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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기본정보

신라의 귀족이자 김유신의 할아버지.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무력(武力)은 무도(茂刀)로도 불렸는데,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충왕의 둘째 아들이다. 또한 김서현의 아버지이면서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며 신라에 투항한 후에 귀족으로 활약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金庾信)조에 의하면, 무력(武力) 이간(伊干)의 아들인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金氏)의 장자(長子)는 유신(庾信)이며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서는 “구충왕(仇衝王). 김씨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42년이다. …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爾叱)의 딸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仇衝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 王妃分叱水?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여기서 무도(茂刀) 각간(角干)은 아버지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충왕(仇衝王, 재위 521-532)이고 어머니는 왕비인 계화(桂花)인데, 이들의 둘째 아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9년(532)에는 “금관국(金官國)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고 하여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둘째 아들이 무덕(武德)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가락국기』의 무도(茂刀)는 발음과 자형이 오히려 셋째 아들인 무력(武力)에 더 가깝다. 이러한 이유에서 무도(茂刀)가 무력(武力)과 같다고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三品彰英, 1979)

『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金庾信) 상(上)에서는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무력(武力)이고 아버지가 서현(舒玄) 혹은 소연(逍衍)이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따라서 무도=무력은 서현의 아버지이며, 김유신의 할아버지로서 이후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김씨(新金氏) 세력의 직계 조상이 되는 것이다.

신라에 투항한 이후의 무력(武力)의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각종 금석문 자료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가락국 구충왕의 장남인 세종(世宗)과 마찬가지로 신라에 투항한 이후에 신라의 귀족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법흥왕(法興王)19년(532)에 가락국의 왕족으로서 신라에 투항한 무력은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서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로 나온다. 여기서 무도의 관등은 제6등인 아찬(阿飡)에 해당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한편 이때 무력은 형인 세종과 함께 언급되었는데, 세종은 제5등인 대아찬(大阿?)에 해당하는 대아간지(大阿干支)로 표기되어 있어 형제간에 관등의 위계에서 차이가 확인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4년(553)조 기사에서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武力爲軍主)”는 기사가 있다. 이와 연관된 내용이 『삼국사기』권41 열전1 김유신(金庾信) 상(上)에서는 “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官)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라고 되어 있다. 즉, 무력은 진흥왕 14년(553)에도 여전히 제6등인 아찬(阿飡)의 관등에 있으면서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官)이 되어 백제와의 전투를 이끌었고, 전투 이후에 신주의 군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서는 무력이 사탁(沙喙) 영력지(?力智) 잡간(?干)으로 나오고 있고, 진흥왕 29년(568)경에 건립된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와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에서도 사탁부(沙喙部) 영력지(?力智) 잡간(?干)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영(?)’은 ‘무(武)’의 이체자이거나 같은 발음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력지(?力智)로 표기된 무력은 이 무렵에는 제3등인 잡찬(??)에 해당하는 잡간으로 관등이 오른 것을 알 수 있다.(노중국, 1992)

그런데 무력은 여러 금석문에서 기재 순서가 변화하는데 주목한 견해가 있다.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서는 9명중 8번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서는 42명중에 8번째,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는 23명중 5번째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무력의 정치적인 위상이 급상승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신형식, 1984)

그렇지만 진흥왕 22년(561)부터 29년(568)까지 무력의 관등이 잡간(?干)으로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신라에 투항한 뒤에 승승장구하던 무도가 진골귀족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것으로 풀이한 연구도 있다. 진골중심의 골품제사회에서 투항한 타국의 왕족이라는 이질적인 세력이 가진 한계로 파악하고 이후에 아들인 서현(舒玄)의 활동에는 제약이 있었다는 것이다.(주보돈, 2004)

한편 진흥왕 29년(568) 이후의 무력에 대한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를 통해서 진흥왕 29년(568)에 무력은 대등(大等)으로 중앙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문에 함께 언급된 거칠부(居柒夫)가 사륜(舍輪)을 진흥왕의 후계자로 옹립하였을 때 이에 동조하였으나,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물러나고, 상대등인(上大等) 거칠부도 물러나면서, 무력의 정치적인 위상도 위축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선석열, 2001) 결국 무력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구체적인 시기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9년(532)조에서 가락국 왕손들의 회고하며 서술한 내용에서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武力仕至角干)”는 내용을 통해서 말년에는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角干)에 올랐다는 것은 확인된다.

