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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성

기본정보

신라 중대의 귀족
생몰년: 652-720

일반정보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대의 인물로 중아찬(重阿飡) 관직에 올랐던 인물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감산사를 창건하고,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을 조성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남월산(南月山)조를 보면 감산사가 경주 동남쪽 이십리쯤 되는 곳에 있음을 밝히면서 이 절에 안치되어 있는 두 불상에 새겨진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감산사에는 미륵존상과 미타불상이 있었는데 각각 그 뒷면에 기록이 남아 있었다. 금당의 주존인 미륵존상의 화광(火光) 후면 기록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 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를 세우고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사를 친족인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17관등 가운데 12위),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또 서족(庶族) 급막(及漠) 일길찬(一吉飡), 일당(一幢) 살찬(薩飡, 17관등 가운데 8위),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買) 등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머니 초리부인(肖里夫人)이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음을 기록하였다. 한편 미타불의 후면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이에 따르면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며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베풀어 가람을 세우고, 거듭 돌미타불 한 구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지전이 죽은후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위 기록에서 인용된 미륵존상 화광후기와 미타불 화광후기의 원본으로 보이는 유물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국보 제81호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의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造像記)와 국보 제 82호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象)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조상기(造像記)가 그것이다. 이들 조상기의 내용은 구체적인 내용 좀더 자세할 뿐 『삼국유사』 남월산조에 소개된 내용과 거의 같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감산사는 신라 제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때 중아찬인 김지성(혹은 김지전)이 성덕왕 18년(719)에 부모와 가족을 위해 창건한 절이며, 이곳에 미륵존상과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2005, 구문회)

그런데 감산사의 창건자에 대해서 『삼국유사』 남월산조에서 인용한 미륵존상 화광후면에서는 김지성(金志誠)이라 하였고, 미타불 화광후기에서는 김지전(金志全)이라 하여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창시자에 대한 엇갈림은 현재 남아있는 두 개의 감산사 석조불상들의 조상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창건자의 이름은 다르게 표시되어 있지만, 두 사람의 관등은 똑같이 중아찬이며 구체적인 내용에서 발원자의 아버지, 전처, 후처, 누이의 이름이 모두 같기 때문에 김지성과 김지전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이름이 달리 새겨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신라 시대에는 한자의 음을 빌어 사람들의 이름을 표기한 사례가 많아 동일한 사람이라도 다른 글자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葛城末治, 1935) 이와는 달리 감산사의 불상에 조상기를 새기는 과정에서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지성이 김지전으로 이름을 개명했다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이병도, 1956) 여기서 더 나아가 왕명(王命)에 의해 김지성이 김지전으로 개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먼저 새겨진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상기에는 김지성이란 이름이 그대로 들어갔지만, 이 과정을 지켜보던 왕이 기특히 여기고 김지성에게 김지전이란 이름을 하사하자 그 다음으로 조성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의 조상기에는 김지성 대신 김지전이란 이름이 들어갔다고 본 것이다.(최완수, 2000) 한편 김지성과 김지전이 동일인물이 아니라 형제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유사』의 조선 중종 임신본을 비롯한 목판본에 남월산조를 보면, 뒤쪽의 미타불 화광후기의 김지전은 그대로 명기되어 있지만, 앞쪽의 미륵불 화광후기 인용부분에서는 중아찬 김지성이라 되어 있지 않고, 중아찬 전망성(全忘誠)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 부분은 김지성(金志誠)의 오각으로 보는데 이를 “중아찬 전(全, 김지전)이 성(誠, 김지성)을 잃고서”로 번역하여 두 사람이 형제라고 이해한 것이다.(윤철중, 2002)

김지성의 일생은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조상기(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象造像記)」와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조상기(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象造像記)」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김지성은 719년 2월 15일 자신의 장전인 감산을 희사하여 감산사를 만들고 여기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석미륵불한 구와 석미타불 한 구를 조성하였다. 이 날짜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석가모니의 열반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조상기」와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조상기」의 인명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가계도를 알 수 있다. 그는 동모(同母) 형제인 3남 1녀중 장남이었고, 서족(庶族)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복형제로서 역시 3남 1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처(喪妻)하여 두 번 혼인했음을 파악 할 수 있다.(구문회,2005)

