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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천공

기본정보

신라 진덕여왕대의 상대등(上大等).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나오는 우지암 회의에 참여한 대신(大臣) 들 중 하나로, 상대등(上大等)의 지위에 있으면서 귀족회의를 주관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의 우지암 회의에 참여한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茂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 중의 한 명으로 알천공이 등장한다.

알천공(閼川公)에 관한 기록은 선덕여왕 5년(636) 각간(角干)으로 장군(將軍)이 되어,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고자 하는 백제 우소(于召)의 부대를 갑사(甲士) 500인으로 옥문곡(玉門谷)에서 물리치는 기사부터 등장한다. 이후 선덕여왕 6년(637)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하여 그 이듬해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 공격을 막아냈고, 비담(毗曇)?염종(廉宗)의 난이 진압된 진덕여왕 원년(647)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진덕여왕이 재위 8년만에 죽자 섭정(攝政)을 청하는 군신(群臣)들의 논의를 물리치고 김춘추를 왕위 계승자로 추대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의 우지암 회의에 참여한 6명은 진덕왕대 화백회의의 구성원으로, 진덕왕 1년에 상대등이 된 알천공을 중심으로 대등(大等)의 후신인 대신(大臣)들이 본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알천이 상대등의 자격으로 이 회의를 주재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이에 근거하여 화백회의 의장은 상대등이라는 등식이 통설화되었다.(이기백, 1974)

우지암 회의의 성격에 대해서는 진덕왕이 죽은 뒤에 알천을 추대하기 위한 회의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77)

그러나 이 기사는 진덕왕이 즉위하여 당 태종에게 올린 태평가에 뒤이어 기록되고 있어 그 내용의 일관성을 찾기가 힘들며, 그 중심 소재가 알천공의 완력을 드러내는데 역점을 두고 있는 듯 하면서도 유신공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권력을 잡은 이후에 윤색된 것으로 보면서, 우지암 회의가 개최된 시기를 선덕왕 초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기는 알천공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지암 회의에서 결정코자 한 국사(國事)를 선덕왕의 즉위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곧, 선덕왕은 국인(國人)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진평왕이 죽었을 때 당은 그를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봉하면서도 선덕왕을 곧바로 책봉하지 않고, 즉위 4년만에야 당나라로부터 책봉된 사실은 선덕왕의 실제 재위 시기가 『삼국사기』 기년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회의 관계기사 중 국왕이 참석하지 않은 회의는 국왕 추대의 경우에 한정된다고 한다.(박남수, 1992)

알천의 성격에 대해서는, 선덕여왕 초년에 이미 국왕의 종친으로 병권과 밀접히 관련된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곧, 선덕여왕 5년부터 알천이 모든 군사적 활동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당시에 병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인물로 짐작된다는 것이다. 알천은 왕권과는 별도로 중고기 왕실을 이끄는 대표자적 지위에 있으면서 화백회의에서 왕실의 대변자로서 왕위계승문제나 국가적 대사를 조율할 수 있는 힘과 배경을 두루 갖춘 자라고 한다.(박남수, 1992)

이와는 달리 알천을 귀족 중심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구귀족세력의 마지막 대변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의하면, 진덕여왕의 사망 이후 보수 세력의 우두머리인 알천과의 대결 끝에 신귀족세력인 김유신과 연합한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중대가 열린다고 한다.(김영하, 2002)

한편, 알천(閼川)을 『삼국유사』 왕력에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나오는 음갈문왕(飮葛文王)과 동일 인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박남수, 1992)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노태돈, 1977, 「삼국의 정치구조와 사회?경제」 『한국사』 2, 국사편찬위원회.
박남수, 1992, 「新羅 和白會議의 機能과 性格」『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上, 탐구당.
김영하, 2002,『韓國古代社會의 軍事와 政治』,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卽位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顯>慶前春秋已登位 <顯>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在<顯>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林國王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軍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方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武>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于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 撲於地而殺之 閼川公?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靑松山 二曰南于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바쳤다.[어떤 책에 “춘추공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기뻐하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현경(顯慶) 전에 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660)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 때이며,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서 무늬를 수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왕의 재위 때인 것이 마땅하니, 대개 김흠순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계림국왕(?林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대당(大唐)이 왕업을 개창하니, 어마어마한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도다. 전쟁이 그치니 군사(戎衣)는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왕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체모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아, 운수를 다스림이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번(幡)과 기(旗)는 어찌 그리 빛나며,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을 어긴 자는, 뒤집히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가 옥촉(玉燭)과 같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비치네. 산악의 정기는 재상을 내려,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빛내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무림공(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란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