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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문

기본정보

고구려의 정치가
생몰년 : ?-665

일반정보

고구려의 정치가로 642년 왕과 대신들을 죽이는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며, 일족을 중심으로 독재정치를 펼쳤다. 보장왕에게 권고하여 당에서 도교를 들여오기를 청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흥법3 보장봉로보덕이암조에서는 고구려 보장왕이 즉위한 후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유교와 불교가 성하고 있으나 도교는 그렇지 않음을 들어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할 것을 왕에게 권고하는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2년(643) 3월조에는 『삼국유사』와 유사하게 개소문이 당에서 도교를 구해올 것을 왕에게 청하는 내용이 있다.

개소문의 성씨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상(上) 6년(666)조와 10년(670)조에는 고구려의 대신으로 연정토(淵淨土)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전에 나오는 “소문제정토(蘇文弟淨土)”와 동일인으로 생각되므로 개소문도 성씨가 연(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당서(舊唐書)』 권199 상(上) 열전149 상(上) 동이 고려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제145 동이 고려전에서는 개소문을 천(泉)씨로 소개하고 있는데,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피휘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49 열전9 개소문(蓋蘇文)에서도 그를 천씨로 소개하였으며, 개금(蓋金)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4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642) 2월 정미조에는 개소문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하였다.

개소문의 성씨에 대해서 그 집안의 시조가 물의 정령(精靈)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어로는 “울”, “얼”, “이리” 등의 말로 그 족명을 대표하며, 이것을 한역하면 연씨(淵氏)가 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고조의 이름을 피하여 연씨를 천씨로 고쳤는데, 『삼국사기』는 편찬시 중국측 기록에 주로 의거하게 되어 천씨만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가 확인되기 때문에 실제 고구려에서는 연씨가 쓰였고, 또 개소문의 이름은 “가솜”, “가쇰”, “가쇠미”, “가스미” 등의 어음을 가져서 개소문(蓋蘇文)으로 표음하였는데, 이것을 재차 한화(漢化)하기 위하여 개금(蓋金)으로 하였고 다시 개금(盖金)이라는 속자(俗字)가 생겼다고 하였다.(이홍직, 1971)

개소문의 가계는 그의 아들인 남생(男生)과 손자인 헌성(獻誠)의 묘지명에 나타나 있다.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서는 남생의 증조부가 자유(子遊)이며 조부는 태조(太祚)로서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는 것, 아버지 개금(蓋金-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개소문의 아버지가 태조, 조부가 자유임을 알 수 있다. 「천헌성묘지명(泉獻誠墓誌銘)」에도 태조와 개소문에 대해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25년조에는 개소문을 서부대인(西部大人)이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권49 열전9 개소문(蓋蘇文)에서는 개소문의 아버지가 동부대인(東部大人-혹은 서부대인) 대대로(大對盧)였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 『삼국사기』 권49 열전9 개소문에서는 개소문의 아들로 남생, 남건(男建), 남산(男産)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25년(642) 10월조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을 죽인 내용이 있으며, 같은 책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상(上) 즉위년조에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 권49 열전9 개소문에서도 개소문이 열병식을 빌미로 대신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죽인 다음, 궁중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구당서』 권3 본기3 태종 하(下) 정관(貞觀) 16년(642)조에도 개소문이 왕인 무(武-영류왕)를 죽이고 무의 조카인 장(藏-보장왕)을 왕으로 삼았음을 언급했으며, 『구당서』 권199 상(上) 열전149 상(上) 동이 고려전에도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신당서』 권220 열전 제145 동이 고려전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있다. 그리고 『자치통감』 권196 당기(唐紀)12 태종 정관 16년(642) 11월조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일본서기』 권24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642) 2월 정미조에는 일본에 온 고구려사신의 말을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전 해(641)에 자국의 대신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연개소문)가 왕 등 180여명을 죽이고 왕의 아우의 아들을 왕으로 삼은 다음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정변은 642년에 일어났으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은 연대에서 착오를 보이고 있다.

