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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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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

기본정보

신라의 시조.
생몰년: 기원전 69-기원후 4
재위기간: 기원전 57-기원후 4

일반정보

혁거세왕이라는 말은 불구내왕(弗矩內王)으로도 쓰는데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는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4월에 즉위하여 왕호를 거서간이라고 하고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혁거세왕은 박씨(朴氏)로,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박”을 성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 기록이 있다. 즉 6부 시조들과 자제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가 없는 것을 탄식하며 알천가에 모여 의논하였더니 양산(梁山) 아래 나정(蘿井) 곁에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큰 알을 얻어 그것을 쪼개어 본 즉 한 사내아이가 나왔고, 그를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혁거세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가더니 7일 후에 그 유해가 땅에 흩어졌는데, 이를 나라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유해를 각각 오릉에 장사하고 그 이름을 사릉(蛇陵)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는 혁거세의 탄생설화를 싣고 있다. 신라 6부(六部)의 조상들이 자기들에게 임금을 내려주기를 하늘에 청하였는데, 양산(楊山) 나정(蘿井)곁에서 알 1개가 발견되어 거기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가 곧 혁거세왕인데 성은 박(朴)씨, 왕호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하였다.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아 61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가고 그 몸뚱이들을 오릉(五陵)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기록을 읽다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나오고, 기록 자체의 전후 모순도 다수 발견된다. 따라서 일본학계에서는 신라의 초기기록 전체를 허구 내지 조작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료의 한계만을 들어 도외시한다면 신라 초기사는 언제까지나 공백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자료의 한계를 무시하고 섣불리 접근하려 한다면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초기사 해명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초기기록의 자료적 한계를 염두에 두면서 기왕의 극단적 불신론이 제기한 의문점들에 대해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대표적인 부분들을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즉 ① 혁거세의 즉위가 갑자(甲子)로부터 시작될 뿐 아니라 그 재위 또한 일주갑(一周甲)이 된다는 점(이는 실질적인 석씨계(昔氏系) 첫 왕으로 보이는 벌휴이사금의 경우도 그러하다) ② 유리(儒理)-일성(逸聖)간, 구도(仇道)-나물(奈勿)간, 우로(于老)-흘해(訖解)간, 미추(味鄒)-나물(奈勿)간 기년의 신장(伸長) 가능성 ③ 탈해(脫解)대 등장하는 알지(閼智)와 구도(仇道)간의 세대수가 다른 성씨에 비해 너무 많다는 점 등이다.

이에 대한 초기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세계(世系)의 순서를 변경하거나 재위한 왕의 수를 줄임으로써 기년의 인하를 추구했다. 즉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순차적으로 되어 있는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세계를 본래 병렬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기년이 상승된 이유에 대해서는 부족연맹을 이루고 있던 당시에는 실제로 연맹장인 이사금에 선출되지 못하고 자기 부족의 족장에 그친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대에 이들도 이사금이었던 것처럼 인식되어 이사금의 대수가 늘어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후대 사서 편찬 과정에서 나물 이후에도 그대로 계속되는 김씨세계와 나물 직전까지 이사금들이 나왔던 석씨세계는 기년상의 위치를 비교적 원상태로 두고, 석, 김과 병렬적이었던 박씨세계만을 석씨세계 이전으로 올려놓음으로써 전반적인 기년의 인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3성 세계(世系)를 병렬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실제 이사금이 아니었던 인물들을 왕계에서 제외시킨다면 기년이 사실과 가깝게 인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결국 신라의 건국시기는 3세기정도로 이해된다.(김철준, 1975)

이후 기년의 조정을 위해 세계 자체를 무리하게 이동시키지 않고 일단 박, 석, 김 3성세력의 계기적 계승을 사실로 인정하고 출발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박씨세계 속에 끼어 있는 탈해와 석씨세계 속에 들어있는 미추의 경우에 대해서는 세계상의 위치를 의심하였다. 이에 탈해와 벌휴(伐休) 양자를 왕계에서 제외하고, 미추의 왕계상의 위치를 내물 직전으로 끌어내림으로써 기년의 인하를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기년조정의 근거가 된 것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20년조의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하였다.(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라는 기록이다. 이 때의 비미호가 대략 240년대를 전후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비미호가 신라에 견사(遣使)한 시기도 이 때를 크게 벗어나지 않다고 추정하여 아달라이사금 20년(173)의 시기를 70여년 내려보아야 한다고 보았다.(김광수, 1973)

그러나 이렇게 세계의 순서를 변경하거나 재위한 왕의 수를 줄이는 방식은 그 근거가 명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이러한 방식을 배제하고 초기기록의 왕실계보나 왕의 즉위순서 등을 당시의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즉 초기기록에는 착오 내지 의도적 윤색이 있을 수 있지만 지배층의 친족계보나 그들의 동향 등은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최우선적으로 기억, 전승되어야 할 관심사였을 것이므로 세계의 조작이 결코 쉽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계보상의 등장인물의 출생시기를 추적하는 방법을 통하여 기년의 인상정도를 확인하는 방식을 택하였는데, 주로 눌지의 모계(母系)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탈해시기의 실제기년의 상한은 250년대 이후였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벌휴를 비롯한 석씨계 이사금의 재위시기는 4세기 전반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으며, 김씨 나물의 즉위시기도 『삼국사기』의 기년보다 20여년 하향되는 380년 전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아울러 3세기 후반은 첨해, 미추, 유례, 기림, 흘해, 나물의 재위시기가 몰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강종훈, 2000)

