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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기본정보

7세기에 활약한 신라의 장군으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더불어 신라의 통일을 이끌었다.
생몰년 : 595-673

일반정보

김유신(金庾信)은 7세기에 활약한 신라의 장군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여동생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비(妃)이자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어머니인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다.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으며 아들 다섯과 딸 넷, 그리고 서자(庶子) 하나를 두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부터 무장(武將)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선덕왕(善德王)대 백제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후 신라의 통일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사망 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전문정보

김유신(金庾信)은 신라의 진골(眞骨) 귀족 신분의 장군으로 중고기(中古期) 말∼중대(中代) 초에 활약한 인물이다. 금관가야(金官加耶)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을 죽인 김무력(金武力)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대 장군으로 활약한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으로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형제로 아우 하나와 누이 둘이 있었는데, 아우는 신라통일전쟁에서 활약한 김흠순(金欽純)이고 누이 중 둘째는 김춘추(金春秋)와 혼인하여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을 낳은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다. 부인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셋째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이었으며 자식으로는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아들 다섯과 딸 넷, 그리고 서자(庶子) 군승(軍勝)을 두었다.

김유신은 진평왕 17년(595)에 아버지 김서현이 태수(太守)로 재직하던 만노군(萬弩郡, 현 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여 왕경(王京)에서 성장하였다.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으며 17세부터는 중악(中嶽)의 석굴과 열박산(咽薄山) 골짜기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고구려와의 낭비성(娘臂城) 전투에서 부장군(副將軍)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선덕왕(善德王)대에는 백제와의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진덕왕(眞德王) 원년에는 여주(女主)의 통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의 무리들을 명활성(明活城)에서 진압하였으며, 이후 김춘추(金春秋)의 즉위를 지지하여 그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 오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유신은 태종무열왕 7년(660)에 이르러 상대등(上大等)의 지위에 올랐으며 같은 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백제 공격에서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무왕 원년(661)에는 평양 근처에 도착한 소정방(蘇定方) 군대의 요청에 의하여 군량을 고구려의 강역을 거쳐 당군(唐軍)에게 수송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문무왕 8년(668)에는 백제와 고구려 정벌의 공을 인정받아 왕으로부터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와 식읍 500호를 하사받았다.

문무왕 13년(673)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부음(訃音)을 들은 왕은 크게 슬퍼하며 비단 1,000필과 조(租) 2,000석을 내려 장례(葬禮)에 쓰게 하였고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또한 민호(民戶)를 배치하여 그의 묘를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 하(下)에는 김유신이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으로부터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흥덕왕대에 그의 후손들이 신라의 정계에 다시 대두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김유신의 사후(死後) 신라의 중대 왕실은 전제주의적 경향 속에서 김유신의 후손들을 배척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유신의 후손들은 중대 왕실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때문에 혜공왕 6년(770)에 일어난 김융(金融)의 난(亂)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난의 실패로 인해 크게 냉대 받았던 김유신과 그의 후손의 지위는 전제주의가 붕괴한 하대(下代)에 이르러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를 반영한 것이 김유신의 흥무대왕 추봉이라는 것이다.(이기백, 1974) 한편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金庾信)조에는 김유신의 추봉을 신라 제54대 경명왕 때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 사적 제21호로 지정된 김유신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 하(下)에서는 김유신묘의 위치에 대해서 “금산원에 장사지냈다.(出葬于金山原)”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金庾信)조에서는 “능은 서산 모지사(毛只寺)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陵在西山毛只寺之北 東向走峰)”라고 하였다. 따라서 전 김유신묘(傳 金庾信墓)가 위치한 송화산(松花山)을 일반적으로 신라시대의 금산원(金山原)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김유신묘로 전해지는 무덤의 조각 수법과 양식은 김유신이 사망한 7세기말의 다른 왕릉들과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세련되고 발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무덤의 주인이 김유신이 아닌 다른 신라왕일 것이라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이에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 중에 묘비(墓碑)가 있으면서 무덤의 구조가 7세기 후반의 양식을 띠고 있는 전 김인문묘(傳 金仁問墓)를 김유신의 묘로 추정하기도 한다.(이근직, 2006)

반면에 이 무덤을 김유신묘로 보는 입장에서는 무덤의 양식이 김유신 사망 시기와 맞지 않는 현상을 김유신의 사망 이후 어느 시기에 개수(改修)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는 『삼국사기』권43 열전3 김유신 하의 기록을 근거로 흥덕왕대로 보거나,(齋藤忠, 1986), 혜공왕이 김유신의 묘에 공신(工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냈다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죽엽군조의 기사에 주목하여 혜공왕 때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강우방, 1990)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齋藤忠, 1986, 「統一新羅の陵墓の考察 -十二支像をもつ王陵を中心として」 『朝鮮學報』119·120合.
강우방, 1990, 『圓融과 調和, 韓國古代彫刻史의 原理』, 열화당.
이근직, 2006, 『新羅 王陵의 起源과 變遷』,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九 大宗武烈王 [名春秋 金氏 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 母天明夫人 諡<文貞太>后 眞平王之女也 妃訓帝夫人 諡文明王后 庾<信>之妹 小名文熙也 甲寅立 治七年]
제29 태종무열왕 [이름은 춘추이고 김씨이다.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 탁문흥갈문왕의 아들이다. 용춘은 용수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시호는 문정태후이고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으로 시호는 문명왕후이며 김유신의 여동생으로 어릴 적 이름은 문희이다. 갑인에 즉위하여 7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