연개소문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먼저 연개소문의 집권시 고구려가 종래의 귀족연립적 정권의 성격을 가진 채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왕과 실권을 장악한 막리지가 집정으로 존재하는, 이원집정체제(二元執政體制)였음에 유의하여 이것이 대내외 정책 수행에 한계로 작용했다고 보기도 한다. 대내적으로는 그가 국왕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끝까지 왕위에 오르지 않았고 이는 종래 5부체제의 일단을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에, 시책 수행에 있어서 귀족연립적인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전통적으로 왕제(王制)를 운영하고 있던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천하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당이 비정상적인 이원집권체제를 만든 연개소문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구려는 당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개소문 정권은 당과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펼치지 못하고, 시간을 끌며 당과 대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처럼 연개소문 정권은 당의 등장에 따른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대변동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중심귀족세력으로서의 특권을 확보하는 데 1차적인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발전적인 형태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체제의 수명을 연장해보려는 지배층 내부의 시도의 일환일 뿐이라고 파악하였다.(김기흥, 1992)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왕권과 대립하던 태양왕계(太陽王系) 세력과 연계하여 정변을 일으켰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정변 직후 연개소문이 태양왕의 아들인 보장왕을 옹립한 데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 귀족연립체제를 희구하던 귀족세력은 연개소문 가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그 아버지의 직위를 잇는 것을 막으려 하고 나아가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그리고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영류왕은 일찍이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불만집단으로 남아 있으면서 왕위찬탈을 꿈꾸던 태양왕계 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귀족세력과의 연결을 꾀하게 되었고 양자는 태양왕계 세력과 연계된 연개소문을 제거하는 데 합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 정권은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연개소문과 왕위를 노리고 있던 태양왕계 세력의 연합으로 탄생된 것이었으므로, 그 자체가 불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연개소문 사후 구심점을 잃은 고구려의 국내세력이 급속히 분열하여 결국 국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았다.(전미희, 1994)

그리고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태막리지(太莫離支) 등 새로운 관위를 마련하여 다수의 귀족들을 제압하고 지방세력의 직접통제를 시도하면서 막리지체제가 운영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막리지체제에서의 집권력은 관직의 분화를 통해 귀족세력의 영향력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이는 안시성주(安市城主)의 예처럼 연개소문이 성(城)을 중심으로 한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연개소문이 구축한 막리지체제는 그 때까지 존재하던 지방의 독자성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방세력을 집권력으로 편제하는 데에 실패한 연개소문은 자신의 사적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방법만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정책의 방향은 연개소문이란 인물이 사라짐으로써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지방 분산화의 경향으로 나아갔다고 하였다.(전경옥, 1996)

그 외에 『신당서』 고려전의 기록을 토대로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지위인 동부대인(東部大人) 막리지를 승습(承襲)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막리지는 관직인 아닌 관등으로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막리지가 있을 수 있으며, 한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은 여러 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이 승습하기 위해 중인(衆人)에게 호소한 대상은 막리지라는 관등이 아닌, 동부대인이라는 직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그의 세력기반인 동부 출신의 인사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표면에 내세워 대대로로 삼는 대신, 그 자신은 막리지로서 대모달(大模達)이 되었다고 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에 동원한 주된 병력원은 부병(部兵)이었는데, 그는 정변 후에 군권을 쥘 수 있는 핵심직에 취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자리는 당시의 대장군이라 할 수 있는 대모달이었다. 즉 연개소문은 노성(老成)한 귀족들이 많은 상황에서 대대로에 취임하여 귀족회의 등을 지배하려 할 때 따를 수 있는 어려움을 피하고, 군권을 바탕으로 실권을 행사하기 위해 대모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당(唐)의 잇따른 침입 등 대외적 위기에 따른 정통성 확립의 필요가 생기자, 그것이 그의 대대로 취임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연개소문 사후 바로 대대로에 취임하지 못하고 태막리지(太莫離支)가 되는 등, 연씨가는 마지막까지 권위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확립하지 못했다고 하였다.(노태돈, 1999)

연개소문의 정변을 대외정책을 둘러싼 고구려 내부의 대립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양왕대에 대신라·대수 전쟁을 주도하던 이들은 평양계 귀족세력이었는데 이들은 대외 강경책을 주장했으며 연개소문 가문은 이러한 정책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았다. 「천남생묘지」에는 연개소문 가문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평원왕?영양왕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류왕대에 들어와서 고구려가 대당 온건책을 쓰면서 이것을 주장해 오던 국내계 귀족세력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영류왕 말년에 들어오면 대당 강경파와 대당 온건파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어 갔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파로서 정변을 일으켰으나, 정변 직후 반대세력의 반발을 완화하기 위하여 그 자신은 막리지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측근으로 생각되는 도수류금류를 대대로로 내세웠다고 하였다.(임기환, 2004)

