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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

기본정보

자장법사 다음으로 월정사에 거주한 신라의 승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자장법사(慈藏法師) 다음으로 월정사(月精寺)에 거주한 승려이다. 신효거사(信孝居士)는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공주(公州) 사람으로 어머니가 고기 반찬이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아 산과 들로 고기를 구하러 다니다 학을 쏘았는데 학의 깃털로 세상을 보니 모든 사람이 짐승으로 보여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어머니를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는데 이를 효가원(孝家院)이라고 하였다.

전문정보

신효(信孝)는 자장법사(慈藏法師) 다음으로 월정사(月精寺)에 거주한 승려이다. 『삼국유사』 탑상4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처음 오대산에 이르러 부처의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나 7일동안 나타나지 않으므로 묘범산(妙梵山)에 이르러 정암사(淨岩寺)를 세웠다고 한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이라고도 하였다. 거사의 집이 공주(公州)에 있었으며 어머니 봉양을 극히 효성스럽게 하였다고 한다. 그 어머니가 고기반찬이 아니면 식사를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고자 산과 들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이것을 쏘았는데 학 한 마리가 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거사가 그 깃을 들고 눈을 가린 채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여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고 한다. 후에 곧 승려가 되어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라고 한다. 거사가 경주(慶州) 경내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사람들을 보니 모두 사람의 형상으로 보여 이곳에 머물러 살 뜻이 있어 길에서 늙은 부인을 만나 살만한 곳을 물었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서쪽 재를 넘으면 북쪽을 향한 골짜기가 있어 살만합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간 곳이 없었다. 거사는 관음보살의 교시인 것을 알고, 이에 성오평(省烏坪)을 지나 자장법사가 처음으로 띠집을 지었던 자리에 들어가 살았다. 잠시 후 다섯 비구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거사가 어리둥절하고 있었더니 비구가 말하기를 “네가 쥐고 있던 사람 보는 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거사가 곧 그 깃을 내주었다. 비구가 그 깃을 가사의 떨어진 폭에 대어보니 꼭 들어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라 베였다. 거사가 다섯 명의 비구와 작별한 뒤에야 그들이 오대산 각대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으로 띠로 지은 것이며, 다음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신효의 효성과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8 열전8 향덕전에도 보이고 있다.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의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는 반길(潘吉)이었는데 천성이 온후하고 착해서 마을에서 그 행실을 칭찬하였으며,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향덕 또한 효성스럽고 순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다. 천보(天寶) 14년 을미(755)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종기가 나서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편안히 위로하였으나 봉양할 것이 없어 이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어 먹게하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모두 완쾌시켰다. 고을의 관청에서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 조(租) 300섬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고, 담당 관청에 명해 비석을 세워 일을 기록하게 하여 드러내도록 하니 지금(고려)까지 사람들은 그곳을 효가리(孝家里)라고 불렀음을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신효와 향덕이 같은 공주지역 출신이라는 점과 두 인물이 살았던 곳을 동일하게 효가로 불렀다는 점을 근거로 같은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김상현, 1995)

신효가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지은 효가원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외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문집인 『미암집(眉巖集)』 권14 을축년 5월 29일의 일기를 통해 “29일에 30리를 갔는데 공주(公州) 효가원리(孝家院里)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7 공주목(公州牧) 역원(驛院)조를 통해서도 관련 기록이 보인다. “효가리원(孝家里院)은 주(州) 동쪽 10리에 있다. 정추(鄭樞, 1573-1612)의 시에, 단풍잎 몰아치고 원(院) 마을 비었는데, 산 앞에 비석에 석양이 붉었네. 넓적다리 살 베인 효자 지금 어디 있느냐. 밤마다 저 달빛이 거울 속에 떨어지네. 한 줄기 맑은 강물 푸른 하늘 담겼는데, 양쪽 기슭 붉은 나무 서풍과 싸움하네. 효가원(孝家院)이 어디메인가, 희멀건 가을빛 속으로 새 날아 없어지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인용한 시는 정추의 『원재고(圓齋稿)』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공주 효가원(孝家院)은 효가리원(孝家里院)으로도 불리었으며, 신효거사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넓적다리를 베어 드렸던 이야기가 조선시대에도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상현, 1995, ?삼국유사 효선편의 불교적 의미? 『부처님이 들려주는 孝이야기』, 조계종출판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월정사오류성중)
臺山月精寺五類聖衆
按寺中所傳古記云 慈藏法師初至五臺 欲覩眞身 於山麓結茅而住 七日不見 而到妙梵山 創淨岩寺 後有信孝居士者 或云 幼童菩薩化身 家在公州 養母純孝 母非肉不食 士求肉 出行山野 路見五鶴射之 有一鶴落一羽而去 士執其羽 遮眼而見人 人皆是畜生 故不得肉 而因割股肉進母 後乃出家 捨其家爲寺 今爲孝家院 士自慶州界至河率 見人多是人形 因有居住之志 路見老婦 問可住處 婦云 過西嶺 有北向洞可居 言訖不現 士知觀音所敎 因過省烏坪 入慈藏初結茅處而住 俄有五比丘到云 汝之持來袈裟一幅 今何在 士茫然 比丘云 汝所執見人之羽是也 士乃出呈 比丘乃置羽 於袈裟闕幅中相合 而非羽乃布也 士與五比丘別後 方知是五類聖衆化身也 此月精寺 慈藏初結茅 次信孝居士來住 次梵日門人信義頭?來 創庵而住 後有水多寺長老有緣來住 而漸成大寺 寺之五類聖衆九層石塔 皆聖跡也 相地者云 國內名山 此地最勝 佛法長興之處云云

(오)대산 월정사의 5류성중
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에 따르면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오대(산)에 이르러 부처의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으나 7일동안 나타나지 않으므로 묘범산(妙梵山)에 이르러 정암사(淨岩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란 이가 있었으니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집이 공주(公州)에 있었으며 어머니 봉양을 극히 효성스럽게 하였다고 한다. 그 어머니가 고기반찬이 아니면 식사를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고자 산과 들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이것을 쏘았다. 학 한 마리가 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거사가 그 깃을 들고 눈을 가린 채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거사는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 그 후 곧 중이 되어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가 경주(慶州) 경내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사람들을 보니 모두 사람의 형상으로 보였다. 이리하여 이곳에 머물러 살 뜻이 있어 길에서 늙은 부인을 만나 살만한 곳을 물었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서쪽 재를 넘으면 북쪽을 향한 골짜기가 있어 살만합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간 곳이 없었다. 거사는 관음보살의 교시인 것을 알고, 이에 성오평(省烏坪)을 지나 자장법사가 처음으로 띠집을 지었던 자리에 들어가 살았다. 잠시 후 다섯 비구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거사가 어리둥절하고 있었더니 비구가 말하기를 “네가 쥐고 있던 사람 보는 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거사가 곧 그 깃을 내주었다. 비구가 그 깃을 가사의 떨어진 폭에 대어보니 꼭 들어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라 베였다. 거사가 다섯 명의 비구와 작별한 뒤에야 그들이 5류성중(五類聖衆)의 화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으로 띠로 지은 것이며, 다음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다음은 범일(梵日)의 문인 신의(信義) 두타(頭?)가 와서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 후에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인 승려 유연(有緣)이 와 살면서 점차 큰 절이 되었다. 절에 있는 5류성중(五類聖衆)과 9층석탑(九層石塔)은 모두 성자의 유적이다. 땅의 지세를 살피는자가 말하기를 국내의 명산에서 이 땅이 가장 좋은 곳이므로 불법이 길이 흥할 곳이라고 하였다.(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