한편 기년의 조정에 있어서는 앞서의 연구들과 동일하지만 신라 왕실계보 자체를 이원화 한 경우도 있다. 곧 유리가 229년에 즉위한다고 보고 파사-지마-일성-아달라까지를 박씨왕실로, 탈해는 262년에 즉위한다고 보아 벌휴-나해-조분-첨해-유례-기림-흘해까지를 병립했던 석씨왕실로 본 것이다. 이후 박씨왕실은 356년에 끝나는 아달라 이후 미추부터 시작되는 김씨왕실로 넘어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라의 초기왕실계보를 229년부터 356년까지의 박씨왕실과 356년부터 이를 계승하는 김씨왕실, 이와는 별개로 262년부터 438년까지 병립했던 석씨왕실로 완전히 이원화하였다.(선석열, 2001)

이상의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삼국사기』의 신라 초기기록에 대한 신뢰를 기본으로 한다. 즉 이전 사료에 대한 충분한 반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기존 일본학계의 연구경향인 신라 초기사에 대한 불신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혁거세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내용은 “신화”의 범주에 해당된다. 신화의 유형은 크게 천강신화(天降神話)와 난생신화(卵生神話)로 나뉜다. 천강신화란 특정한 종족, 가계의 시조, 또는 특정한 신화적 인물이 천신의 자손으로서 하늘에서 인간계에 하강한 형식을 말한다. 난생신화란 특정한 종족 가계의 시조 또는 특정한 신화적 인물이 천신(天神)의 개입없이 알이나 또는 알과 같은 모양의 것에서 출생한 형식을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의 신화는 그 분포권이 다른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즉 전자는 북방 유목 민족에게 흔히 보이는 반면 후자는 중국 화남지역, 타이완,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남방 민족에게서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을 근거로 우리나라의 신화에 대한 초기의 연구에서는 부여?고구려 등 북방의 신화는 천강신화, 신라?가야 등 남방의 신화는 난생신화로 구별하여 보기도 하였다.(三品彰英, 1971; 김재붕, 1971) 이렇듯 북방과 남방신화로 이분화하여 보는 견해에서는 천강, 난생이라는 기준으로 구별하는 것 이외에 내용상으로도 이를 나누고 있다. 즉 ① 북방신화에서는 시조의 출생 이전에 시조의 부모가 먼저 등장하고 부모의 결혼과정이 나타나지만 남방신화에서는 시조의 부모는 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조의 탄강이 먼저 기술되고 이어서 시조의 즉위와 시조의 결혼이 나타난다는 점 ② 북방신화에서는 시조의 즉위과정에 있어 전대(前代) 왕을 계승하거나 전대(前代) 왕국에서 분열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를 쟁취하는 성격을 보이는 반면, 남방신화에서는 촌장이나 추장의 합의로 왕을 추대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 등이 다르다고 한다.(서대석, 2001)

그러나 부여와 고구려의 신화도 난생신화의 요소가 있으며 신라와 가야의 신화도 천강신화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천강신화의 요소만 있는 것은 단군신화 뿐이므로, 천강과 난생신화로 나뉘는 것은 북방, 남방이라는 지역적인 차이가 아니라 시대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천강신화적 요소가 시기가 앞서고 난생신화적 요소가 시기가 늦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신라 6부인들의 조상들이 모두 천강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증명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데, 알천 양산촌장 알평은 표암봉에,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는 형산에,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는 이산에,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는 화산에, 금산 가리촌장 지타는 명활산에,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은 금강산에 내려왔다. 그러나 이후 나타나는 혁거세신화는 난생적 요소도 함께 갖추고 있으므로, 이는 보다 발전된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것이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최광식, 2007)

신라의 건국신화는 혁거세신화가 그 주를 이루며 이에 알영신화가 결합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대체로 천신족(天神族)과 지신족(地神族)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혁거세족은 이주한 유이민으로서 천신족 관념을 포용하고 있는데, 하늘로부터 나정(蘿井) 가에 이상한 기운이 내려와 혁거세를 탄생시켰고, 그 징후로 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편 알영족은 선주한 토착민으로서 지신족 관념을 포용하고 있다. 우물에서 계룡(鷄龍)의 몸을 빌어 태어나고 있음이 이를 알려준다. 대체로 지신족 계통의 신인(神人)이나 선조(先祖)는 강변, 연못, 우물 등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김두진, 1999)

이 때의 말과 닭에 대해 신라의 발전과정을 원시적인 단계로 보아 토템적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혁거세족을 말토템을 가진 집단으로, 알영족을 닭토템을 가진 집단으로 보는 것이다.(김철준, 1975) 그러나 말의 경우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으로, 말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신라의 말무늬토기, 말모양토기와 함께 신라 지배층의 문화적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토템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메신저 정도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최광식, 2007)