그 외에 영류왕대에 연개소문과 영류왕이 애초부터 대립적인 관계로 출발하지 않았음을 주장한 견해도 있다. 영류왕 집권전반기는 영류왕과 연씨세력의 협력에 의해 정국이 운영되었으며, 외교노선도 강·온의 양면이 적절히 구사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631년 경관(京觀)파괴를 기점으로 영류왕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고 정국의 주도권은 연씨세력을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에게 넘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638년 신라 칠중성에 대한 공격실패, 당의 위협증대, 그리고 연씨가문의 수장인,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의 죽음으로 영류왕의 입지가 다시 강화되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640년 태자 입조와 같은 급진적인 친당정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집권후반기에 이르면 영류왕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가 연개소문의 부직(父職)승계를 반대한 것도 고구려 왕권을 능가했던 연씨세력의 약화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 보았다.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간 이해관계가 충돌하였으며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단순한 대립의 차원이 아닌, 서로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차원으로 발전하고 이 때문에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이라는 극단적인 무력투쟁이 나타났다고 보았다.(선봉조, 2009)

한편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인한 이미지 실추를 국제적으로 만회해보려는 의도하에 도교를 진흥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당시 고구려 침략을 기도하고 있던 당으로서는 왕을 죽인 연개소문의 정변이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는데, 연개소문은 노자(老子)의 후예를 주장하며 도교를 존숭하던 당으로부터 도교를 들여와 당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는 것이다.(이만열, 1971)

그러나 연개소문이 국왕세력과 연결되어 있던 불교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도교진흥책을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연개소문의 정변과 당의 침입 위험 등으로 고구려 사회에서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는데, 연개소문은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도사들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도사들로 하여금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이는 『도덕경』이 기존의 체제나 문화에 반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계루부세력과 불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이념으로서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으며, 『도덕경』에 담겨진 무위정치(無爲政治) 이념은 차원을 역전시켜 무불위(無不爲)에 이르면 가장 엄격한 독재정치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사회적 통제술이 되기 때문에, 이를 자신의 독재정치 실현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삼았다고 보았다.(이내옥, 1983)

그 외에 연개소문의 도교 진흥책과 이에 따른 승려 보덕의 고달산 이주와 관련하여 보덕이 정변을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열반경(涅槃經)강의를 통해 이를 비판했다고 보기도 한다. 열반경에서 일천제(一闡提)의 성불여부는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이며, 열반에 이르기까지 보살도를 닦아야 한다고 하는데, 일천제는 정법을 비방하고 삼보(三寶)의 존재를 믿지 않아 성불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보덕은 연개소문을 이런 일천제로 파악했기 때문에 결국 고구려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김주성, 2003)

개소문의 사망연대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25년(666)조에서는 이 해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여 장자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권49 열전9 개소문(蓋蘇文)에서도 그가 당(唐) 건봉(乾封) 원년(666)에 죽었다고 하였다. 『구당서』 권5 본기5 고종 하(下) 건봉 원년(666)조에는 6월 임인에 막리지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었다고 하였으며, 『구당서』 권199 상(上) 열전149 상(上) 동이 고려전에도 건봉 원년에 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신당서』 권220 열전 제145 동이 고려전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으며, 『자치통감』 권201 당기(唐紀)17 건봉 원년조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3년 10월조에 따르면 그가 보장왕 23년(664)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천남생묘지」에서는 남생이 665년에 태막리지가 되고 군국을 총괄한 것으로 나와 있어, 이를 생각할 경우 연개소문은 665년에 사망하고 남생이 그 뒤를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이홍직, 1971)

