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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나해니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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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니질금

기본정보

신라의 제10대 왕.
생몰년 : ?-230
재위기간 : 196년-230년

일반정보

신라의 제10대 왕으로 성은 석씨이며 벌휴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이고 왕비는 조분왕의 누이동생이다. 재위기간 동안 백제와 빈번한 전투가 있었으며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그 왕명만 확인될 뿐 구체적인 서술이 누락되었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즉위년조에는 그의 즉위에 관하여 “앞 왕의 태자 골정(骨正)과 둘째 아들 이매(伊買)가 먼저 죽었고 맏손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매의 아들을 왕위에 세웠으니, 이가 곧 나해이사금이다(前王太子骨正及第二子伊買 先死 大孫尙幼少 乃立伊買之子 是爲奈解尼師今)”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내례부인이고 왕비는 조분왕의 누이동생이다.

나해이사금대 신라는 백제와는 총 다섯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가 이루어 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나해이사금 4년(199)에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였고, 동왕 19년(214)에는 요차성(腰車城)에 쳐들어와 성주 설부를 살해하였다. 이에 신라는 정예군사 6천으로 반격하여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나해이사금 20년(215)에는 백제가 장산성(獐山城)을 침입하므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격퇴하기도 하였다. 백제는 나해이사금 22년(222)에 우두주(牛頭州)를 침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백제와의 빈번한 전투와는 달리 가야와는 화친을 맺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 14년조에는 “포상의 여덟 나라(浦上八國)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라고 하여 소위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을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나해이사금 14년(209)에 포상의 8국이 모의하여 가라를 침공하자 신라가 그를 도와 8국을 퇴치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상의 8국은 경남 창원-고성-사천 일대의 남해안 지역에 위치했던 변한(弁韓)의 해상국(海上國)들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이 3세기 초 전쟁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낙랑군의 일시적인 쇠퇴와 그로 인해 김해 구야국(狗倻國) 중심의 해상교역체계에 차질이 생기면서 포상 8국이 그에 도전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백승충, 1989)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경남 해안 일대의 “소국(小國)”들은 모두가 외부세력과의 접촉이 용이한 “관문사회(gateway community)”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김해세력이 특별히 해상교역의 이권을 독점할 수 있는 중심적인 조건은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이현혜, 1998)

이에 3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에 주목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방군(帶方郡)-남해안(변한)-구야국(狗倻國)-대마도(對馬島)-왜(倭)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의 중심 거점으로 김해 구야국이 대두하였으며, 남해안의 포상 8국이 그 이권에 도전한 것이 바로 포상 8국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신라의 도움을 받아 포상 8국의 침공을 물리친 구야국은 전쟁 이후 변한을 대표하는 “왕(王)”으로 대두하게 되었다.(박대재, 2006)

참고문헌

백승충, 1989, 「1∼3세기 가야세력의 성격과 그 추이」『부대사학』13.
이현혜, 1998, 『韓國 古代의 생산과 교역』, 일조각.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奈(解)尼叱今
제10대 나해니질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