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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법사

기본정보

백제의 승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백제의 승려로서 신통력을 잘 부렸다. 서동 즉 무왕의 부탁을 받고 신통력을 써서 황금을 신라 왕궁에 수송해 주었고, 하룻밤 사이에 미륵사 주변의 산을 깎아 못을 메워 미륵사지 세워질 평지를 만들었다. 신라의 진평왕은 이러한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더욱 존경하고 안부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무왕(武王)조에 따르면, 지명법사(知命法師)는 서동의 부탁을 받고 신통력을 써서 황금을 신라 왕궁에 수송하였고 이를 계기로 진평왕이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해 준 것으로 나온다. 또한 그는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주변의 산을 깎아서 못을 메워 미륵사가 세워질 평지를 만들었다고도 전한다. 진평왕이 이러한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더욱 존경하고 늘 안부편지를 보냈다고 하는 것은 진평왕이 지명법사를 매우 신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뢰성으로 인해 지명법사는 무왕과 신라 왕녀와의 결혼을 주선하는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은 용화산 아래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한 것을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는데 이 때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주변의 산을 깎아서 못을 메웠다고 한다. 그 실제는 못을 메우는 작업을 지명법사가 도맡아서 처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아 그가 미륵사 창건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노중국, 1999)

한편,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 백제 승려였던 지명법사를 진평왕대의 신라 승려인 지명(智明)과 동일인으로 보고 그가 백제에 들어가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김복순, 2002) 이러한 견해는 두 승려의 이름이 같다는 것과 활동시기가 모두 진평왕대라고 하는 사실 및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근거로 지명이 진(陳)나라에 들어가 10년 만에 귀국한 후 7년 동안 백제에 머물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지명(智明)이 진평왕 7년(585)에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24년(602)에 귀국하였다는 것은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의 기록이 일치하므로 그는 17년간 진나라에 머물러 있다가 귀국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10년만에 귀국한 후 7년동안 백제에 머물면서 첩보활동을 한 신라 승려로 보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으므로 『삼국유사』 무왕조의 지명(知命)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해동고승전』의 지명(智明)은 별개의 인물로 보기도 본다.(노중국, 1999)

지명법사가 머문 곳인 용화산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하는 곳으로 나오는 용화수(龍華樹)에 대비되고, 그가 주석한 사자사(師子寺)가 미륵보살이 도솔천의 칠보대(七寶臺) 안의 마니전상(摩尼殿上)에 있는 사자상좌(師子上座)에 앉아 설법한다고 하는 사자상좌에 대비된다고 보아 용화산과 사자사는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영태, 1982) 이처럼 지명법사가 머문 산과 절이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명법사의 성격을 미륵신앙의 신봉자(노중국, 1999)로 볼 수 있게 하지만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과 이 신통력은 토착적이며 무격신앙과도 관련이 있으며,(김두진 1987) 토착적인 무격신앙과 미륵신앙의 양면성을 지닌 인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김주성, 1990)

참고문헌

김영태, 1982, 「百濟의 彌勒思想-龍華山 彌勒寺를 중심으로」『百濟硏究』13.
김두진, 1987, 「新羅中古時代의 彌勒信仰」『韓國學論叢』9 .
김주성, 1990, 「百濟 泗?時代 政治史 硏究」,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노중국, 1999, 「百濟 武王과 知命法師」『韓國史硏究』107.
김복순, 2002, 『韓國古代佛敎史硏究』, 민족사 .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무왕)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餉閭里群童 群童親附之 乃作謠 誘群童而唱之云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母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 何如 薯童曰 可 於是聚金 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 殿塔廊?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 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무왕[고본은 무강이라고 썼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서울 남쪽 연못가(남지)에 집을 짓고 과부로 살다가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 어렸을 때 이름을 서동이라고 하였고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이 그로 인해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혹은 선화(善化)]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마로써 마을의 뭇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그를 가까이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뭇아이들을 꼬여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두루 퍼져 대궐에까지 달하니 백관이 임금께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다. 떠나려고 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고 가게 하였다. 공주가 귀양살 곳으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고 장차 시위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였고 이로 인해 따라가다가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영험함을 믿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가 준 금을 내어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도대체 무엇이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황금이니 백년의 부를 이룰 것입니다"고 하였다.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게 진흙처럼 마구 쌓여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천하의 진귀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이 보물을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서동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금을 모아 언덕과 같이 쌓아두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금을 수송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날라다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통한 조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부인이 왕께 이르기를, “이 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하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 삼회를 법상으로 삼아 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여러 장인을 보내 이를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남아있다.[『삼국사』에는 이를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홀어미의 아들이라고 전하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