[김지성의 가계도]



이 외에도 김지성의 이름은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0 외신부(外臣部)15 조공(朝貢) 3에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신룡(神龍) 원년(元年, 705) 3월에 신라왕 김지성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神龍元年三月 新羅王金志誠遣使來朝)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즉위조에서 성덕왕의 이름과 관련된 세주에서 “당서에는 김지성이라고 하였다.(唐書言金志誠)”는 기록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덕왕의 휘(諱)가 지성이라는 언급은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위 『책부원귀』의 기사에 등장하는 김지성을 신라왕이 아닌 당에 파견된 사신의 이름으로 보아 “신라왕견김지성내조(新羅王遣金志誠來朝)”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葛城末治, 1935)

김지성의 관등?관직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가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김지성이 사망할 당시 중아찬이었던 것으로 보아, 중아찬이 그가 오른 최고 관등이었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8 잡지7 직관상의 신라관호(新羅官號)에 의하면, 중아찬은 관등 제 6위인 아찬(阿飡) 위에 마련된 중위제도(重位制度)이다. 본래 5위 대아찬부터는 진골귀족 이상만 받을 수 있었으며 그 아래 등급인 6위 아찬이 6두품의 한계였다. 따라서 진골이하 6두품들은 6위인 아찬까지 오른 후에 다시 관위가 승급할 경우, 5위인 대아찬이 아닌 중위(重位)인 중아찬으로 진급하였던 것이다. 결국 중아찬이었다는 것은 곧 김지성의 신분이 6두품이었음을 의미한다.(변태섭, 1956) 김지성의 사망한 부친은 마지막 관등이 일길찬이었고, 동생인 간성(懇誠)의 관등이 소사(小舍), 서족(庶族)인 급막(及漠)?일당(一幢)?총민(聰敏) 등의 관등이 각각 일길찬(一吉飡)?살찬(薩飡)?대사(大舍)인 것으로 볼 때, 김지성의 가문은 전형적인 6두품 가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조상기」에서 김지성은 상사봉어(尙衣奉御)의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신라의 관직으로서 궁중에서 음식 및 의복을 관장하는 직책인 내성 예하 상사국의 장관격인 봉어로 본 견해도 있지만,(이기동, 1984; 김영미, 1988) 신라의 관직이 아니라 성덕왕 4년 입당시 당으로부터 받은 관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상사봉어는 『당서(唐書)』 권47 백관2 전중성조에 언급된 관직인데, 상사국(尙舍局)에 소속된 관원으로서 전정제사(殿庭祭祀)의 장설(張設) 및 탕목등촉(湯沐燈燭)의 쇄소(灑掃) 등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김지성이 성덕왕 4년 당나라에 간 사실을 결부지으면, 상사봉어는 김지성이 입당했을 때 당 황제로부터 수여받은 관직이었다고 볼 수 있다.(권덕영, 1997)

김지성은 또한 집사시랑에 임명되어 은퇴를 앞둔 시점까지 역임하였다. 이 집사시랑에 대해 『삼국사기』 권38 직관지 상 집사성조에 의하면, 집사시랑은 집사부의 차관직이다. 집사시랑이 학식 및 소양을 바탕으로 정책 수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직이었고, 견당사이기도 했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김지성은 비록 진골귀족은 아니었지만 6두품 귀족으로서 성덕왕의 왕권강화 정책을 충분히 이행한 조력자였다고 볼 수 있다.(이기동, 1984) 또한 조상기 기록에서 그가 은퇴 후 감산사 가람 및 불상 조성에 따른 연유를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던 것과 국왕의 명에 의해 재등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성덕왕과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구문회, 2005)