참고문헌

이홍직, 1971, 「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이만열, 1971, 「高句麗 道敎政策에 대한 몇 가지 檢討」『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을유문화사.
이내옥, 1983, 「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歷史學報』 99·100合.
김기흥, 1992, 「고구려 淵蓋蘇文政權의 한계성」『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전미희, 1994, 「淵蓋蘇文의 執權과 그 政權의 性格」『李基白先生古稀紀念論叢』.
전경옥, 1996, 「淵蓋蘇文 執權期의 莫離支體制 硏究」『白山學報』 46.
노태돈, 1999, 「귀족연립정권의 성립」『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김주성, 2003, 「보덕전의 검토와 보덕의 고달산이주」『韓國史硏究』 121.
임기환, 2004, 「귀족 연립 체제로의 변동, 그리고 멸망」『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선봉조, 2009, 「榮留王代 政局主導權의 變化樣相과 淵氏勢力」『高句麗·渤海硏究』33.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보장봉로보덕이암)
寶藏奉老普德移庵
高麗本記云 麗季武德貞觀間 國人爭奉五斗米敎 唐高祖聞之 遣道士 送天尊像 來講道德經 王與國人聽之 卽第二十七代榮留王卽位七年 武德七年甲申也 明年遣使往唐 求學佛老 唐帝[謂高祖也]許之 及寶藏王卽位[貞觀十六年壬寅也] 亦欲倂興三敎 時寵相蓋蘇文 說王以儒釋?熾而黃冠未盛 特使於唐求道敎 時 普德和尙住盤龍寺 憫左道匹正 國祚危矣 屢諫不聽 乃以神力飛方丈 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 卽永徽元年庚戌六月也 [又本傳云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也] 未幾國滅[以<總>章元年戊辰國滅 則計距庚戌十九年矣]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已上國史] 眞樂公留詩在堂 文烈公著傳行世 又按唐書云 先是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滅彼國矣 及蓋氏擅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記云 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十月 高麗王[時第<二>十六代 ?陽王立二十五年也] 上表乞降 時有一人 密持小弩於懷中 隨持表使 到煬帝舡中 帝奉表讀之 弩發中帝胸 帝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而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奏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 時 武陽王聞其賢 [國史 榮留王名建武 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 徵入爲臣 自稱姓蓋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唐書云 蓋蘇文自謂莫離支 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幷注 則蘇文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金奏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 故國危矣 王然之 奏唐請之 太宗遣?達等道士八人 [國史云 武德八年乙酉 遣使入唐<求>佛老 唐帝許之 據此則羊<皿>自甲戌年死 而托生于此 則才年十餘歲矣 而云寵宰 說王遣請 其年月必有一誤 今兩存] 王喜以佛寺爲道? 尊道士 坐儒士之上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 [俗云都帝? 亦云朝天石 盖昔聖帝騎此石 朝上帝故也] 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 時男役女耕 役至十六年乃畢 及寶藏王之世 唐太宗親統 以六軍來征 又不利而還 高宗總章元年戊辰 右相劉仁軌 大將軍李勣 新羅金仁問等 攻破國滅 擒王歸唐 寶藏王庶子<率>四千餘家 投于新羅 [與國史少殊 故幷錄] 大安八年辛未 祐世僧統到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 禮普聖師之眞 有詩云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云云 至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跋云 高麗藏王 <惑>於道敎 不信佛法 師乃飛房 南至此山 後有神人 現於高麗馬嶺 告人云 汝國敗亡無日矣 具如國史 餘具載本傳與僧傳 師有高弟十一人 無上和尙與弟子金趣等 創金洞寺 寂滅義融二師創珍丘寺 智藪創大乘寺 一乘與心正大原等 創大原寺 水淨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 創中臺寺 開原和尙創開原寺 明德創燕口寺 開心與普明亦有傳 皆如本傳 讚曰 釋氏汪洋海不窮 百川儒老盡朝宗 麗王可笑封沮如 不省滄溟徒臥龍

