 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部分의 檢討」『史學志』12.
신형식, 2004, 『新羅通史』, 주류성.
이명식, 2004, 「新羅 中古期의 將帥 異斯夫考」『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2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경주문화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로왕)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 辛巳則三年也]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一屎塊如鼓大 爭?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 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不臣 王命伊<飡>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향칭(鄕稱)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500)에 즉위하였다.[혹은 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나 됨에 배필을 얻기 어려워 사자를 3도에 보내 구하도록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러,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를 양쪽 끝을 물면서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였더니, 한 소녀가 고하기를, “이것은 부(部)의 상공(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여자의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왕께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황후(皇后)로 봉하니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으로 쓴다]가 있다. 둘레가 2만 6천 7백 30보이다. 이 섬의 오랑캐들은 그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이찬(伊?) 박이종(朴伊宗)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라고 하였다. 섬의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이에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백(州伯)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