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최제안

기본정보

고려의 귀족?문신
생몰년 : ?-1046

일반정보

고려의 귀족?문신으로 최승로의 손자이다. 1040년 신라말에 파괴된 천룡사를 중수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천룡사조에는 최제안이 경주 중생사(衆生寺) 관음의 젖을 먹고 자란 최승로(崔承魯)의 손자이며 최숙(崔肅)의 아들임을 밝히고 있다. 1040년에 최제안은 신라말에 파괴된 천룡사를 중수하여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두었는데, 이 때 신서(信書)를 지었다. 신서에서는 최제안이 임금, 백성, 나라가 편안하기를 기원하여 절을 중수했음을 밝히고 절의 주지 선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공산(公山, 팔공산) 지장사와 비슬산 도선사 등 다른 절의 주지 선출 방식을 참고하여 천룡사에서도 절의 무리 중에서 제주와 덕이 높은 자를 택해 주지를 삼게 했다. 그리고 기록을 천룡사의 강사(剛司, 법회의식을 맡은 승직)에게 맡기며 각자 내용을 명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 따르면 최제안은 현종 11년(1020) 천령절(千齡節)을 하례하기 위해 거란에 다녀와서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가 되고, 현종 21년(1030)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덕종 3년(1034년) 호부(戶部)와 이부(吏部)의 상서(尙書)를 지냈다. 정종 2년(1036)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정종 9년(1043)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가 되었으며, 뒤에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지냈다. 그리고 『고려사』 권7 세가7 문종1 즉위년(1046)조에는 11월 무자일에 시중 최제안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권93 열전6 최승로(崔承老)전에는 최제안의 전기가 덧붙여져 있다. 그에 따르면 최제안은 최승로의 아들인 최숙의 아들로서 현종과 덕종, 정종, 문종의 네 왕을 섬겨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최제안의 병이 위독하자 문종이 직접 병문안을 하였으며 그가 죽자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순공(順恭)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선종 3년(1086) 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태조의 『신서훈요(信書訓要, 훈요십조)』가 병란(거란의 침입)에 분실되었는데 최제안이 이것을 최항(崔沆, ?-1024)의 집에서 얻어 보관하였다가 왕에게 올리니 이때부터 그 글이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최제안의 관력에 대해 『고려사』와 같은 내용을 싣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 권4 정종(靖宗) 용혜대왕(容惠大王) 병술 12년(1046)조에는 11월 시중 최제안이 죽었다고 하였으며 『신서훈요』에 관한 같은 내용이 있다.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수한 배경에 관해 고찰한 연구가 있다. 경주의 사찰들은 신라왕실과 진골귀족들과 연결되어 융성하였으나, 신라가 멸망함에 따라 쇠락하게 되었다. 천룡사도 그 중 하나였으나 최제안 등의 재경세력과 연결되어 있어 그나마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 태조는 본래 훈요십조에서 사원의 남설(濫設)을 경계하였고 최제안의 조부인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비판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수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했다고 하였다. 이에 천룡사는 신라이래 절이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성종조 이후 누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명분을 내세워 절을 중수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제안의 신서에는 지장사와 도선사가 사중(社中)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주지를 뽑았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중망의 주도자는 바로 전답 기진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룡사의 주지 선임권이 전곡?전답의 기진자의 수중에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최제안 신서의 내용은 그가 천룡사의 운영과 주지 임명 등을 관장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제안은 신서를 통해 천룡사를 원당(願堂)화함으로써 경주지역에 자신의 재지적 기반을 부식시키고 이곳을 일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으며, 불교계와의 부단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상적으로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았다.(김호동, 1986; 김재원, 2001) 그리고 최제안의 신서에 있는 지장사나 도선사 등 지방사원이 특정한 단월에 의해 많은 시납을 받고, 주지선임이 국가에서 차정되지 않도록 지방관에 의해 공증되고 있었음을 미루어 고려시대에 지방사원들이 광범위하게 유력한 관인층에 의해 점차 장악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절의 창건을 경계하던 당시 상황에서 절을 중수한 것은 그것이 고려시대 관인(官人)들이 원당을 마련하는데 용이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한기문, 1990)