보장왕이 노자를 신봉하고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
「고구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길 “고구려 말기에 무덕(武德, 618-626),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를 다투어 신봉하였는데, 당(唐)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이를 듣고 도사를 보내 천존상을 가져다 주고 가서 도덕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왕이 나라사람들과 함께 들으니 곧 제 27대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624)이었다. 이듬해 사신을 당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 청하니 당나라 황제[고조를 말한다.]가 허락하였다.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이 즉위[정관 16년 임인(642)이다.]하여 또 3교가 함께 흥하려 하니 그때 총애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말하길 유교와 불교는 함께 성하나 도교는 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하자 하였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사도(邪道)가 정도(正道)에 맞서서 국운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全州)이다.]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 살았으니 곧 영휘(永輝, 650-655) 원년 경술(650) 6월이다.[또 「본전(本傳)」에는 건봉(乾封, 666-667) 2년 정묘(667) 3월 3일이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총장(總章, 668-669) 원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경술년과는 19년 떨어져 있다.] 지금 경복사(景福寺)에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이상은 『국사(國史)』이다.] 진락공(眞樂公)이 남긴 시가 당(堂)에 남아있고 문열공(文烈公)이 (그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 또 『당서(唐書)』를 살펴보면 “이보다 앞서 수(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가 요동을 정벌하였을 때 양명(羊皿)이라는 비장이 있었다. 전쟁이 불리하여 장차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반드시 총신이 되어 저 나라를 멸하겠다.’고 하였다. 개씨(蓋氏)가 조정을 어지럽히는데 이르러 개(盖)를 성으로 삼으니 이는 곧 양명(羊皿)이란 이름 글자 두자가 개(盖)란 글자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 『고려고기(高麗古記)』에 이르길 “수양제가 대업(大業, 605-618) 8년 임신(612)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다. 10년 갑술(614) 10월에 고려왕이[이때가 제 26대 영양왕(?陽王, 재위 590-618) 재위 25년(614)이었다.] 글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이때 어떤 한 사람이 있어 몰래 작은 활을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져가는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을 때에 활을 쏘아 황제의 가슴을 맞추었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키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주인인데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익이 없었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하였다. 이때 우상 양명이 아뢰되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죽은 후에 (양명이) 고구려에 태어나 15세에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그때 무양왕(武陽王)[『국사』에 영류왕의 이름이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하였다 했는데 여기에는 무양이라 하니 잘 알수 없다.]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다. 스스로 성을 개, 이름을 금이라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의 자리이다.[『당서(唐書)』에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 하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했다. 또『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을 살펴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쓰고 주석을 달았다.”라 하였으니 곧 소문(蘇文)이 직명(職名)인 것이 문헌으로 증명되는데, 전(傳)에 이르길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을 쓰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개금이 아뢰길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3교가 있는 것인데, 신이 보아하니 우리나라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 여겨 당나라에 도교를 요청하자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서달(?達) 등 도사 8인을 보냈다. [『국사(國史)』에 이르되 “무덕 8년 을유(625)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한다. 이것에 의하면 곧 양명이 갑술년(614)에 죽어 이 땅에 태어났다면 나이가 겨우 10여 세이다. 그러나 총재(寵宰)로써 왕을 설득하여 사신을 보내길 청하였다 하니, 그 연월에서 반드시 하나는 틀린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 양쪽 기록을 다 남겨둔다.]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道?)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보다 위에 있게 하였다. 도사들이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다니면서 진압하였다. 옛 평양성은 모양이 신월성(新月城)이었는데 도사들이 주문으로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하여 그곳을 더 쌓게 하여 만월성(滿月城)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용언성(龍堰城)이라 이름짓고 참(讖)을 지어 용언도(龍堰堵)라 하고 또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 하기도 하였다. 혹은 영석[세간에 말하길 도제암(都帝?)이라 하고 또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조회하였기 때문이다.]을 파서 깨뜨리기도 하였다. 개금이 또 아뢰어 동북에서 서남까지 장성을 쌓게 하니, 이때 남자는 그 부역에 나가고 여자는 농사를 지었는데 부역은 16년 후에야 끝났다. 보장왕 때에 이르러 당(唐) 태종(太宗)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와서 치다가 또 불리하여 돌아갔다. 고종 총장 원년 무진(668)에 우상 유인궤(劉仁軌)와 대장군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와서 공격하여 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가 4천여 가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한다.[『국사』와 조금 다르므로 같이 기록한다.] 대안(大安, 1084-1094) 8년 신미(1091)에 승통 우세(祐世, 의천)가 고대산 경복사 비래방장에 와서, 보덕성사의 진영에 예를 표했다. 시가 있어 가로되 “열반방 등의 교는 우리 성사(聖師)께서 전수하였다...... 애석하구나! 방장을 날려온 후 동명의 옛나라가 위태로워졌구나.”라 하였다. 우세가 발문을 지어 말하길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 불법을 믿지 않으므로 스님께서 방을 날려 남쪽으로 이 산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후에 신인이 있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하길 “너희 나라가 패망할 날이 머지 않았다.” 하였다. 모두 『국사』와 같고 나머지는 본전과『승전(僧傳)』에 다 기재되어 있다. 스님에게는 고명한 제자가 11명 있었다.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두 스님은 진구사(珍丘寺)를 세웠으며,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과 심정(心正)·대원(大原) 등은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으며,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으며,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찬한다. “부처의 도는 넓고 넓어 바다같이 한량없으니, 백 갈래 하천같은 유교와 도교가 모두 조종에 이르도다. 우습다. 고구려왕이 웅덩이만 신봉하고 와룡이 창해로 옮겨감을 몰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