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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이해니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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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니질금

기본정보

신라의 제12대 왕.
생몰년 : ?-261.
재위기간 : 247-261.

일반정보

신라의 제 12대 왕으로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혹은 점해왕(?解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씨이며 골정(骨正)의 아들로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와과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이다.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으며, 남당(南堂)을 설치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서는 점해왕(?解王)이라고도 하였고,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에서는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라고 하였다. 성은 석씨로 조분이사금의 동모제(同母弟)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골정(骨正)이고, 어머니는 옥모부인(玉帽夫人)이 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첨해이사금 원년조에 따르면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에 봉하였다.

『삼국유사』 권1 왕력편의 “처음으로 고구려와 사신을 교환하였다(始與高句麗通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첨해이사금 2년(248)조에서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遣使高句麗結和)”라고 하여 양 사서의 기록이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영서맥(領西貊)” 세력으로 추정하고 신라가 영서지역을 경유하여 낙랑군으로 가는 교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그 지역의 맥(貊)과 우호관계를 맺은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박대재, 2006)

한편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첨해이사금 3년(249)조에는 “궁궐의 남쪽에 남당을 지었다(作南堂於宮南)”라고 하였고 같은 왕 5년(251)조에는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무를 보았다(始聽政於南堂)”라고 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남당은 귀족회의의 장소로 주목되었으며 이에 초기의 귀족회의를 “남당회의(南堂會議)”라 이름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그런데 근래 남당을 귀족회의(和白會議)와 분리하여 이해하고, 군신회의의 장소 내지 왕의 정청(政廳)으로 강조하는 시각이 대두하고 있다.(노용필, 1990; 박남수, 2003) 또한 왕궁의 배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상고기의 “정전(正殿)-남당(南堂)”체계가 중대 이후 “정전(正殿)-조원전(朝元殿)”체계로 변화하는 양상이 확인됨을 근거로 남당을 중대의 조원전과 같은 국가의 중심적 의례 공간으로 보기도 한다.(여호규, 2002)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노용필, 1990, 「新羅 中古期 中央政治組織에 대한 硏究史的 檢討」『忠北史學』3.
박남수, 2003, 「新羅 和白會議에 관한 再檢討」『新羅文化』21.
여호규, 2002, 「新羅 都城의 空間構成과 王京制의 성립과정」『서울학연구』18.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二理解尼叱今 [一作?解王 昔氏 助賁王之同母弟也 丁卯立 理十五年 始與高麗通聘]
제12대 이해니질금. [또는 점해왕이라고 한다. 석씨로 조분왕의 동모제이다. 정묘(247)에 즉위하여 15년을 다스렸다. 처음으로 고구려와 더불어 사신을 교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