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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미추니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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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니질금

기본정보

신라 제13대 왕
생몰년 : ?-284
재위기간 : 262-284

일반정보

미조(未祖, 未照) 혹은 미고(未古)?미소(未召)라고도 한다.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미추왕 자신은 김씨였고, 그의 어머니는 이비갈문왕의 딸로 박씨였으며, 그의 왕비는 조분왕의 딸로 석씨였다. 미추왕은 이같은 3씨족의 혼인동맹을 바탕으로, 조분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진다.

전문정보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의 계보는 알지(閼智)→세한(勢漢, 熱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미추로 이어진다. 김씨 세력의 시조가 되는 알지는 탈해왕 9년에 금성의 서쪽에 있었다는 시림(始林)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는 탈해왕 자신이 박씨왕 시대에 이성(異姓) 세력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왕족인 박씨 세력에 맞서기 위하여 알지에게 일정한 지위를 주었으며, 이것이 결국 김씨족을 사로국의 지배세력의 일부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여겨진다.(이종욱, 1980)

미추이사금의 비(妃)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랑(光明娘)으로, 결국 미추왕을 둘러싸고 박?석?김의 3 세력이 혼인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즉 미추왕 자신은 김씨였고, 그의 어머니는 이비갈문왕의 딸로 박씨였으며, 그의 왕비는 조분왕의 딸로 석씨였다. 미추왕은 이같은 3씨족의 혼인동맹을 바탕으로 하여 조분왕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생각된다.(이종욱, 1980)

제14대 유례왕은 미추왕이나 그의 왕비인 광명랑보다는 한 세대 아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조분왕은 그의 바로 아래 세대에 속한 인물을 사위로 택하여 왕으로 삼은 듯 하다. 이 경우 미추왕은 김씨족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골정(骨正=세신(世神)) 갈문왕계의 일원이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이광규, 1977)

또한 미추는 조분왕과 점해왕의 아버지인 골정의 부인이 미추왕의 누이인 옥모부인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조분왕과 점해왕의 외삼촌 자격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석씨왕 시대에 김씨인 미추가 갑자기 왕위에 오른 것은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히 김씨족의 성장이라는 정치적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추왕의 누이가 골정갈문왕의 부인이 되었고, 미추 자신이 조분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것은 골정 갈문왕-조분왕?점해왕으로 이어지는 석씨족 가계와 구도-미추왕으로 이어어지는 김씨 세력 사이의 결혼을 통한 동맹으로 볼 수도 있다.(이종욱, 1980)

한편,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를 비롯한 금석문(金石文)자료에는 김씨(金氏) 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였는데, 이를 미추왕으로 보는 설도 있다.

김알지의 7대손으로 최초로 김씨로 왕위에 즉위한 미추왕은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 의하면, 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처음 오묘(五廟)를 정했는데, 이때 김성 시조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중고(中古)나 중대(中代)에는 미추왕의 이름이 없었고, 그를 시조로 하는 전승은 후대의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곧, 어지러운 혜공왕대에 미추 숭배사상이 있었던 것처럼 기술되었다는 것이다. 신라 제일의 영웅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에 나아가 자신의 후손이 누명을 써서 억울하다고 호소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6년 가을 8월조의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켜 죽였다는 사건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김유신이 찾아가 호소하는 상대 왕릉으로 무열왕릉이나 문무왕릉이 아니라 인연관계가 없는 미추왕릉이라는 점은 부자연스럽다. 만약 김유신이 찾아갈 만한 상대(上代)의 왕을 소급해본다면 법흥왕릉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신의 증조부인 구해왕이 법흥왕 19년에 귀부해 와서 일족이 진골에 편입되어 금관국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만대의 부귀 영화를 향유케 한 왕이 법흥왕이기 때문이다. 이에 미추왕릉을 법흥왕릉의 투영일 것이란 문제를 제기한다.(문경현, 1983)

미추왕이 법흥왕(=원종왕(元宗王))을 의미하는 듯한 기사가 있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인용한 기록에서는 아도(我道)가 신라에 포교하려고 입국한 시대가 미추왕대였으며, 이때 아도가 흥륜사를 창건했다고 했다. 그러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아도의 포교 입국이 양(梁) 대통(大通) 원년(元年), 즉 법흥왕 14년이라고 했다. 또한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와 영흥사가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에서는 미추왕대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조(元宗興法條)에서는 실제로 법흥왕대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불교 포교승이 입국한 미추왕 2년은 262년으로, 실제 고구려에 불교가 유입된 연대보다도 1세기 가량 앞선 것이기에 사실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는 법흥왕(=원종왕(元宗王))과 미추왕이 혼동된 때문으로 보아, 미추왕 자체가 법흥왕이 투영되어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한다.(문경현, 1983)