남월산조에 의하면 김지성은 자신의 부모 형제 부인 이외에 국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720년경)의 복을 빌고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김지성과 김개원은 특별한 관계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김개원은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 재위 654-661)의 여섯째 아들로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4년(695)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으며, 효소왕이 후사가 없이 돌아가자 13세였던 그 아우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은 이로, 태종무열왕계의 수장이었다. 김개원은 성덕왕의 증조부이자 상대등으로 거의 섭정 지위에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국인이 추대했다고 하는 성덕왕의 즉위에 왕실 최고 종친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김지성은 성덕왕의 왕권강화 작업의 일환인 대당외교를 담당했던 인물로, 김개원과 김지성은 성덕왕의 왕권강화라는 공통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감산사 불보살상의 명문에 국주대왕과 이찬 개원을 언급한 것은 이런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김영미, 1988)

김지성의 사망기록은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조상기?에만 언급되어 있는데, 감산사 조성 다음 해인 성덕왕 19년(720)년 경신 4월 22일에 돌아가게 됐다는 기록이 있다. 경신년에 돌아갔다는 점으로 보아, 김지성은 진덕왕 6년(652)에 태어나 성덕왕 19년(720)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末松保和, 1932)

김지성의 사망이 기록된 아미타불입상 조상기의 찬술자에 대한 논란도 있다. 아미타불입상에 왕명에 의해 내마 총(奈麻 聰)이 명문을 찬술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여, 당시 제자백가에 정통한 사람은 설총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내마 총을 설총으로 비정한 의견도 나왔다.(葛城末治, 1935) 이외에도 미륵보살입상의 명문은 발원자인 김지성이 직접 작성한 것에 비하여 아미타불입상의 명문은 김지전으로 표현된 점, 미륵보살입상의 명문에는 생존하였던 인물들이 아미타불입상의 명문에는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점 등으로 보아 다른 이가 찬술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김영미, 1988)

참고문헌

末松保和, 1932, 「甘山寺彌勒尊像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朝鮮』211 ; 1954, 『新羅史の諸問題 』, 東洋文庫
葛城末治, 1935, 「경주 감산사미타여래조상기」『朝鮮金石攷』.
中吉功, 1956, 「新羅甘山寺石造彌勒·阿彌陀像について」『朝鮮學報』9.
변태섭, 1956, 「신라 관등의 성격」『歷史敎育』1.
이병도, 1956, 『譯註 三國遺事』, 동국문화사.
이기동, 1984,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김영미, 1988,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감산사 彌勒像·阿彌陀像銘文과 관련하여」『梨大史苑』22·23合.
권덕영, 1997, 『古代韓中外交史-遣唐使硏究』, 일조각.
소현숙, 1999, 「감산사 미륵보살입상과 아미타여래입상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최완수, 2000, 「한국 최고의 고혹미 감산사 석조미륵불보살」『신동아』493.
윤철중, 2002, ?南月山 甘山寺 설화의 東海攸友邊에 대하여」『자하어논문집』17, 상명어문학회.
문명대, 2003, 「신라 法相宗의 성립 문제와 감산사 미륵?아미타불상」『원음과 고전미』, 예경.
구문회, 2005, 「감산사 미륵보살상?아미타불상 조상기를 통해 본 7-8세기 신라 귀족의 삶-김지성의 일생과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생활문물연구』17, 국립민속박물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남월산)
南月山[亦名甘山寺]
寺在京城東南二十許里 金堂主彌勒尊像火光後記云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飡><金><志>誠 爲亡考仁章一吉干 亡妃觀肖里夫人 敬造甘山寺一所石彌勒一軀 兼及愷元伊飡 <弟>懇誠小舍 玄度師 ?古巴里 前妻古老里 後妻阿好里 兼庶族及漠一吉<飡> 一幢薩<飡> 聰敏<大>舍 妹首?買等 同營玆善 亡?肖里夫人 古人成之 東海攸友邊散也[古人成之以下 文未詳其意 但存古文而已 下同] 彌?佛火光後記云 重阿<飡>金志全 曾以尙衣奉御 又執事侍郞 年六十七致仕閑居 奉爲國主大王 伊<飡>愷元 亡考仁章一吉干 亡妃亡弟小舍梁誠 沙門玄度 亡妻古路里 亡妹古巴里 又爲妻阿好里等 捨甘山莊田 建伽藍 仍造石彌?一軀 奉爲亡考仁章一吉干 古人成之 東海攸反邊散也[按帝系 金愷元乃太宗春秋之<第>六子愷元角干 乃文熙之所生也 <金>志全乃仁章一吉干之子 東海攸反恐法敏葬東海也]

