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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

기본정보

고구려와 신라에 불교를 전한 인물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삼국유사』 순도조려조에 따르면 아도(阿道)는 고구려 소수림왕 4년 갑술(374) 진(晉)에서 고구려로 온 승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에서는 신라 제 21대 비처왕(소지왕, 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신라로 왔다고 하였으며, 같은 조에서 인용한 「아도본비(我道本碑)」에서는 아도(我道)가 고구려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신라의 불교전파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흥법3 순도조려조에서 인용한 「고려본기(高麗本記)」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4년 갑술(374)에 아도(阿道)가 동진(東晉)에서 고구려로 왔으며, 조정에서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있게 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같은 조에서 인용한 『승전(僧傳)』에는 위(魏)에서 왔다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며 아도는 전진(前秦)에서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에서는 신라본기 제4의 기록을 인용하여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아도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신라본기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528)조의 내용을 가리키는데, 신라본기의 아도 관련내용은 다시 『계림잡전(鷄林雜傳)』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신라 제 21대 비처왕(毗處王)대에 아도화상(我道和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그 모습이 신라 제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대에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승 묵호자(墨胡子)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주에서는 신라본기에 있는 주(注)를 인용하여 앞의 내용이 본비(本碑)와 모든 전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고, 『고승전(高僧傳)』에서는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서천축(西天竺)사람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음을 말했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이어서 아도와 염촉(이차돈)의 행적을 기록한 김용행(金用行) 찬(撰) 「아도본비(我道本碑)」의 내용을 소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我道)가 고구려 사람이며, 불교를 전하고자 신라 제 13대 미추왕 즉위 2년 계미(263)에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도본비」에 인용된 「고기」를 재인용하면서 아도가 처음 모례의 집에 왔을 때 사람들이 승(僧)이라는 명칭을 몰랐으므로, 아두삼마(阿頭??)라 불렀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찬자는 아도기라조에서 이상의 설을 소개한 뒤 그에 대한 시론을 하였다. 먼저 고구려 소수림왕 갑술년(374)에 아도(阿道)가 동진에서 온 것은 틀리지 않으나, 그 아도가 신라 비처왕대에 신라에 온 것은 100여년의 시간차가 있으므로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도본비에 있는 미추왕대 신라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것도 고구려보다 100여년 전이 되므로 틀리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고구려 · 백제에서 시작되어 신라로 들어왔다는 전제하에, 아도(阿道)가 눌지왕대에 신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눌지왕대에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승 묵호자를 소수림왕대 고구려에 온 아도(阿道)와 같은 인물로 보았다. 그 이유는 둘의 모습이 비슷하며, 아도가 본명을 숨기기 위해 묵호자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 소수림왕대와 눌지왕대는 서로 근접해 있다는 것이었다.

『해동고승전』 권1 아도(阿道)[흑호자(黑胡子)·현창(玄彰)·원표(元表)]조에서는 비처왕대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모례의 집에 왔는데 용모가 눌지왕대 신라에 온 흑호자(黑胡子)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아도가 양(梁) 대통(大通) 원년(527) 3월 11일에 신라로 왔다고 하였으며, 또 고득상(高得相)의 주석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아도가 신라에 온 뒤 2차례 죽임을 당할 뻔했지만 신통력으로 면하고 모례의 집에 숨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이전(殊異傳)』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아도가 고구려 사람이며, 불교를 전하고자 신라 제 13대 미추왕 즉위 2년 계미(263)에 왔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도본비(我道本碑)」의 내용과 같기 때문에 『수이전』을 쓸 때 「아도본비」를 참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해동고승전』의 찬자는 아도의 전기가 사료에 따라 다르므로 취사선택할 수 없다고 하면서, 미추왕대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면 아도는 순도와 동일한 시대의 사람임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관점과는 달리 지금은 고구려에 온 아도와 신라에 온 아도를 별개의 인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먼저 신라에 온 아도(阿道)와 묵호자(墨胡子)가 동일인물이라고 본 『삼국유사』의 관점에는 동의하나 이를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阿道)와 별개의 인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소수림왕대와 아도(묵호자)가 신라에 온 눌지왕대 사이에는 4, 50년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까운 연대라고 할 수 없으며,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충돌이 잦던 때이므로 아도가 고구려에서 백제를 거쳐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는 묵호자라는 별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도나 서역계통의 승려이며, 그 곳에서 고구려나 백제를 거쳐 신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그리고 신라에 온 아도(阿道)를 실존인명이 아닌 승려에 대한 호칭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즉 「아도본비」에 인용되어 있는 「고기」의 아두삼마(阿頭??)