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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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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

기본정보

동부여의 왕
생몰년 : ?-22

일반정보

동부여의 왕으로서 금와(金蛙)의 장자였다. 대소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전문정보]


대소는 동부여의 왕으로서 금와(金蛙)의 장자였다. 처음에 주몽(朱蒙)을 해치려 하다가 실패하고, 뒤에 금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대소는 유리왕 14년(기원전 6) 고구려에 인질을 교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5만 군사로 고구려로 쳐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유리왕 28년(기원후 9) 대소는 고구려에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으나, 고구려의 왕자 무휼(無恤)이 대소가 지난날 주몽(朱蒙)을 해치려 하였음을 들며 대소의 잘못을 따져 이를 물리쳤다. 유리왕 32년(13) 부여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으나 무휼이 이를 격파했다.

무휼이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으로 즉위한 후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20)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해서 붉은 색이 되었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겸하여 차지할 것입니다.’ 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니 대답하였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이 얻어서는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이것은 그 때까지 부여와 비교해서 열세에 있었던 고구려가 힘을 길러 부여를 격파할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인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음 해인 대무신왕 5년(22) 2월에는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의 괴유(怪由)에게 죽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22)조에 따르면 대소가 죽은 뒤 이 해 4월에 금와왕의 막내아들인 그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는데 이것을 갈사국(曷思國)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동부여)
東扶餘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 天帝降而謂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 東海之濱 有地名迦葉原 土壤膏? 宜立王都 阿蘭弗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夫婁老無子 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至鯤淵 見大石相對<淚>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爲太子 夫婁薨 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 至地皇三年壬午 高麗王無恤伐之 殺王帶素 國除
동부여
북부여(北扶餘)왕 해부루(解夫婁)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해가거라.[동명(東明)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이른다.]동해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하다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니,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부루(夫婁)가 늙고 아들이 없어서 하루는 산천에 제사지내 후사를 구하였다. 탔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고 하고, 이에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자라자 태자(太子)로 삼고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는 자리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壬午)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이를 쳐서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전문정보

대소는 동부여의 왕으로서 금와(金蛙)의 장자였다. 처음에 주몽(朱蒙)을 해치려 하다가 실패하고, 뒤에 금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대소는 유리왕 14년(기원전 6) 고구려에 인질을 교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5만 군사로 고구려로 쳐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유리왕 28년(기원후 9) 대소는 고구려에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으나, 고구려의 왕자 무휼(無恤)이 대소가 지난날 주몽(朱蒙)을 해치려 하였음을 들며 대소의 잘못을 따져 이를 물리쳤다. 유리왕 32년(13) 부여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으나 무휼이 이를 격파했다.

무휼이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으로 즉위한 후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20)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해서 붉은 색이 되었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겸하여 차지할 것입니다.’ 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니 대답하였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이 얻어서는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이것은 그 때까지 부여와 비교해서 열세에 있었던 고구려가 힘을 길러 부여를 격파할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인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음 해인 대무신왕 5년(22) 2월에는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의 괴유(怪由)에게 죽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22)조에 따르면 대소가 죽은 뒤 이 해 4월에 금와왕의 막내아들인 그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는데 이것을 갈사국(曷思國)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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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동부여)
東扶餘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 天帝降而謂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 東海之濱 有地名迦葉原 土壤膏? 宜立王都 阿蘭弗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夫婁老無子 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至鯤淵 見大石相對<淚>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爲太子 夫婁薨 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 至地皇三年壬午 高麗王無恤伐之 殺王帶素 國除
동부여
북부여(北扶餘)왕 해부루(解夫婁)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해가거라.[동명(東明)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이른다.]동해의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 만하다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니,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부루(夫婁)가 늙고 아들이 없어서 하루는 산천에 제사지내 후사를 구하였다. 탔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고 하고, 이에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자라자 태자(太子)로 삼고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는 자리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壬午)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이를 쳐서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