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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담사

기본정보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대의 승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대의 승려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와 「안민가(安民歌)」를 지었으며, 경덕왕이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이를 사양한 바 있다. 또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 남산에 있는 생의사(生義寺)의 석미륵에 공양했다고 한다.

전문정보

충담사(忠談師)는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와 「안민가(安民歌)」를 지은 승려이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와 권3 탑상4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조에 전한다.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에 따르면, 경덕왕 24년(765)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에 올라 신하들에게 누가 길에서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이때 신하들이 위엄있고 깨끗해 보이는 승려를 데려다가 왕에게 보였으나 왕은 그 승려가 자신이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라고 하면서 물리쳤다. 그리고는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진 채 남쪽에서 오고 있는 한 승려를 보고 그를 누각위로 맞이하여 그의 이름과 함께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물었다. 승려는 자신의 이름이 충담이며,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올리는지라 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충담에게 차를 한 잔 청하여 마시고, 충담사가 지었다는 「찬기파랑가」의 뜻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을 언급하면서 왕 자신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충담사는 바로 노래를 지어 바쳤고 경덕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충담사를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그는 굳이 사양하고 왕사의 직을 받지 않았다. 탑상4의 생의사석미륵조에 전하는 내용은 이보다 간략한데, 생의사(生義寺)의 이름에 대한 세주에서 충담사(忠談師)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 차를 다려 공양한 것이 생의사의 석미륵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들 기록에 따라 충담사는 경덕왕대에 활동했으며 찬기파랑가」로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승려였고, 경덕왕에게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민가」는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에 전하는데, 왕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고, 이들이 각자 자기 본분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충담사의 실체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삼국유사』 외에는 전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하여 이를 실존인물로 보지 않고 설화상 형성된 작의적(作意的) 인물로 보기도 한다.(최철, 1983) 혹은 충담사를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22년(763)조에 보이는 대나마 이순(李純)과 같은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나마 이순은 왕이 총애하는 신하였는데 갑자기 산속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고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를 지었다. 이후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궁궐문에 나가 간(諫)하니 왕이 이에 잘못을 깨우치고 그와 함께 불교의 오묘한 이치와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며칠 동안 들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순의 행적은, 왕에게 나라의 안위에 대해 경계하는 「안민가」를 지어 바치는 충담사와 서로 유사한 바 있으므로 충담과 이순을 동일인물로 보았던 것이다.(김선기, 1969)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충담사를 실존인물로 이해하고 있으며, 특히 그가 「찬기파랑가」를 지었다는 점에서 화랑과 관련 있는 승려로 보고 있다.(김상현, 1999)

또한 그가 지은 「찬기파랑가」와 「안민가」의 창작배경과 관련하여 충담사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추정해 보기도 한다.

먼저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에 보이는 충담의 행적을 보고, 그가 「찬기파랑가」를 지은 것으로 보아 절의 있는 화랑을 모시던 낭승(郎僧)이었고 납의를 입고 앵통을 짊어진 것으로 보아 검소한 불자생활을 신조로 한 승려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 또한 충담사는 미륵세존을 숭앙하였고 왕사(王師)의 직책을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므로 권위나 권좌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고매한 인격자였으며, 동시에 통치권에 타협하기를 꺼리는, 민중편에 선 승려이면서 호국애민사상을 지녔던 지성인이었다고 정리하였다.(김승찬, 1991)

혹은 충담이 화랑과 관련된 승려인 낭승이었던 점을 인정하면서, 경덕왕 당시에 충담은 과거의 기파랑(=미륵)을 흠모하는 남산 부근의 승려로 제도권 밖의 인물인 재야?서민층을 대변하던 인물인 동시에, 민간신앙에 바탕으로하는 미륵신앙과 화랑사상을 기저로 하고 있었기에 경덕왕의 한화정책에 반발과 갈등을 가졌던 보수적?자주적 인물이었다고 이해하는 의견도 있다. 충담사는 현실개혁의 의지가 있었지만 이를 실현할 수 없는, 철저히 권력 및 제도권에서 소외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김유미, 1995)

