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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

기본정보

고구려의 승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고구려의 승려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순도공(順道公) 이후 법심(法深), 담엄(曇嚴) 등과 더불어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지론종을 고구려에 처음 소개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전문정보

의연은 고구려의 승려로서,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順道肇麗)조에 의하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를 계승하여 법심(法深), 담엄(曇嚴) 등과 함께 고구려 불교를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그 밖에 의연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책으로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 권12,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 법상(法上)전,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권1 석의연(釋義淵)전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의연의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해동고승전』 권1 석의연전에 실린 기록을 통해 의연의 활동시기를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의연은 무평(武平) 7년, 즉 평원왕 18년(576)에 북제(北齊)로 건너가 북제의 고승 법상(法上)을 만났다. 이를 통해 볼 때 의연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대를 중심으로 그 전후의 시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볼 수 있다고 한다.(이만, 2000)

한편 의연은 그 출신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 삼국시대 유학승들의 신분이 대부분 진골중심 귀족계층이었던 점을 주목해본다면 의연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한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의연이 평양을 기반으로 하는 신진귀족세력인 대승상(大丞相) 왕고덕(王高德)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연 역시 평양 천도 이후 중앙 정계에 등장한 신진귀족출신이라는 것이다.(정선여, 2000)

한편 의연의 유학을 불교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불교사 일반에 대한 고구려 지식인의 열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신동하, 1999) 더 나아가 평원왕 당시 국내외 정세를 살펴볼 때 의연이 남조가 아닌 북제로 간 것에 주목한 견해가 있다. 당시 고구려는 남조 진(陳)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북제와는 긴장 관계에 있었다. 더구나 당시 북제의 불교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지나친 불교 숭상으로 인해 불교계가 퇴폐하였다고 한다. 북제 불교계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연이 북제에 간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 당시 대승상 왕고덕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불교의 전래와 그 발생과정 등을 몰랐기 때문에 불교를 전국에 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왕고덕이 의연을 법상 등과 같은 고승이 있는 북제로 보내 알아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의연과 왕고덕 사이에는 불교계의 모든 문제점들에 대해 불교 신자의 입장에서 사전에 어떤 교감이 있었거나, 아니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배계층들에 의해 문화와 종교의 제도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도모하다 보니 이런 문제점들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의연이 북제로 간 것으로 보았다.(이만, 2000)

또한 의연이 법상과 북제의 불교를 주목한 것이라고 본 견해도 있다. 법상은 북제 불교계에서 교단을 통제하는 최상위에 있던 승려로서, 승관제(僧官制)를 통해 북제 불교계를 총괄하였다. 승관제란 승려의 임명, 행동 규범, 사찰 재산의 관리 등이 모두 황제의 지배하에 운영되던 제도로서 국가가 불교를 통제하게 하는 제도이다. 당시 고구려의 불교는 이미 초문사(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와 같은 대규모 사찰이 왕실 후원 하에 창건되었고, 불교 교단이 형성되어 점차 세력이 확대되자 이러한 승관제의 정비를 필요로 하게 되어 의연이 북제로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귀국 후 의연은 직접 보고 온 북제 승관제를 모범으로 하여 고구려의 승관제를 재정비하였을 것으로 보았다.(정선여, 2000)

의연은 고구려의 불교를 크게 일으킨 승려이지만, 그의 저서 및 사상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의 법상에게서 수학하였던 것으로 보아 의연은 지론종을 고구려에 소개한 인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지론종은 모든 일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 6세기 초 중국에 소개되면서 성립되었는데, 세친(世親)이 쓴 『십지경(十地經)』의 해석인 『십지경론(十地經論)』이 중심되는 경전이었다.(정선여, 2000) 이렇게 볼 때 의연의 유식사상은 우리나라 유식사상의 효시라고 본 견해도 있다.(이만, 2000)

참고문헌

신동하, 1999, 「한국 고대의 佛紀 사용에 대하여」『韓國史論』41·42合,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만, 2000, 「高句麗 義淵의 唯識敎學-中國 地論宗의 法上과의 관계를 중심으로-」『韓國唯識思想史』, 장경각.
정선여, 2000, 「6세기대 佛敎敎團의 정리」『고구려불교사연구』, 서경.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
順道肇麗
順道肇麗[道公之次 亦有法深義淵曇嚴之流 相繼而興敎 然古傳無文 今亦不敢編次 詳見僧傳]
高麗本記云 小獸林王卽位二年壬申 乃東晉咸安二年 孝武帝卽位之年也 前秦符堅 遣使及僧順道 送佛像經文[時堅都關中 卽長安] 又四年甲戌 阿道來自晉 明年乙亥二月 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高麗佛法之始 僧傳作二道來自魏云者 誤矣 實自前秦而來 又云肖門寺今興國 伊弗蘭寺今興福者 亦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 在遼水之北 遼水一名鴨? 今云安民江 豈有松京之興國寺名 讚曰 鴨?春深渚草鮮 白沙鷗鷺等閑眠 忽驚柔櫓一聲遠 何處漁舟客到烟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다.[순도공(順道公)의 다음에 법심(法深), 의연(義淵), 담엄(曇嚴)의 무리가 서로 계속하여 불교를 일으켰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기사가 없으므로 지금 여기서 함부로 편차(編次)하지 않는다. 『승전(僧傳)』에 자세히 보인다.]
고구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기를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즉위 2년 임신(壬申)(372)은 즉 동진(東晉) 함안(咸安) 2년이니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가 즉위하던 해였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그때 부견은 관중(關中)에 도읍하였으니, 즉 장안(長安)이다.] 또 4년(374) 갑술(甲戌)에 아도(阿道)가 진(晉)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乙亥) 2월에는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두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두었으니 이것이 고구려[高麗] 불법의 시초이다.”라고 하였다. 『승전(僧傳)』에 순도와 아도가 위(魏)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전진(前秦)에서 왔다. 또 초문사(肖門寺)는 지금의 흥국사(興國寺)이고, 이불란사(伊弗蘭寺)는 지금의 흥복사(興福寺)라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생각컨대 고구려 시대의 도읍(都邑)은 안시성(安市城), 일명 안정홀(安丁忽)이니 요수(遼水)의 북쪽에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 한다. 송경(松京, 개경) 흥국사(興國寺)의 이름이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찬(讚)한다. “압록에 봄이 깊어 물가의 풀빛 고운데, 백사장에 갈매기 한가롭게 조는구나. 부드러이 노 젓는 소리에 놀라 한 소리 길게 우니, 어느 곳 고깃배가 손님을 싣고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