라는 표현은 처음 신라인들이 승(僧)이라는 명칭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말이므로, 아두삼마 전체가 승려를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하였다. 아두삼마는 승려의 모습이 아기머리[=阿頭]에다 민수염[=??]이었던 데서 생긴 말이므로, 묵호자와 마찬가지로 승려의 용모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아도(阿道)와 아두(阿頭)를 승명으로 본 『삼국유사』의 관점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도(我道)는 신라불교가 흥성한 뒤에 세워진 「아도본비(我道本碑)」에 있는 말로써, 비에 있는 아도(我道)의 설화는 후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아도(我道)에 대해서는 아도(阿道)와 달리 그 가계나 출가과정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데 전법(傳法)관련 부분에서는 아도(阿道=阿頭??)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아도(我道)의 설화는 새롭게 창작된 것이 아니고 그 때까지 전해지고 있던 전법승에 관한 전설들을 토대로 해서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즉 신라인들은 아도(阿道), 아두삼마라는 막연한 전법승(傳法僧)의 전설을 신라불교 초전자(初傳者) 전설로 재구성함으로써, 아도(我道)라는 하나의 전법성자(傳法聖者)를 옹립해 놓았다는 것이다.(김영태, 1978) 그리고 비슷한 관점에서 모례의 집에 온 묵호자?아도(阿道)?정방(正方)?멸구자(滅垢?)?아도(我道)가 모두 고구려에서 온 승려란 점을 감안하여 그들은 고구려 “아도(阿道)”계 전법승들이었으며, 이 때문에 신라에서는 아도가 아두삼마로 알려졌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고익진, 1989)

아도(阿道)와 아도(我道)를 별개의 실존인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아도(阿道)는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 「고기(古記)」, 고득상의 「영사시(詠史詩)」에 있으며, 아도(我道)는 김용행의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我道本碑)」,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보이는 말이다. 그런데 일연이 아도(阿道) 외에 아도(我道), 아두(阿頭)를 같이 기재하여 아도(我道)와 아두(阿頭)를 동일인인 것처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도화상비」와 『수이전』에 있는 아도이야기는 기록 자체로 모순점이 없는 실전(實傳)이며, 중국문화가 동쪽의 한반도로 전파된 속도와 양상을 고려한다면, 3세기 후반 미추왕대에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아도(我道)의 불교전래가 4세기 후반에 나타난 고구려의 불교전래보다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1세기 무렵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4세기 후반에서야 고구려에 전래되었다면 너무 늦은 감이 있으며, 그보다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가 곧 이를 파기한 조위(曹魏)가 신라로 힘을 뻗쳤을 가능성이 있고 이러한 형세가 신라로의 불교 전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아도(我道)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해동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세기 후반까지 소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윤영옥, 1991)

아도(阿道)를 신라불교의 초전승(初傳僧)으로 본 『삼국유사』의 견해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아도는 여러 문헌에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인물로 등장하며 특정한 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신라전도승의 대명사처럼 쓰였으므로, 그를 반드시 초전승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있는 “이도법사(二道法師)가 소수림왕 갑술년(374)에 고구려에 온 것은 분명하므로”라는 구절에서 이도(二道)가 순도와 아도(阿道)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아도(阿道)를 잘못 쓴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즉 아도의 사적을 논평하는 대목에서 순도를 아울러 거론한 것은 문맥상 이상하며, 소수림왕 갑술년 고구려에 온 승려는 아도(阿道)이기 때문에 이도는 아도(阿道)를 잘못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신종원, 1992)

소지왕대 내전(內殿)에 분수승(焚修僧)이 있었다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사금갑(射琴匣)조의 기록을 토대로 소지왕 이전에 신라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에 따라 여기서는 눌지왕대에 묵호자가, 비처왕(소지왕)대에 아도가 신라에 왔다는 『계림잡전』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였다.(김상현, 1999)

승려들의 행적이 기록된 고려시대의 기록을 두고 아도를 보는 시각이 기록마다 다름에 주목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수이전』·『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삼국유사』에 있는 아도 관련 기록을 놓고 『수이전』은 설화집으로서 주인공의 실제행적보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해동고승전』은 승려들의 전기집이지만 자료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아도의 활동시기에 관한 자료들 상의 차이에 대하여 모두 옛 기록이어서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해동고승전』이 승려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를 통해 한국의 불교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동 승려들의 위대함을 현창함으로서 해동 불교의 훌륭함을 보여주는 위해 편찬된 것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있는 승려 전기 부분은 『해동고승전』을 보완하는 의미가 강하고 자료 선택에 있어 보다 엄격했기 때문에, 아도의 신이한 행적보다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아도의 행적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고 하였다. 즉 『삼국유사』는 승려 개인의 신이한 능력보다는 그들이 신라불교사에서 담당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불교의 관점에서 삼국의 역사를 체계화하고자 한 『삼국유사』의 편찬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최연식, 2007)

참고문헌

이병도, 1976, 「新羅佛敎의 浸透過程과 異次頓殉敎問題의 新考察」『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김영태, 1978, 「新羅 佛敎 初傳者考」『東國大學校 論文集』17.
