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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탈해니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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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니질금

기본정보

신라 석씨의 시조.
신라 제4대 왕.
생몰년: ?-80
재위기간: 57-80

일반정보

신라 제4대 왕으로 본래 완하국의 왕 함달파와 적녀국왕의 딸 소생이다. 적녀국왕의 딸이 알을 낳자 그 나라에서 궤에 알과 칠보, 노비를 넣어 바다에 실어 보냈다. 배가 바다를 건너 아진포(阿珍浦)에 이르자 아진의선(阿珍義先)이 거두어 길렀다. 토함산 위에 석총을 쌓고 7일간 머물다가 호공(瓠公)의 집을 꾀로 빼앗아 살았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는 탈해왕이 처음 가락국에 도착하여 가락국의 왕위를 두고 수로왕과 대결을 했는데 이 대결에서 지고 신라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의 성인 석씨(昔氏)는 옛날 자기 집이라고 하며 남의 집을 빼앗은 것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며, 혹은 까치 때문에 그가 있던 궤를 열었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조(鳥)를 떼고 석(昔)을 성으로 하였다고도 한다. 서기 57년에 즉위하여 23년간 다스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왕대에 시림(始林)에서 알지(閼智)를 얻었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조에 의하면 탈해가 들어있는 궤짝이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자 아진의선이 이를 발견하였다. 탈해는 곧 토함산에 석총을 쌓고 살만한 곳을 찾던 중 호공의 집을 발견하고는 호공에게 “이 집은 본래 대장장이였던 우리집이다.”고 하여 그의 집을 빼앗았다. 그의 슬기를 안 남해왕은 딸 아니부인을 탈해에게 아내 삼게 하였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탈해집단은 경주 동해안에 자리 잡고 어업을 주요한 생산 수단으로 하고 있었다고 본다. 또 탈해가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는 중에 야장(冶匠)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철기문화를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김철준, 1975)

여기에 구체적으로 탈해가 호공이라 표현된 기득권세력을 밀어내고 월성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과, 이후에 신라의 왕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탈해로 대표되는 석씨 일족이 당시 상당한 세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세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 “야장”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철산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석씨 일족이 울산방면의 철산지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강종훈, 2000)

한편 탈해가 자신이 야장이었다고 하는 것은 호공을 속이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최광식, 1994)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4탈해왕조에서 탈해가 “토함산에 올라가 석총을 짓고 7일간 머물렀다(登吐含山上 作石塚 留七日)”는 기록은 나중에 탈해가 동악신으로 여겨지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다고 한다. 즉 토함산에서 석총에 7일간 머무른 것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한 기도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7이라는 숫자 또한 단군신화에서 삼칠일 금기하여 곰이 사람이 되는 것과 민속에서 아이를 낳고 삼칠일 금기해야 한다는 것에서 보이듯이 어떤 상징성을 나타낸다고 한다.(최광식, 1994) 또한 이에 더하여 탈해가 석총에 7일간 머무른 것은 샤먼의 ‘입무의례(入巫儀禮)’로 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나희라, 2003)