참고문헌

김호동, 1986, 「崔殷含-承老 家門에 관한 硏究 -新羅六頭品家門의 高麗門閥貴族化過程의 一例-」『嶠南史學』2.
한기문, 1990, 「高麗時代 官人의 願堂(上)」『大丘史學』39.
김재원, 2001, 「羅麗時代 天龍寺?衆生寺와 崔承老 家門」『韓國中世社會의 諸問題(金潤坤敎授停年紀念論叢)』.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천룡사)
天龍寺
東都南山之南 有一峰屹起 俗云高位山 山之陽有寺 俚云高寺 或云天龍寺 討論三韓集云 ?林土內 有客水二條 逆水一條 其逆水客水二源 不鎭天災 則致天龍覆沒之災 俗傳云 逆水者 州之南馬等烏村南流川是 又是水之源 致<天>龍寺 中國來使 樂鵬龜來見云 破此寺 則國亡無日矣 又相傳云 昔有檀越有二女 曰天女龍女 二親爲二女創寺因名之 境地異常助道之場 羅季殘破久矣 衆生寺大聖所乳崔殷?之子承魯 魯生肅 肅生侍中齊顔 顔乃重修起廢 仍置釋迦萬日道場 受朝旨 兼有信書願文 留于寺 旣卒 爲護伽藍神 頗著靈異 其信書略曰 檀越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柱國崔齊顔狀 東京高位山天龍寺殘破有年 弟子特爲聖壽天長民國安泰之願 殿堂廊閣房舍廚庫 已來興構畢 具石造泥塑佛聖數軀 開置釋迦萬日道場 旣爲國修營 官家差定主人亦可 然當遞換交代之時 道場僧衆不得安心 側觀入田 稠足寺院 如公山地藏寺 入田二百結 毗瑟山道仙寺 入田二十結 西京之四面山寺 各田二十結例 皆勿論有職無職 須擇戒備才高者 社中衆望 連次住持焚修 以爲恒? 弟子聞風而悅 我此天龍寺 亦於社衆之中 擇選才德雙高大德 兼爲棟梁 差主人鎭長焚修 具錄文字 付在剛司 自當時主人爲始 受留守官文通 示道場諸衆 各宜知悉 重熙九年六月日 具銜如前署 按重熙乃契丹興宗年號 本朝靖宗七年庚辰歲也

천룡사
동도(東都, 경주)의 남산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상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고 한다. 그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고사(高寺) 혹은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서 말하길, “계림의 땅에는 객수(客水) 두 줄기와 역수(逆水) 한 줄기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하면 곧 천룡사가 뒤집혀 없어지는 재난에 이른다.”고 하였다. 속전(俗傳)에 이르길, “역수는 주(州)의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개울이 이것이다.”라 하고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 이른다. 중국에서 온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곧 며칠 안에 망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또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 단월(檀越, 시주)에게 두 딸이 있어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그로 인하여 절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경내가 보통과 달라 불도를 돕는 도량이었는데 신라말에 쇠잔하여 파괴된 지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의 대성(大聖, 관음)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崔殷?)의 아들 승로(承魯)가 숙(肅)을 낳고, 숙(肅)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제안(齊顔)이 중수하여 폐사를 일으켰다.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두고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겸하여 신서(信書)와 원문(願文)이 있어 절에 남겨 두었다. 그가 죽은 후 절을 지키는 신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함을 보였다. 그 신서(信書)에 대략 말하기를, “단월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주국(柱國) 최제안(崔齊顔)이 쓴다. 동경 고위산의 천룡사가 쇠잔하고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제자(弟子, 최제안)가 특별히 임금께서 만수무강하며 백성과 나라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하여 전당과 회랑, 방과 주방, 창고를 일으켜 세운 후에, 돌로 만든 부처와 흙으로 빚은 부처 몇 구를 갖추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이미 나라를 위하여 닦고 조영하였으니 관가에서 주지에게 뽑아 맡김이 또한 옳으나, (주지가) 번갈아 바뀌어 교대할 때를 당해서는 도량의 중들이 모두 안심하지 못하였다. 토지를 납입하여 사원을 고르게 충족시킨 것을 보면, 공산(公山, 팔공산) 지장사(地藏寺)의 납입한 토지 200결과 비슬산(毘瑟山) 도선사(道仙寺)의 납입한 토지 20결, 서경(西京) 사방에 있는 산사(山寺)의 각각 20결의 예와 같이, 모든 유직(有職)과 무직(無職)은 물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자를 택해서, 절에 있는 무리의 뜻에 의하여 차례로 주지를 삼아 분향하고 수도[焚修]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제자(최제안)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의 이 천룡사도 또한 절의 많은 무리 중에서 재주와 덕이 모두 높은, 대덕(大德)을 뽑아 동량(棟梁)을 겸하게 하고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하고 수도하게 하고자 한다. 문자를 갖추어 기록해서 강사(剛司, 담당승직)에게 맡긴다. 당시의 주지로부터 시작해서 유수관(留守官, 동경의 지방장관)의 문서를 받아 도량의 모든 대중에게 보일 것이며, 각자 마땅히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중희(重熙) 9년(1040) 6월 일. 관함(官銜, 관직)을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하였다.” 살피건대 중희는 거란(契丹) 흥종(興宗)의 연호이니 본조(本朝, 고려) 정종(靖宗) 7년 경진년(庚辰年, 104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