고익진, 1989, 「三國의 佛敎傳來와 定着」『韓國古代佛敎思想史』, 동국대학교 출판부.
윤영옥, 1991, 「『我道傳』攷」『李箕永博士古稀紀念論叢』.
신종원, 1992, 「新羅佛敎의 傳來와 受容」『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김상현, 1999, 「신라 初傳佛敎의 여러 문제」『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최연식, 2007, 「高麗時代 僧傳의 서술 양상 검토-『수이전(殊異傳)』『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삼국유사(三國遺事)』의 阿道와 圓光전기 비교-」『韓國思想史學』28.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七曰?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敎至?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 ??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 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太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難詳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晉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爲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懼 遂感?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太元末年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아도(阿道)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제4에 이르기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郡)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安置)하였다. 이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주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에서 원표(元表)란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불경?불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군신(君臣)이 그 향(香)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말하기를,‘이는 향이란 것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어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눌지(訥祗)는 진(晉)?송(宋)시대에 해당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서원을 표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예물을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479-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있으면서 경문(經文)과 율법(律法)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주(注)에 이르되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 다르다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축인(西竺人)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曺魏)사람 아(我)[아(我)는 성(姓)이다.]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출생하여 5세에 그의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 나아가 배웠다.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이르기를,‘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개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伽藍)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로, 금교는 서천교(西川橋)이니 속어(俗語)로 잘못하여 솔다리[松橋]라고 한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정미(丁未, 527)에 이르러 처음 열었고, 을묘(乙卯, 535)에 크게 개창(開倉)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興輪寺)와 동시에 개창하였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黃龍寺)이다. 진흥왕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으로서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伽藍)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르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東)으로 향하리라.’하였다.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우거(寓居)하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재위 262-284)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란 이름을 모르고 아두삼마(阿頭??)라 하였다. 삼마(??)는 향언(鄕言)으로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지났을 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의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사가 급히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빈도(貧道)는 백에 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천경림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고 거주하면서 강연(講演)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거주하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국인(國人)들이 법사를 해하려하여 법사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제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즉위하여 불교[釋氏]를 일으켰는데, 미추왕 계미(癸未)와 252년 떨어졌다. 고도령이 말한 3천여 개월이 들어맞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본다. 양(梁)?당(唐)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여(麗)?제(濟)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376-396)이라고 하였으니 이도(二道, 순도와 아도)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여 년을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이렇지는 않다. 또한 신라의 불교신봉이 이렇게 심하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에 들어온 갑술년보다도 100여 년 전이 된다. 