참고문헌

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김두진, 1986,「新羅 昔脫解神話의 形成基盤; 英雄傳說的 性格을 中心으로」,『韓國學論叢』8.
최광식, 1994,『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나희라, 2003,『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四 脫解[一作吐解]尼叱今 [昔氏 父琓夏國含達婆王 一作花夏國王 母積女國王之女 妃南解王之女阿老夫人 丁巳立 理二十三年 王崩水葬未(召)?井丘中 塑骨安東岳 今東岳大王.]
제4 탈해[혹은 토해]니질금 [석씨이다. 아버지는 완하국 함달파왕으로 혹은 화하국왕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적녀국왕의 딸이고 비는 남해왕의 딸 아로부인이다. 정사년에 즉위하여 23년간 다스렸다. 왕이 죽자 미소의 소정구 중에 수장하였다. 뼈를 빚어 동악에 안치하니 지금의 동악대왕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제4탈해왕)
第四脫解王
脫解齒叱今[一作 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 壬寅年至者 謬矣 近則後於弩?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 有船來泊 其國首露王 與臣民鼓?而迎 將欲留之 而舡乃飛走 至於?林東下西知村阿珍浦[今有上西知下西知村名] 時浦邊有一? 名阿珍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 此海中元無石? 何因鵲集而鳴 拏舡尋之 鵲集一舡上 舡中有一<櫃>子 長二十尺 廣十三尺 曳其船 置於一樹林下 而未知凶乎吉乎 向天而誓爾 俄而乃開見 有端正男子 幷七寶奴婢滿載其中 供給七日 ?言曰 我本龍城國人[亦云 正明國 或云 琓夏國 琓夏或作 花廈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嘗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 自五歲六歲 繼登王位 敎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 然無<揀>擇 皆登大位 時我父王含達婆 ?積女國王女爲妃 久無子<胤> 禱祀求息 七年後 産一大卵 於是大王會問群臣 人而生卵 古今未有 殆非吉祥 乃造<櫃>置我 幷七寶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便有赤龍 護舡而至此矣 言訖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 作石塚 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峰如三日月 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 否 爭訟不決 乃告于官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堀地?看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焉> 時南解王 知脫解是智人 以長公主妻之 是爲阿尼夫人 一日吐解登東岳 廻程次 令白衣索水飮之 白衣汲水 中路先嘗而進 其角盃貼於口不解 因而?之 白衣誓曰 爾後若近遙 不敢先嘗 然後乃解 自此白衣?服 不敢欺罔 今東岳中有一井 俗云 遙乃井 是也 及弩?王崩 以光<武>帝中元<二>年丁巳六月 乃登王位 以昔是吾家取他人家 故因姓昔氏 或云 因鵲開<櫃> 故去鳥字 姓昔氏 解<櫃>脫卵而生 故因名脫解 在位二十三年 建初四年己卯崩 葬?川丘中 後有神詔 愼埋葬我骨 其??周三尺二寸 身骨長九尺七寸 齒凝如一 骨節皆連<鎖> 所謂天下無敵力士之骨 碎爲塑像 安闕內 神又報云 我骨置於東岳 故令安之[一云 崩後 二十七世文<武>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五日辛酉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威猛曰 我是脫解也 拔我骨於?川丘 塑像安於<吐>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祀不絶 卽東岳神也云]
제4탈해왕
탈해이질금(脫解齒叱今)[혹은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함]은 남해왕(南解王)때에 [고본(古本)에 임인년(壬寅年)에 왔다한 것은 잘못이다. 뒤의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보다 뒤질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지 않았을 것이요, 앞의 일이라면 혁거세(赫居世)때 일일 것이니 임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민(臣民)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지금도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라는 마을 이름이 있다] 마침 갯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하니 혁거세의 고기잡이 할미였다.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 본래 바위가 없었는데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배를 끌고 가서 찾아보니 까치가 배위에 모여들고 그 배 가운데 궤(櫃) 하나가 있었는데 길이가 20척(尺), 폭이 13척(尺)이나 되었다. 그 배를 끌어다 수림(樹林)밑에 두고 길흉을 알지 못하여 하늘을 향해 맹세하였다. 조금 있다가 궤를 열어보니 단정한 남자아이와 아울러 칠보(七寶)와 노비가 그 가운데 가득 차 있었다. 7일 동안 대접하였더니, 이에 말하길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또는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혹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은 왜(倭)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28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台)에서 나왔고, 5,6세 때부터 왕위를 이어 만민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올바르게 하였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아서 비(妃)를 삼았더니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할 때, 7년 뒤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대왕이 군신에게 묻되 사람으로서 알을 낳음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이것이 불길할 징조이라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또 칠보와 노비를 배안에 가득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마음대로 인연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왔노라”고 말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동안 머무르면서 성 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 같이 둥근 산봉우리가 있어 지세(地勢)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이에 내려와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묻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에 가서 이것이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호공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여 서로 다투어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거하겠느냐하니, 동자가 말하길, “우리는 본래 대장쟁이었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이 탈해의 슬기있음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었다. 하루는 토해(吐解)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구해오라 하매, 백의가 물을 떠가지고 오다가 도중에 먼저 맛보고 드리려하니 그 물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로인해 꾸짖으니, 백의가 맹세하기를, “이후에는 가깝거나 멀거나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 하니, 그제야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에 우물 하나가 있어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이 돌아가매 광무제(光武帝〕중원中元 2년 정사(丁巳)(57)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옛적 내 집이라 해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혹은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자(鵲字)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성을 석씨라고 했고, 궤를 열고 알에서 벗어져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다. 재위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79)에 돌아가니 소천구(疏川丘)에 장사지냈던바, 그 뒤에 신의 명령이 있어 “ 나의 뼈를 삼가 묻으라” 하였다. 그 구개골의 둘레가 3척 2촌이고, 몸의 뼈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며, 이는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는 모두 연결되어 참으로 천하무적의 역사(力士)다운 골격이었다. 뼈를 부시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내에 모시었더니 신이 또 말하길 내 뼈를 동악에 두라”하므로 모시게 하였다.[혹은 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 27대 문무왕 때인 조로(調露)2년(680) 경진(庚辰) 3월15일 신유(辛酉)밤에 태종(太宗)의 꿈에 매우 사나운 모양의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좇았으므로 지금까지 나라에서 국사가 끊이지 않았으니, 곧 동악신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탈해왕대)
金閼智 脫解王代
永平三年庚申[一云 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 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掛於樹枝 光自?出 亦有白?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 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 不卽王位 因金?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 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영평(永平) 3년 경신(60)[또는 중원(中元) 6년이라고 하는데 잘못이다. 중원은 모두 두 해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을 가고 있는데, 시림 속에서[또는 구림이라고 한다.] 커다란 광명을 보았다. 보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워졌으며, 구름 속에는 금궤짝이 있어 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빛은 궤짝에서부터 나왔으며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상황을 왕에게 알리니 (왕은) 그 숲에 행차하였다. 궤짝을 열자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 있다가 곧 일어서니 혁거세의 옛 일과 같았으므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란 곧 우리말로 어린 아이의 호칭이다. 품에 안고 수레에 태워 궁궐로 돌아가는데, 새와 짐승들이 함께 따라와 기뻐서 날뛰며 춤을 추었다. 왕은 좋은 날을 골라서 태자로 삼게 하였는데, 후에 파사에게 양보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내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낳았고, 아도는 수류를 낳았고, 수류는 욱부를 낳았고, 욱부는 구도[또는 구도라고 한다]를 낳았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