한편 혁거세를 천신으로 뿐만 아니라 농업신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도 보는데, 이는 그가 스스로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을 칭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혁거세왕) 이 때 알지의 “알(閼)”은 곡식의 알을 말하고 “지(智)”는 존칭어미로서 해석되어 이는 곡령(穀靈)을 말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에 혁거세는 불구내왕(弗矩內王)으로서 광명적 성격을 가진 천신의 대리자이면서 신라 사회의 농업 생산의 풍요를 책임지는 존재로도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三品彰英, 1975) 이러한 성격은 그의 탄강(誕降) 및 죽음과 관련하여서도 드러나는데, 먼저 그가 삼월 초하루, 농경이 시작되는 시기에 탄강(誕降)하였다는 사실과 그 위치가 나정이라는 우물 옆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즉 농경이 시작되는 시기에 6부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농경의례와 관련있으면서 혁거세를 농경생산신으로 인식하였음을 말하는 것이고, 우물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결국 농업 생산의 풍요와 관련있다는 것이다.(서대석, 2001) 아울러 그의 죽음과 관련해, 신이나 영웅, 왕들의 유해가 절단되고, 그것이 여기저기 뿌려져 각기 다른 장소에 매장되었다는 신화는 대지의 풍요와 인간이나 가축의 다산을 보증하기 위한 관습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혁거세 신화 또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나희라, 2003)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1,『建國神話の諸問題』, 平凡社.
김재붕, 1971,「卵生神話의 分布圈」『한국문화인류학』4.
김광수, 1973,「新羅 上古世系의 再構成 試圖」『동양학』3.
三品彰英, 1975,『古代祭政と穀靈信仰』, 平凡社.
김철준, 1975,『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김두진, 1999,『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일조각.
강종훈, 2000,『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출판부.
선석열, 2001,『新羅國家成立過程硏究』, 혜안.
서대석, 2001,『한국신화의 연구』, 집문당.
나희라, 2003,『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최광식, 2007,『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학교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一 赫居世 [姓朴 卵生 年十三 甲子卽位 理六十年 <妃>娥伊英娥英 國號徐羅伐 又徐伐 或斯(盧) 或鷄林 (一)說 <至>脫解王時 始置鷄林之號] 甲申 築金城
제1 혁거세 [성은 박씨이고 알에서 태어났다. 나이가 13살이 되던 갑자에 즉위하여 60년간 다스렸다. 비는 아이영 혹은 아영이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 또는 서벌, 사로, 계림이라고 하는데, 일설에는 탈해왕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계림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갑신에 금성을 쌓았다.

第二 南解次次雄 [父赫居世 母閼英 姓朴氏 妃雲帝夫人 甲子立 理二十年 此王位亦云居西干]
제2 남해차차웅 [아버지는 혁거세이고 어머니는 알영이다. 성은 박씨이고 비는 운제부인이다. 갑자에 왕위에 올라 20년간 다스렸다. 이 왕위는 또한 거서간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新羅始祖 赫居世王
…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 建元三年 等 皆誤]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 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蓋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是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拜之狀 尋?之 有一紫卵[一云 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蓋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 是也 乃至?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 閼智居西干 一起 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是日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 有?龍現 而左脇誕生童女[一云 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 將浴於月城北川 其?撥落 因名其川曰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 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井 故或云?林國 以其?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 得金閼智 而?鳴於林中 乃改國號爲?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신라시조 혁거세왕
... 전한(前漢) 지절 원년(地節) 임자(壬子,기원전69)[옛 책에는 건호(建虎) 원년(25)이라 하고 또는 건원(建元) 3년(기원전 138)이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이다]3월 초하루에 육부(六部)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위로는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방일하여 제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때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곁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전광(電光)과 같이 땅에 비치더니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또는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경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지므로, 따라서 그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하였다.[아마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설명하는 자는 말하길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여 현인을 낳아 나라를 시작하였다”란 말이 있는 것도 이 까닭이라 하였다. 계룡(鷄龍)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닐까] 위호(位號)를 거슬한(居瑟邯)[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말할 때에 스스로 일컬어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부른 것인데, 이로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배필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 날에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혹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여자아이 하나를 탄생하니[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며 그 배를 갈라 여자아이를 얻었다 한다], 자태와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시키니 부리가 떨어졌다. 그 때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궁실을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 창림사(昌林寺)]에 세워 두 성스러운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알은 박과 같았다. 향인(鄕人)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므로 그로 인하여 성(姓)을 박(朴)이라 하였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살이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기원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고,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세간에 경(京)을 훈독하여 서벌(徐伐)이라 이르는 것도 이 까닭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출생한 까닭에 혹은 계림국(鷄林國)이라 하니 계룡이 상서를 나타낸 까닭이었다. 일설에는 탈해(脫解) 때에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때 닭이 숲속에서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 하는데, 후세에 와서 신라(新羅)란 국호를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지 62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그 후 7일만에 유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따라 돌아가셨다 한다. 나라사람들이 합장하고자 하매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이라 하고, 또한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능이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