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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해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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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

기본정보

북부여를 세운 왕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에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북부여(北夫餘)를 세운 왕.

전문정보

해모수(解慕漱)는 북부여(北夫餘)를 세운 인물로 『삼국유사』 기이(紀異)1 북부여(北扶餘)조를 통해 “「고기(古記)」에 전한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기원전 58년) 4월 8일에 천제자(天帝子)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였다.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고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으며, 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기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이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으며,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에 도읍을 옮기고, 동명제가 나라를 세운 후에는 졸본부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모수는 해부루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기이1 동부여(東夫餘)조에서는 해모수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왕조의 해모수의 기록은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鴨邊室中私之 卽往不返)”라 하여 유화와 사통한 인물이자, 주몽의 아버지로 나타나있어 『삼국유사』 기록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해모수와 하백녀 유화의 결합은 단군신화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천지부모형(天地父母型)신화이다. 이 천지부모형 신화는 부계(父系)의 신성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부계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신화라고 볼 수 있다.(이병도, 1976)

또한 『삼국유사』 권1 기이1 북부여조는 해모수의 아들로 해부루가 언급되지만,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동명왕조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는 해부루의 출자에 대해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하여,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본래 해모수와 해부루가실제상에 부자가 아니라 다같이 부여족의 일파였지만 출자를 달리하는 집단의 족장(族長)으로 보인다. 해부루 집단은 북부여지역에 선주한 집단으로 천손족(天孫族)적 전통을 지니고 있었으며, 비류수(沸流水)를 중심으로 북부여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반면에 해모수 집단은 해부루 집단보다 늦게 이동해 온 집단으로 웅심산을 근거지로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철기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해모수 집단은 점차 그 세력을 증대 시켜 해부루 집단에 대신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들의 세력교체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해모수 집단은 우월성을 가지고, 해부루 집단과의 관계를 새로이 조절해야했으며, 이러한 조절과정에서 양집단이 혈연적인 관계로 결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노중국, 1983)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노중국, 1983, 「東扶餘에 關한 몇가지 問題에 대하여」『韓國學論集』1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북부여)
北扶餘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見下]
북부여
「고기(古記)」에 의하면 전한서(前漢書)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기원전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지경에 있다]에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였는데, 해(解)로써 씨(氏)를 삼았다. 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기었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北扶餘)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하였으니, 즉 고구려(高句麗)의 시작이다.[아래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