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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공

기본정보

구충왕의 아들인 장남인 세종의 아들 혹은 둘째인 무도를 지칭하는 용어

일반정보

졸지공(卒支公)은 상손(上孫)이라고 하여 구충왕의 장남인 세종의 아들로 이해되지만, 무도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파악하기도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에서 보정(保定) 2년(562) 9월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구충왕(仇衝王)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同氣)인 탈지(脫知) 이질금(爾叱今)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무르게 하고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이 누구인지가 문제가 된다. 상손(上孫)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적장손(嫡長孫)을 의미한다. 본 기사에 이어서 구충왕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상손인 졸지공은 곧 세종(世宗)의 아들로 볼 수 있다.

한편 같은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조 앞부분에서 신라 문무왕이 용삭(龍朔) 원년(661)에 조서를 내려 말한 내용 중에 가야국(伽耶國) 구충왕이 항복할 때에 거느리고 온 장남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이 되는 서운(庶云) 잡간(?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곧 나를 낳으신 분이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구충왕(仇衝王)-세종(世宗)-솔우공(率友公)-서운(庶云)-문명황후(文明皇后)의 계보가 나오는데, 솔우공(率友公)은 졸지공(卒支公)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삼국사기』권41 열전1 김유신(金庾信) 상(上)에서는 김유신의 가계도를 언급하면서 구충왕(仇衝王)에 해당하는 김구해(金仇亥)-무력(武力)-서현(舒玄) 혹은 소연(逍衍)-김유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무력(武力)은 『가락국기』에서 구충왕의 아들로 언급되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의 다른 표기로 이해된다.(三品彰英, 1979)

따라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언급된 가계도에서는 무도(茂刀)=무력(武力)의 존재가 빠져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이러한 계보는 가락국이 멸망 이후에 수로왕묘(首露王墓)의 제사 담당자를 기록한 것으로, 구충왕이 죽은 뒤 그 장남인 세종(世宗)이 뒤를 이었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아우인 무도(茂刀)=무력(武力)이 뒤를 이어 졸지공(卒支公) 혹은 솔우공(率友公)으로 불린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村上四男, 1978)

또한 졸지공(卒支公) 혹은 솔우공(率友公)은 가락국의 다른 명칭인 금관국(金官國)을 대표하는 금국공(金國公)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추정한 연구도 있었다.(李基東·李基白, 1982) 그리고 세종과 무득(茂得)이 일찍 죽게 되거나 활동하지 못하게 되자 무도(茂刀)가 금관국공(金官國公)으로 옛 금관국의 왕손을 대표한 것으로 이해한 연구도 있다.(신형식, 1984)

참고문헌

村上四男, 1978,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三品彰英, 1979, 『三國遺事考證』中, ?書房.
이기동·이기백, 1982, 『韓國史講座 -古代篇-』, 일조각.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居登王 父首露王 母許王后 <建>安四年己卯三月十三日卽位 治三十九年 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王妃泉府卿申輔女慕貞 生太子麻品 開皇曆云 姓金氏 蓋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麻品王 一云馬品 金氏 嘉平五年癸酉卽位 治三十九年 永平元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 王妃宗正監趙匡孫女好仇 生太子居叱彌
居叱彌王 一云今勿 金氏 永平元年卽位 治五十六年 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 王妃阿躬阿干孫女阿志 生王子伊品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卽位 治六十二年 義熙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坐知王 一云金叱 義熙三年卽位 娶傭女以女黨爲官 國內擾亂 ?林國以謀欲伐 有一臣名朴元道 諫曰 遺草閱閱 亦含羽 況乃人乎 天亡地陷 人保何基 又卜士筮得解卦 其辭曰 解而<拇> 朋至斯孚 君鑑易卦乎 王謝曰 可 ?傭女 貶於荷山島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治十五年 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 王妃道寧大阿干女福壽 生子吹希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年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知
?知王 一云金?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 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摠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가락국기[문종조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왕후(許王后)이다.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9년이었으며,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게 세조(世祖)가 황금 알에서 난 까닭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한다.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하여 치세는 39년이며,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인 호구(好仇)인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영평(永平) 원년(291)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56년이며,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8일에 죽었다.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인 아지(阿志)인데,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이다. 영화(永和) 2년(346)에 즉위하여, 치세는 62년이며,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월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인 정신(貞信)으로, 왕자인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에 즉위하였다. 용녀(傭女)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그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국(?林國)이 그 틈을 이용하여 치고자 하였다. 이때에 박원도(朴元道)라고 하는 신하가 간언하기를, “시든 풀도 많이 모이면 비를 머금는데, 하물며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면, 사람이 어느 터전인들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말에 ‘엄지손가락을 풀면 벗들이 와서 성의껏 돕는다.’고 하였으니, 왕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사례하며 “옳다.”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을 보내었다. 그리고 정치를 고쳐서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이며,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5월 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인 복수(福壽)인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영초(永初) 2년(4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31년이며,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知)를 낳았다.
질지왕(?知王). 김질왕(金?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451)에 즉위하여 다음해에 세조(世祖)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와 왕후가 처음 만났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고 이름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이며, 영명(永明) 10년 임신(任申, 492)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금상(金相) 사간(沙干)의 딸인 방원(邦媛)인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492)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30년이며,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인 숙(淑)인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42년이다.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同氣)인 탈지(脫知) 이질금(爾叱今)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무르게 하고 왕자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爾叱)의 딸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角干)이며,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서 이르기를,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논평해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건대, 구형(仇衡)은 양(梁)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 즉, 처음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으로부터 계산하면 구형왕 말년 임자(壬子, 532) 까지는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가 된다. 그러므로 다시 30년을 더하게 되면 총 520년이 된다. 여기에 두 설을 다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