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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공

기본정보

자장의 아버지이며, 신라 진덕여왕대의 대신(大臣).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자장의 아버지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나오는 우지암 회의에 참여한 대신(大臣) 들 중 하나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의 우지암 회의에 참여한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무림공(茂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 중의 한 명으로 무림공이 등장한다.

무림공은 자장의 아버지로서 진골(眞骨) 소판(蘇判)이었다. 소판은 잡찬(?飡)의 별칭으로 경위 3등에 해당하는 고위관등이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 의하면, 무림공이 후사가 없자 천부관음(千部觀音)을 모셔 서원함으로써 선종랑(善宗朗), 곧 자장을 낳았다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5 신주(神呪)6 명랑신인(明朗神印)조에 의하면,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딸로 남간부인(南澗夫人) 혹은 법승랑(法乘娘)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렇다면 법승랑은 명랑의 어머니이며 자장(慈藏)의 누이가 된다.

무림공의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추론해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慈藏定律)조에 의하면, 자장이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자장이 출가한 선덕여왕 5년(636) 이전에 무림공이 죽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의하면, 진덕여왕대(647-653)에 무림공의 존재가 보이고 있다. 진덕여왕대에 그의 아버지인 무림공이 건재해 있었다는 이 기록을 믿는다면, 앞의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는 사료가 윤색된 것으로 볼 수 있다.(신종원, 1992)

참고문헌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卽位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顯>慶前春秋已登位 <顯>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在<顯>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林國王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軍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方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武>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于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 撲於地而殺之 閼川公?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靑松山 二曰南于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바쳤다.[어떤 책에 “춘추공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기뻐하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현경(顯慶) 전에 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660)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 때이며,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서 무늬를 수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왕의 재위 때인 것이 마땅하니, 대개 김흠순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계림국왕(?林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대당(大唐)이 왕업을 개창하니, 어마어마한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도다. 전쟁이 그치니 군사(戎衣)는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왕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체모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아, 운수를 다스림이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번(幡)과 기(旗)는 어찌 그리 빛나며,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을 어긴 자는, 뒤집히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가 옥촉(玉燭)과 같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비치네. 산악의 정기는 재상을 내려,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빛내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무림공(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란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