그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설령 잠시 일어났다가 곧 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을까. 하나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을까. 생각컨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형세가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고 지목한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釋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의 두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구나 아도의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그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다 잘못하였으므로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며,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칭한 것은 거짓인 듯 하나 자세하지 않다. 또 북위[元魏] 석담시(釋曇始)[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담시는 관중(關中)사람으로 출가한 뒤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佛道)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405-418)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를 개도(開導)하였다.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진나라 말기에 삭방(朔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격파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이때에 담시도 화(禍)를 만났으나 칼이 해하지 못하니 발발(勃勃)이 탄식하여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몰래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 재위 423-452)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서 위엄을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지위가 보(輔)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기를, ‘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에 유해하다.’고 하여 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년에 담시가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번 참하되 상하지 아니하므로 탁발도가 스스로 그를 참하였으나 역시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주었더니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리었다. 탁발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 문족(門族)을 죽이고 국내에 선언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의 후에 끝난 바는 알 수 없었다. 논하여 말한다. 담시가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머무른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에 기록이 없으리오. 담시는 이미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명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의심된다. 찬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遣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 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 俄而不知所歸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 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按我道本碑云 我道高麗人也 母高道寧 正始間 曹魏人我[姓我也]?摩奉使句麗 私之而還 因而有娠 師生五歲 其母令出家 年十六歸魏 省覲?摩 <投>玄彰和尙講下就業 年十九又歸寧於母 母謂曰 此國于今不知佛法 爾後三千餘月 鷄林有聖王出 大興佛敎 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 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 金橋謂西川之橋 俗訛呼云松橋也 寺自我道始基而中廢 至法興王丁未草創 乙卯大開 眞興王畢成] 二曰三川?[今永興寺 與興輪開同代] 三曰龍宮南[今皇龍寺 眞興王癸酉始開] 四曰龍宮北[今芬皇寺 善德甲午始開] 五曰沙川尾[今靈妙寺 善德王乙未始開] 六曰神遊林[今天王寺 文武王己卯開]七曰?請田[今曇嚴寺] 皆前佛時伽藍之墟 法水長流之地 爾歸彼而播揚大敎 當東嚮於釋祀矣 道?敎至?林 寓止王城西里 今嚴莊寺 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 詣闕請行敎法 世以前所未見爲嫌 至有將殺之者 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祿家 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 ??者乃鄕言之稱僧也 猶言沙彌也] 三年 時 成國公主疾 巫醫不? 勅使四方求醫 師率然赴闕 其疾遂理 王大悅 問其所須 對曰 貧道百無所求 但願創佛寺於天<鏡>林 大興佛敎 奉福邦家爾 王許之 命興工 俗方質儉 編茅葺屋 住而講演 時或天花落地 號興輪寺 毛祿之妹名史氏 投師爲尼 亦於三川? 創寺而居 名永興寺 未幾 <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 驗矣 據此 本記與本碑 二說相戾不同如此 嘗試論之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晋末太元之間 則二道法師 以小獸林甲戌 到高麗明矣 此傳不誤 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 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 雖大聖行止出沒不常 未必皆爾 抑亦新羅奉佛 非晩甚如此 又若在<未>雛之世 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 于時 ?林未有文物禮敎 國號猶未定 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 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設使暫興還廢 何其間寂寥無聞 而尙不識香名哉 一何大後 一何大先 揆夫東漸之勢 必始于麗濟而終乎羅 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 阿道之辭麗抵羅 宜在訥祗之世 又王女救病 皆傳爲阿道之事 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乃指目之辭 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 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 乃阿道危行避諱 而不言名姓故也 蓋國人隨其所聞 以墨胡阿道二名 分作二人爲傳爾 況云阿道儀表似墨胡 則以此可驗其一人也 道寧之序七處 直以創開先後預言之 <兩>傳失之 故今以沙川尾?於五次 三千餘月 未必盡信 <蓋>自訥祗之世 抵乎丁未 无慮一百餘年 若曰一千餘月 則殆幾矣 姓我單名 疑?難詳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 始關中人 自出家已後 多有異迹 晉孝武太元(九)年末 齎經律數十部 往遼東宣化 現授三乘 立以歸戒 盖高麗聞道之始也 義熙初復還關中 開導三輔 始足白於面 雖涉泥水 未嘗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云 晉末 朔方匈奴赫連勃勃 破獲關中 斬戮無數 時始亦遇害 刀不能傷 勃勃嗟嘆之 晉赦沙門 悉皆不殺 始於是潛遁山澤 修頭?行 拓拔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有博陵崔皓 小習左道 猜嫉釋敎 旣位居爲輔 爲燾所信 乃與天師寇謙之說燾 佛敎無益 有傷民利 勸令廢之云云 太平之末 始方知燾將化時至 乃以元會之日 忽杖錫到宮門 燾聞令斬之 屢不傷 燾自斬之亦無傷 飼北園所養虎 亦不敢近 燾大生?懼 遂感?疾 崔寇二人 相次發惡病 燾以過由於彼 於是誅滅二家門族 <宣>下國中 大<弘>佛法 始 後不知所終 議曰 曇始以太元末年到海東 義熙初還關中 則留此十餘年 何東史無文 始旣恢詭不測之人 而與阿道墨胡難? 年事相同 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讚曰 雪擁金橋凍不開 鷄林春色未全廻 可怜靑帝多才思 先著毛郞宅裏梅