남월산[또는 감산사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경주) 동남쪽 이십리쯤 되는 곳에 있다. 금당(金堂)의 주존인 미륵존상(彌勒尊像)의 화광(火光) 후면 기록에 이르길, “개원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 한 채와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 아울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17관등 가운데 12위),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또 서족(庶族) 급막(及漠) 일길찬(一吉飡), 일당(一幢) 살찬(薩飡, 17관등 가운데 8위),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買) 등을 위해 같이 이 선한 일을 경영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초리부인(肖里夫人)이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고인성지 이하는 글 뜻을 잘 알 수 없으나, 다만 고문을 남겨둘 뿐이다. 아래도 같다.] 미타불 화광후면 기록에 이르길,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며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베풀어 가람을 세우고, 거듭 돌미타불 한 구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했다.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제계(帝系)를 살펴보면 김개원은 태종춘주의 여섯째 아들 개원(愷元) 각간(角干)이다. 이는 문희의 소생이다. 김지전은 곧 인장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반(東海攸反)은 아마도 법민(法敏, 문무왕)을 장사지낸 동해인 듯하다.]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남월산)
南月山[亦名甘山寺]
寺在京城東南二十許里 金堂主彌勒尊像火光後記云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飡><金><志>誠 爲亡考仁章一吉干 亡妃觀肖里夫人 敬造甘山寺一所石彌勒一軀 兼及愷元伊飡 <弟>懇誠小舍 玄度師 ?古巴里 前妻古老里 後妻阿好里 兼庶族及漠一吉<飡> 一幢薩<飡> 聰敏<大>舍 妹首?買等 同營玆善 亡?肖里夫人 古人成之 東海攸友邊散也[古人成之以下 文未詳其意 但存古文而已 下同] 彌?佛火光後記云 重阿<飡>金志全 曾以尙衣奉御 又執事侍郞 年六十七致仕閑居 奉爲國主大王 伊<飡>愷元 亡考仁章一吉干 亡妃亡弟小舍梁誠 沙門玄度 亡妻古路里 亡妹古巴里 又爲妻阿好里等 捨甘山莊田 建伽藍 仍造石彌?一軀 奉爲亡考仁章一吉干 古人成之 東海攸反邊散也[按帝系 金愷元乃太宗春秋之<第>六子愷元角干 乃文熙之所生也 <金>志全乃仁章一吉干之子 東海攸反恐法敏葬東海也]

남월산[또는 감산사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경주) 동남쪽 이십리쯤 되는 곳에 있다. 금당(金堂)의 주존인 미륵존상(彌勒尊像)의 화광(火光) 후면 기록에 이르길, “개원 7년 기미(719) 2월 15일 중아찬(重阿飡,신라 17관등 가운데 6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17관등 가운데 7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 감산사(甘山寺) 한 채와 돌미륵 한 구를 정성들여 조성하였다. 아울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 17관등 가운데 12위), 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또 서족(庶族) 급막(及漠) 일길찬(一吉飡), 일당(一幢) 살찬(薩飡, 17관등 가운데 8위),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買) 등을 위해 같이 이 선한 일을 경영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초리부인(肖里夫人)이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고인성지 이하는 글 뜻을 잘 알 수 없으나, 다만 고문을 남겨둘 뿐이다. 아래도 같다.] 미타불 화광후면 기록에 이르길,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志全)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와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며 국주대왕(國主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아내 고로리(古路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를 위하고,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감산의 장전(莊田)을 베풀어 가람을 세우고, 거듭 돌미타불 한 구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했다.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유우(攸友)가에 흩었다.” [제계(帝系)를 살펴보면 김개원은 태종춘주의 여섯째 아들 개원(愷元) 각간(角干)이다. 이는 문희의 소생이다. 김지전은 곧 인장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반(東海攸反)은 아마도 법민(法敏, 문무왕)을 장사지낸 동해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