한편 충담을 낭도승(郎徒僧)이라고 규정하는 견해도 있는데, 충담은 “석(釋) 충담”이 아니라 “충담사”로 불리고 있고, 화랑을 찬모한 「찬기파랑가」를 지었으며 화랑을 대칭(代稱)하는 미륵세존을 신앙의 주 대상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낭도승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낭도승으로서의 충담사는 『삼국유사』 권5 감통7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에서 경덕왕에게 “승은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하여 단지 향가(鄕歌)를 알뿐입니다.(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라고 아뢰었던 월명사와 유사하며, 화랑도의 상수(上首)로서 낭도들의 정신적인 교련자 기능을 담당하고 화주(花主)의 자문에도 수시로 응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다만 작가론의 측면에서 충담사는 감성적인 월명사와는 구분되며 서정성과 사회성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고 한다.(박노준, 2000) 아울러 『삼국유사』 권5 효선9 빈녀양모(貧女養母)조에서 효종랑이 효녀 지은을 도와줄 때 낭도들과 유람했던 장소가 삼화술(三花述)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과 충담사가 삼화령 미륵세존에 차를 공양했다는 점을 연결해 보면서, 충담사가 미륵불을 모시던 낭도승이었다는 앞의 견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신재홍, 2004)

한편 충담사 관련 설화에서 경덕왕은 당시 “영복승(榮服僧)” 혹은 “영승(榮僧)”을 구해보고자 하였는데, 충담사가 왕의 요구에 걸맞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영복승의 의미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의견이 있다. 먼저 경덕왕이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한(威儀鮮潔)”한 승려가 아니라 납의를 걸치고 앵통을 짊어진 충담사를 흔쾌히 맞이한 것을 볼 때, 경덕왕이 의도한 “영복”이란 “잘 차려입는다.”의 의미가 아니라 “잘 다스린다.”의 의미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김문태, 1995) 또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영복승에는 ①영화로운 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직분의 승려(服: 옷을 입음, 직분) ②영화롭게 또는 화려하게 일을 행할 또는 생각할 승려(服: 행할, 생각할)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경덕왕은 신하에게 ②의 뜻을 전달했으나 신하들은 단순하게 ①로 해석하여 처음에 왕에 뜻에 맞지 않는 승려를 대령했고 이에 왕이 다시 “복(服)”자를 제거하여 자신의 뜻을 신하에게 재차 명확히 밝혔던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양희철, 1997)

영복승을 낭도승을 뜻하는 일종의 기호였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즉 경덕왕이 처음에 누군지도 몰랐던 충담사를 가리키면서 그가 바로 영복승이라고 지적하여 귀정문 누각으로 부른 까닭은 그의 복장(服裝)에 있었던 것이므로, 영복승의 “복(服)”자에서 옷의 의미를 제외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영복은 곧 영예로운 복장을 의미하고 이것이 곧 낭도승의 특수한 옷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박노준, 2000)

참고문헌

김선기, 1969, 『신라노래풀이』, 현대문학.
최철, 1983, 『향가의 본질과 시적 상상력』, 새문사.
김승찬, 1991, 『신라향가론』, 부산대학교 출판부.
김문태, 1995, 『三國遺事의 詩歌와 敍事文脈 硏究』, 태학사.
김유미, 1995, 「忠談師論-景德王時代와 두 作品의 의미를 통하여」『韓國文學論叢』17, 한국문학회.
양희철, 1997, 『삼국유사 향가연구』, 태학사.
김상현, 1999, 『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박노준, 2000, 「忠談師論」『한국언어문화』18, 한국언어문화학회.
신재홍, 2004, 「향가에 나타난 정치의 이념과 현실 -<도솔가>,<안민가>,<원가>를 대상으로」『古典文學硏究』2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 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生以支所音物生 此??惡支治良羅 此地?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謚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祐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爲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 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爲宣德與金<敬信>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 위로 행차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길 위에서 한 명의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마침 한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했다. 길에서 배회하며 가니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다가 보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삼태기라고도 한다]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니, 승려는 “충담(忠談)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에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승려가 이에 차를 달여 바쳤다. 차의 향기와 맛이 이상하고, 다구 속에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들으니 사(師)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승(僧)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승은 재배(再拜)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이르길,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후렴구는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 이르기를,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라고 하였다.
왕의 옥경(玉莖)이 8촌의 길이였는데,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도움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니 원하건대 대덕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후사가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가 말하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가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그렇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은 혼란시켜서는 안되는데 지금 대사가 이웃 마을과 같이 왕래하여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다시 통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 깨우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朝政)에 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막을 경황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소제(小帝)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함께 놀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마침내는 선덕(宣德)과 김경신(金敬信)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부터 신라에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