아도(阿道)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記)」제4에 이르기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군(郡)사람 모례(毛禮)[혹은 모록(毛祿)이라고 한다.]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안치(安置)하였다. 이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주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에서 원표(元表)란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불경?불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군신(君臣)이 그 향(香)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보고 말하기를,‘이는 향이란 것인데,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어 신성(神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사르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눌지(訥祗)는 진(晉)?송(宋)시대에 해당하니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서원을 표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예물을 주었는데, 조금 있다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또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재위 479-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명과 역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머물다가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명은 남아있으면서 경문(經文)과 율법(律法)을 강독하니 왕왕 신봉자가 있었다.[주(注)에 이르되 「본비(本碑)」 및 모든 전기(傳記)와 다르다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축인(西竺人)이라 하였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아도본비(我道本碑)」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曺魏)사람 아(我)[아(我)는 성(姓)이다.]굴마(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출생하여 5세에 그의 어머니가 출가하게 하였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 나아가 배웠다. 19세에 또 돌아와 어머니를 뵈오니, 어머니가 이르기를,‘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개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聖王)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伽藍)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로, 금교는 서천교(西川橋)이니 속어(俗語)로 잘못하여 솔다리[松橋]라고 한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인데,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정미(丁未, 527)에 이르러 처음 열었고, 을묘(乙卯, 535)에 크게 개창(開倉)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마쳤다.],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다. 흥륜사(興輪寺)와 동시에 개창하였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黃龍寺)이다. 진흥왕 계유(癸酉, 553)에 처음 개창되었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이다.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갑오(甲午, 634)에 처음 개창되었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이다. 선덕왕 을미(乙未, 635)에 처음 개창되었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지금 천왕사(天王寺)이다.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기묘(己卯, 679)에 개창되었다.], 일곱째는 서청전(?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으로서 모두 전불(前佛) 시대의 가람(伽藍)터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르던 땅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東)으로 향하리라.’하였다.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우거(寓居)하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고, 때는 미추왕(未雛王, 재위 262-284)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대궐에 들어가서 교법을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록(祿)은 예(禮)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승(僧)이란 이름을 모르고 아두삼마(阿頭??)라 하였다. 삼마(??)는 향언(鄕言)으로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지났을 때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의 효험이 없자,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사가 급히 대궐에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대답하기를,‘빈도(貧道)는 백에 구하는 바가 없고, 다만 천경림에 불사(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고 거주하면서 강연(講演)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 그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거주하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국인(國人)들이 법사를 해하려하여 법사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불교 또한 폐지되었다. 