한편 무력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법흥왕 19년(532)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할 때 김무력의 연령이 15세였다면, 진지왕이 폐위될 무렵(579)에는 적어도 62세 정도가 되므로, 진지왕이 폐위될 무렵에는 이미 죽었을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김덕원, 2007)

이와 같이 무력은 신라의 귀족으로서 편입되어 이질적인 세력으로 일정한 한계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군사적인 활동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9, 『三國遺事考證』中, ?書房.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노중국, 1992, 「北漢山 眞興王巡守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 가락국사적개발원.
선석열, 2001, 「신라사 속의 가야인들」『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주보돈, 2004, 「가야인, 신라에서 빛나다」『가야, 잊혀진 이름 빛나는 유산』, 혜안.
김덕원, 2007, 『新羅中古政治史硏究』,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
金庾信
<武>力伊干之子 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 庾信公以眞平王十七年乙卯生 ?精七曜 故背有<七>星文 又多神異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時有白石者 不知其所自來 屬於徒中有年 郞以伐麗<濟>之事 日夜深謀 白石知其謀 告於郞曰 僕請與公密先探於彼 然後圖之何如 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至 公與三娘子喜話之時 娘等以美菓?之 郞受而啖之 心諾相許 乃說其情 娘等告云 公之所言已聞命矣 願公謝白石 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奈林穴禮骨火等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 再拜而出 宿於骨火? 謂白石曰 今歸他國忘其要文 請與爾還家取來 遂與還至家 拷縛白石 而問其情 曰 我本高麗人[古本云百濟 誤矣 楸南乃高麗之士 又逆行陰陽亦是寶藏王事] 我國群臣曰 新羅庾信是我國卜筮之士楸南也[古本作春南 誤矣] 國界有逆流之水[或云雄雌 尤反覆之事] 使其卜之 奏曰 大王夫人逆行陰陽之道 其瑞如此 大王驚怪 而王妃大怒 謂是妖狐之語 告於王 更以他事驗問之 失言則加重刑 乃以一鼠藏於合中 問是何物 其人奏曰 是必鼠 其命有八 乃以謂失言 將加斬罪 其人誓曰 吾死之後 願爲大將 必滅高麗矣 卽斬之 剖鼠腹而視之 其命有七 於是知前言有中 其日夜大王夢 楸南入于新羅舒玄公夫人之懷 以告於群臣 皆曰 楸南誓心而死 是其果然 故遣我至此謀之爾 公乃刑白石 備百味祀三神 皆現身受奠 金氏宗財買夫人死 葬於靑淵上谷 因名財買谷 每年春月 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 于時百卉敷榮 松花滿洞府林 谷口架築爲庵 因名松花房 傳爲願刹 至五十四景明王 追封公爲興<武>大王 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走峰
김유신(金庾信)
무력(武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의 장자(長子)는 유신(庾信)이고, 그 동생은 흠순(欽純)이다. 누이동생은 보희(寶姬),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이고 그 동생은 문희(文姬),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속해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일로 밤낮 깊이 모의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낭에게 고해 이르기를, “제가 청컨대 공과 더불어 몰래 먼저 저쪽을 탐색하고, 그 이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낭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바야흐로 고개 위에서 쉬려고 할 때, 두 여자가 낭을 따라 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 할 때 낭자들이 맛있는 과일을 드리니 낭이 받아먹었고,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고 그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낭자들이 고하기를, “공이 말씀하는 바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공이 백석을 물리고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갔다. 낭자들이 곧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꾀어 유인하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길을 나아가니, 내가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공이 듣고 놀라 쓰러지며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골화관(骨火?)에 유숙할 때 백석에게 일러 말하길, “지금 타국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으니, 청컨대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져와야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돌아와 집에 이르러서 백석을 결박하고 그 사정을 물었다. 이르기를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고본(古本)에는 백제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려의 선비이고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것도 보장왕(寶藏王)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이르길,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점치던 선비 추남이다[고본에서는 춘남(春男)이라고 하였다]. 나라의 경계에 역류하는 물[혹은 웅자(雄雌)가 엎치락뒷치락 하는 일이라고 한다]이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아뢰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했으니, 그 단서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요망한 여우의 말이다’라고 하고는 왕에게 고하여 다시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물어보게 하고 잘못 말하면 중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넣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쥐입니다. 그 목숨은 여덟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잘못 말하였다고 하고는 장차 참죄(斬罪)를 가하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맹세하여 말하길, ‘내가 죽은 후에 원컨대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려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그 목숨이 일곱이었다. 이때 앞서 한 말이 맞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를 군신에게 말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추남이 마음으로 맹세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과연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까닭에 나를 보내어 이러한 모의를 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모두 현신하여 제사를 받았다. 김씨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인하여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매년 봄에 온 집안의 사녀(士女)가 그 계곡의 남쪽 시내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온갖 꽃이 피고 송화(松花)가 마을 숲에 가득하였다. 계곡 입구에 암자를 짓고 인하여 송화방(松花房)이라 이름하였으며, 전하여 원찰로 삼았다. 제54대 경명왕대에 이르러 공을 추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摠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구형왕(仇衡王). 김씨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42년이다.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同氣)인 탈지(脫知) 이질금(爾叱今)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무르게 하고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爾叱)의 딸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서 이르기를,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건대, 구형(仇衡)은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 즉, 처음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계산하면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 까지는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가 된다. 그러므로 다시 30년을 더하게 되면 총 520년이 된다. 여기에 두 설을 다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