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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함

기본정보

신라의 승려로,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모셔진 10명의 성인 중 한 사람
생몰년 : 579(?)-640

일반정보

안함(安含)은 신라의 승려로, 아도(我道), 염촉(??), 혜숙(惠宿), 의상(義湘) 등과 함께 흥륜사(興輪寺) 금당의 동쪽 벽에 소상으로 안치되어 10성(十聖)으로 추앙되던 인물이었다. 안함 관련 기록은 이 외에 『해동고승전』에만 전하는데, 속성은 김씨이고 진평왕(眞平王)대에 중국에 갔다가 서역의 호승(胡僧)과 함께 돌아와 참서(讖書)를 지었으며, 선덕왕(善德王) 9년(640)에 입적했다고 한다.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대에 활동하며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지었다는 안홍(安弘)과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전문정보

안함(安含)은 신라의 승려로, 『삼국유사』 권3 흥법3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조에 흥륜사의 금당에 모셔진 10명의 성인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함은 아도(我道), 염촉(??), 혜숙(惠宿), 의상(義湘)과 함께 동쪽 벽에 앉아 경향(庚向) 즉 서쪽을 향해 소상(塑像)으로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서쪽 벽에 앉아 갑향(甲向) 즉 동쪽을 향해 안치되어 있던 인물은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었다. 10성으로 모셔졌던 이들은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였으며, 당시 숭앙받던 성사(聖師)였기 때문에 나라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던 흥륜사에 그 소상을 봉안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김영태, 1987) 따라서 이 중 한 명이었던 안함 또한 신라 불교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10성에 포함된 다른 승려들과는 달리, 『삼국유사』에 안함과 관련된 다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해동고승전』 권2에 안함전이 입전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해동고승전』은 안함을 진흥왕대 수(隋)나라에 다녀오면서 불경 및 사리를 바쳤다는 안홍(安弘)과 동일 인물로 이해하고 안함과 안홍(安弘)의 기록을 합해 안함전을 만들었다. 안홍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576)조에서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經)』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고 하는 인물이다.

『해동고승전』의 안함 관련 내용은 조금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즉, 1) 먼저 안함의 출자와 중국에 다녀온 행적에 대해 기록하고, 2) 다음으로 최치원의 「의상전(義相傳)」과 「신라본기(新羅本記)」의 안홍법사 관련 내용을 인용하여 안함과 안홍이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한 후, 3) 다시 안함이 신라로 돌아와 참서를 지었다는 사실과 선덕왕(善德王) 9년(640) 입적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4) 마지막으로 한림(翰林) 설모씨가 왕명을 받들어 찬했다는 안함의 비명(碑銘) 내용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 중 먼저 안함과 관련된 사실을 기록한 1)과 3)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승려 안함은 속성이 김씨이고, 시부(詩賦) 이찬(伊?)의 손(孫)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도리를 깨달았고, 성품이 맑고 허심탄회하였다. 의지가 굳고 깊으며, 아름다운 도량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일찍부터 마음대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에 뜻을 두어, 풍속을 살펴보고 널리 교화하였다. 진평왕 22년(600)에 고승 혜숙(惠宿)과 도반(道伴)이 되기를 약속하고, 뗏목을 타고 이포진(泥浦津)으로 가는 도중, 섭도(涉島)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다음해에 교지를 내려 법기(法器)를 이룰만한 자를 뽑아 중국에 파견하여 학문을 닦도록 하였는데, 이 때 안함이 명을 받아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에 교빙하는 사신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는데, 중국의 천왕(天王)이 불러 친히 보고 크게 기뻐하며 칙명으로 대흥성사(大興聖寺)에 머물게 하였다. 안함은 짧은 시간 안에 깊은 뜻을 환히 깨닫고 5년 동안 십승(十乘)의 비법과 현의(玄義)의 진실한 문장을 두루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후 진평왕 27년(605)에 우전(于?)의 사문 비마진제(毘摩眞諦)와 농가타(農加陀) 등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으니, 서역의 호승(胡僧)이 직접 계림(鷄林)으로 온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고 한다.(이상 1)의 내용)

화상은 나라로 돌아온 뒤 참서(讖書) 한 권을 지었는데, 그 글자가 흩어져 있어 만든 사람을 알기 어렵고, 그 종지가 깊이 숨겨져 있어 이치를 찾는 사람이 연구하기 어려웠다. 또한 첫 번째 여자 임금(女主)을 도리천(?利天)에 장사지냈다는 것(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를 말함)과 천리 밖에서 전쟁하던 군사가 패했다는 것,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이루어졌다는 사실 및 왕자가 고국으로 돌아온 해(김인문이 귀국한 해를 말함), 대군(大君)이 성명(盛明)한 해(신라의 통일전쟁 종결 시점을 말함)를 언급하였다. 이는 모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예언한 것이었는데, 마치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안함은 선덕왕(善德王) 9년(640) 9월 23일에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였는데 향년 62세였다. 이 달에 나라의 사신이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다가 우연히 법사를 만났는데, 푸른 물결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기쁘게 서쪽으로 향해 갔다고 하였다.(이상 3)의 내용)