제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 재위 514-540)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즉위하여 불교[釋氏]를 일으켰는데, 미추왕 계미(癸未)와 252년 떨어졌다. 고도령이 말한 3천여 개월이 들어맞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이를 한 번 시론해본다. 양(梁)?당(唐)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여(麗)?제(濟)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 태원(太元) 연간(376-396)이라고 하였으니 이도(二道, 순도와 아도)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이 분명하므로 이 전(傳)은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여 년을 있다가 온 것이 된다.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거지와 출몰(出沒)이 비상(非常)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모두 이렇지는 않다. 또한 신라의 불교신봉이 이렇게 심하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고구려에 들어온 갑술년보다도 100여 년 전이 된다. 그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文物)과 예교(禮敎)도 없었고, 국호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교를 받들자고 청하였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오지 않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 불합리하다. 설령 잠시 일어났다가 곧 폐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사이에 적막하여 소문이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였을까. 하나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을까. 생각컨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는 형세가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즉, 눌지왕대는 소수림왕대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진짜 이름이 아니고 지목한 말일 것이다. 마치 양나라 사람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釋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다. 즉 아도가 위태로운 일을 하느라 이름을 숨겨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마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아도의 두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구분하여 전한 것이다. 더구나 아도의 모양과 행동이 묵호자와 같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그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든 것은 곧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전(傳)이 다 잘못하였으므로 이제 사천미를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며,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지왕 때로부터 (법흥왕)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백여 년이 되므로 1천여 월이라고 하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칭한 것은 거짓인 듯 하나 자세하지 않다. 또 북위[元魏] 석담시(釋曇始)[혜시(惠始)라고도 한다.]전(傳)을 살펴보면,“담시는 관중(關中)사람으로 출가한 뒤 특이한 행적이 많았다. 진(晉) 효무제(孝武帝, 재위 372-396)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三乘)을 가르쳐 곧 귀계(歸戒)하게 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고구려가 불도(佛道)를 듣게 된 시초였다. 의희(義熙, 405-418)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삼보(三輔)를 개도(開導)하였다.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진흙물을 건너도 조금도 젖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진나라 말기에 삭방(朔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을 격파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이때에 담시도 화(禍)를 만났으나 칼이 해하지 못하니 발발(勃勃)이 탄식하여 널리 사문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가 이에 몰래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의 행(行)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 재위 423-452)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관중과 낙양에서 위엄을 떨쳤다. 그때 박릉(博陵)에 최호(崔皓)란 자가 있어 좌도(左道, 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이미 지위가 보(輔)가 되어 탁발도의 신임을 얻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설득하기를, ‘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에 유해하다.’고 하여 폐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년에 담시가 바야흐로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이에 원회(元會)일에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번 참하되 상하지 아니하므로 탁발도가 스스로 그를 참하였으나 역시 상하지 않았다. 북원(北園)에 기르고 있는 호랑이에게 주었더니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더니 드디어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리었다. 탁발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이라고 하여 이에 두 집 문족(門族)을 죽이고 국내에 선언하여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담시의 후에 끝난 바는 알 수 없었다. 논하여 말한다. 담시가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면 이곳에 머무른 것이 10여 년인데, 어찌 동국의 역사에 기록이 없으리오. 담시는 이미 괴이하기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아도, 묵호자, 난타와 연대와 사적이 서로 같으니, 세 명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으로 의심된다. 찬한다. 금교에 쌓인 눈 아직 녹지 않았고, 계림에 봄빛이 돌아오지 않았을 제, 어여쁘다. 봄의 신은 재주도 많아, 모랑댁(毛郞宅) 매화꽃 먼저 피게 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