나물(奈勿)과 실성(實聖)은 모두 미추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르고 있는데, 미추왕이 죽은 연도는 284년이고, 나물이 죽은 연도는 402년, 실성이 죽은 연도는 417년이다. 그리고 미추왕과 나물왕 사이에는 유례(儒禮)?기림(基臨)?흘해(訖解)의 3왕이 즉위하고 있어, 합리적으로 해석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나물왕의 주변에서 그와 무리한 관계를 설정하여 그 실재성을 인정받으려고 한 노력이 계보상에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면서, 나물왕이 역사적 시조라는 것을 연역하고 있다고 보아, 김씨 시조왕인 미추왕은 나물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곧, 문무왕릉 비문에서 15대 성한왕(星漢王)이라고 한 계보상에서도 최초의 왕은 나물왕이라고 한다. 여기에다가 죽엽군(竹葉軍)은 나물왕 시대에 안라(安羅)?왜(倭)의 대군이 금성을 공격하였을 때, 광개토왕의 구원군이 나물왕의 요청으로 와서 구원한 사실이 굴절된 설화로 보아, 미추왕이 김씨 시조왕인 나물왕과 법흥왕의 투영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시조왕이라고도 하였다.(문경현, 1983)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味鄒王) 죽엽군조(竹葉軍條)에서는 미추왕의 음덕(陰德)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伊西國)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했는데 신라측에서 이에 저항하지 못하다가 댓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 적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 후 그 군사들이 물러간 곳을 알 수 없었는데 댓잎만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으므로 비로소 미추왕의 음덕의 공로임일 알게 되었으며 그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미추왕의 재위년과 관련하여,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22년간 재위했다고 했으나,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味鄒王) 죽엽군조(竹葉軍條)에서는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임오(262)에 즉위하여 23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木下禮仁, 1966, 「新羅始祖系譜の構成」『朝鮮史硏究會論文集』2.
三品彰英, 1973, 『古代祭政と穀靈信仰』(三品彰英論文集 5), 平凡社.
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이광규, 1977, 『韓國家族의 史的 硏究』, 일지사.
이종욱, 1980,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문경현, 1983, 『新羅史硏究』, 慶北大學校出版部.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十三 未鄒尼叱今[一作味炤 又未祖 又未召 姓金氏 始立 父仇道葛文王 母生乎 一作述禮夫人 伊非葛文王之女 朴氏 妃諸賁王之女光明娘 (壬午)立 理二十二年]
제13대 미추니질금[혹은 미소·미조·미소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며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구도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생호인데, 혹은 술례부인이라고도 하며, 이비갈문왕의 딸이며, 성은 박씨이다. 왕비는 제분왕의 딸 광명랑이다. 임오에 즉위하여 22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미추왕 죽엽군)
未鄒王 竹葉軍
第十三未鄒尼叱今[一作未祖 又未古] 金閼智七世孫 赫世紫纓 仍有聖德 受禪于理解 始登王位[今俗稱王之陵爲始祖堂 蓋以金<氏>始登王位故 後代金氏諸王 皆以未鄒爲始祖 宜矣] 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 第十四儒理王代 伊西國人 來攻金城 我大擧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幷力 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陵前 乃知先王陰?有功 因呼竹現陵 越三十七世惠恭王代 大曆十四年己未四月 忽有旋風 從庾信公塚起 中有一人乘駿馬 如將軍儀狀 亦有衣甲器仗者四十許人 隨從而來 入於竹現陵 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 或如告訴之音 其言曰 臣平生 有輔時救難匡合之功 今爲魂魄 鎭護邦國 攘災救患之心 暫無?改 往者庚戌年 臣之子孫 無罪被誅 君臣不念我之功烈 臣欲遠移他所 不復勞勤 願王允之 王答曰 惟我與公 不護此邦 其如民庶何 公復努力如前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王聞之懼 乃遣<上>臣金敬信 就金公陵謝過焉 爲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 以資冥福 寺乃金公討平壤後 植福所置故也 非未鄒之靈 無以?金公之怒 王之護國 不爲不大矣 是以邦人懷德 與三山同祀而不墜 ?秩于五陵之上 稱大廟云
미추왕 죽엽군
제13대 미추니질금[또는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도 한다.]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이다. 누대에 높은 귀족으로서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이해니질금(理解尼叱今)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비로소 즉위하였다.[지금 세간에서 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후대의 모든 김씨 왕들이 미추를 시조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재위 23년만에 죽었는데, 능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왔다. 우리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힘을 합쳐 적군을 격파했으나, 군사가 물러간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이 음덕의 공로인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먼 뒷날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은 준마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과 같았고,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속에서 마치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같기도 하였다. 그 말은 이러했다. “신은 평생 정치를 돕고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며 삼국을 통일한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며,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려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고 임금과 신하들이 저의 공적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사오니 원하건데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왕이 대답했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하겠소. 공은 다시 이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해도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이에 돌아갔다. 왕(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상신(上臣) 김경신(金敬臣)을 보내 김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친 후에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미추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왕이 나라를 수호함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