그리고 4) 한림(翰林) 설모씨가 왕명을 받들어 찬했다는 비명에는 “황후를 도리천에 장사지내고, 천왕사(天王寺)를 세웠다. 괴상한 새가 밤에 울고 군사들이 아침에 죽었다. 왕자가 관문을 건너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5년 동안 외지에 있다가 30세에 돌아오니, 뜨고 잠기는 윤전(輪轉)을 피아(彼我)가 어찌 면하겠는가. 나이 62세에 만선에서 입적함에, 사신이 바닷길로 돌아오다가 스님을 만나니 물 위에 단정히 앉아 서쪽을 향해 가더라.”라고 했다고 한다. 세주에서는 이 비문에 이끼가 끼어 10여 자가 결락되었고 4-5자는 없어져서 대략 볼 수 있는 것만을 취하여 짐작으로 문장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한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相傳)」에 붙어 있는 세주에서는 “북천축(北天竺) 오장국(烏?國) 비마라진체(毗摩羅眞諦)의 나이는 44세, 농가타(農加陀)의 나이는 46세, 마두라국(摩豆羅國) 불타승가(佛陀僧伽)의 나이는 46세였다. 52국을 경유하여 비로소 중국에 갔다가 드디어 해동으로 와서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해 내니, 신라의 승려 담화(曇和)가 받아썼다. 얼마 지나 중국 승려들이 표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왕이 허락하여 돌려보냈다.”라고 하였다.

이들 내용을 정리하면, 안함은 진평왕 원년(579)에 태어나 진평왕 23년(601)부터 27년(605)까지 중국에 머물렀으며, 이후 서역의 승려들과 함께 신라로 돌아왔다. 함께 들어온 서역 승려들은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였다. 안함은 참서(讖書) 한 권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신라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예언되어 있었다. 선덕왕(善德王) 9년(640) 9월 23일에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였는데 향년 62세였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해동고승전』에서는 안함과 안홍을 같은 인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相傳)」에 기록된 안홍법사(安弘法師)의 사적과 「신라본기(新羅本記)」 진흥왕(眞興王) 37년(576)조에 보이는 안홍 관련 내용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안홍이 활동했다는 진흥왕대와 안함이 활동했다는 진평왕대는 거의 50여 년의 격차가 있어서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나, 그 이름이 서로 비슷하고 그들이 중국의 승려와 함께 신라에 들어왔다는 활동 내역이 똑같으므로 안홍과 안함이 같은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찬(讚)에서도 글자는 세 번 옮겨 적으면 까마귀 “오(烏)”자가 말 “마(馬)”자로 될 수 있으며, 따라서 “함(含)”과 “홍(弘)” 두 글자 중 하나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근래에도 안함과 안홍을 동일 인물로 이해한 견해가 나온 바 있다. 즉 『해동고승전』의 인용문에서 보듯 진평왕대의 안함과 안홍은 그 사적이 온전히 같아 이들을 별개의 인물로 봐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안함과 안홍이 혼동되어 쓰인 이유는 안홍 비문이 세주에서 언급되었듯이 『해동고승전』 찬술 당시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마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였다.(신종원, 1998)

그러나 안함과 안홍을 같은 인물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의견도 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576)조에는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經)』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는 내용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안함은 이보다 늦은 진평왕 23년(601)에야 중국으로 갔다고 하므로 그 연대 차이가 확실하다. 또 『삼국유사』에서는 권1 기이1 마한(馬韓)조와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조에서 안홍(安弘)이 지었다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인용했음에도, 안함과 안홍이 동일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한 언급이나 이들에 대한 전기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도 두 인물을 동일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村上四男, 1994)

참고문헌

김영태, 1987, 「新羅 十聖攷 -興輪寺金堂의 塑像安置와 그 思想性-」『新羅佛敎硏究』, 민족문화사.
村上四男, 1994, 「東京興輪寺金堂十聖」『三國遺事考?』(下之一), ?書房.
신종원, 1998, 「‘동도성립기’의 저자, 안홍(安弘)」『신라 최초의 고승들』, 민족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흥법3 금경흥륜사금당십성)
東京興輪寺金堂十聖
東壁 坐庚向泥塑 我道 <厭>? 惠宿 安含 義湘 西壁 坐甲向泥塑 表訓 <蛇>巴 元曉 惠空 慈藏

동경흥륜사 금당의 10성인
동벽에 앉아 서쪽을 향한 소상은 아도(我道)·염촉(厭?)·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요, 서벽에 앉아 동쪽을 향한 소상은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