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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비처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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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처마립간

기본정보

신라의 제21대 왕
재위기간: 479-500
생몰년 : ?-500

일반정보

비처왕(毗處王) 또는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소지왕(炤智王)이라고 한다. 성(姓)은 김씨이다. 479년에 즉위하여 21년 간 다스렸다.『삼국유사』 왕력에는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의 장자(長子)로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는 미사흔(未斯欣) 각간의 딸이다. 왕비는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선혜부인(善兮夫人)이다.

전문정보

신라 제21대 왕이다. 『삼국유사』 왕력에서 비처마립간(毘處麻立干)에 대해서 “소지왕(炤知王)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즉위년(479)조에는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이라고 하고, 세주에 “비처(毘處)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권2 기이1 사금갑(射琴匣)조에서는 비처왕(毗處王)이라 하고 있으며, 세주에 또는 소지왕(炤智王)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과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즉위년(479)조에서는 소지왕의 “지”자를 “지(知)”로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권2 기이1 사금갑(射琴匣)조에서는 “지(智)”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처마립간의 가계에 대해서,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자비왕(慈悲王)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미사흔(未斯欣) 각간의 딸이다. (중략) 왕비는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즉위년(479)조에는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의 장자(長子)이고, 그의 어머니는 미사흔(未斯欣) 서불한(舒弗邯)의 딸 김씨(金氏)이며, 왕비는 내숙(乃宿) 이벌찬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이다.”라고 하여 역시 『삼국유사』 왕력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또한, 비처마립간의 행실과 품성에 관한 기록은『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즉위년(479)조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소지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기는 행실이 있었고, 겸손과 공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炤知幼有孝行 謙恭自守 人咸服之)”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권2 기이1 사금갑(射琴匣)조를 통해서 왕이 까마귀, 쥐, 돼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 설화와 오기일(烏忌日)의 유래를 살펴 볼 수 있다. “즉위 10년 무진(戊辰)(488)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이를 쫓게 하였는데,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 것을 한참동안 구경하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때 노옹(老翁)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리니, 겉봉에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하였다. 기사(騎士)가 돌아와 이것을 바치니 왕에게 두 사람이 죽는 것 보다는 떼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아뢰어 두 사람은 서민이요, 한 사람은 왕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렇게 여겨 떼어보니, 그 글에 거문고갑을 활로 쏘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갑을 보고 쏘니, 내전분수승(內殿焚修僧)과 궁주(宮主)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正月)의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일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꺼려 함부로 움직이지 않으며, 16일을 오기일(烏忌之日)이라고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 지내니, 지금도 이를 행하고 있다. 세속의 말에 이를 달도(??)라고 하니, 슬퍼하고 근심하며 모든 일을 꺼려 금한다는 말이다. 그 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이름 하였다.”고 한다.

마립간시대 김씨 왕족의 정치적 위상은 그 이전의 이사금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과거에는 신라의 실질적인 건국 연대를 내물마립간으로부터 보는 견해도 있었을 만큼 이 시기는 정치?시회적인 대변혁의 시기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소지마립간9년(487)에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였고 3년 후인 12년에는 수도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화(物貨)를 유통하게 하였다. 이는 경제의 발달로 인한 운송수단의 개발과 도로망의 정비,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교역 규모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이우태, 1997)

그리고 소지마립간 9년(487)에는 시조 탄강지(誕降地)인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지었다. 나을은 시조가 탄생한 곳인데, 그것은 혁거세의 탄생지를 말하는 것이다. 나을(奈乙)에 관해서는, 천개소문(泉蓋蘇文)의 일본식 표음(表音)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의 “이리(伊梨)”가 바로 정천(井泉)의 고어(古語)인 “얼”을 말하는 것이고, 나(奈)와 라(蘿)는 삼한?삼국시대의 지명 끝에 흔히 붙는 라(蘿)?나(那)?야(耶)?노(盧)?량(良)과 같이 국읍(國邑)을 의미한 말이니, 나을(奈乙)?나정(蘿井)은 국정(國井)의 뜻일 거라고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7) 한편, 나을(奈乙)=나정(蘿井)이라는 기존의 견해에 반대하고 김씨족의 발상지인 “날이(捺已)”, “나령(奈靈)”, 즉 지금의 소백산맥 일대의 영주지역에 신궁을 두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강종훈, 2000)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10년(488)조에는 “동양에서 육안구를 바쳤는데 배 아래에 글자가 있었다.(東陽獻六眼龜 腹下有文字)”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여섯 개의 눈을 가진 거북은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6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의 6부가 어느 정도 왕권에 귀속한 정치제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노태돈, 1975)

원래 신궁(神宮)이란 신을 제사하는 곳을 말한다. 그런데 궁(宮)이란 본래 묘(廟)와 같은 의미로써 신묘(神廟),즉 신궁(神宮)은 조상의 영(靈)을 제사하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신신제사에 대한 견해들을 살펴보면, 신궁제사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체제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며 대외적으로는 국력의 신장에 따른 국가의식의 자주적 표현이었던 것이고, 토착신앙의 사상적 통일정책을 통하여 이념적 결속을 기할 수 있었던 것으로, 토착신앙의 통일화정책의 성공으로 외래사상인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사상적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최광식, 1994) 또한 신궁제사는 시조왕인 박혁거세를 대상신으로 하는 제사라는 점에서 시조묘제사와 같다는 견해가 있다. 그 강조점이 시조왕의 “하늘로부터의 탄생”에 주어지고, 그래서 시조가 탄생한 곳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이전 시조묘제사에 비해 훨씬 “하늘”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제사였다. 신궁의 설치는 당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력 강화가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왕권 강화의 입장에서는 “하늘”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하여 왕권의 지고성(至高性)을 강화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이 확대된 전 영토에 대해서는 보편적 지고신(至高神) 대한 중앙에서의 제사를 강화함으로써 종교적 사상적 통합력을 제공하기 위해 이루어진 조치였던 것이다.(나희라, 2003)

이러한 신궁의 설치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소지마립간 9년(487)의 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제사지(祭祀志)에는 지증왕대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중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문제점과 신궁의 주신(主神)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된 문제이다. 주신에 관해서는 크게 박혁거세라는 견해(이병도, 1977)와 김씨의 시조인 성한(星漢)으로 보는 견해(이기동, 1978 ; 강종훈, 1994)나 미추(변태섭, 1964) 또는 나물로 보는 견해(신종원, 1992)가 있다. 이와는 달리 신궁의 주신을 천지신(天地神)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최광식, 1994)

한편 소지마립간대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지방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거나 혹은 가야와 연합하여 이하(泥河)?모산성(母山城) 전투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특히 소지마립간15년(493)에 소지마립간은 백제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 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공수관계(攻守關係)는 더욱 공고해져, 소지마립간16년(494)의 고구려의 신라침입 때에는 백제가, 495년 고구려의 백제공격 때에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고구려와의 전투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三年山城)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소지마립간은 재위22년(500) 겨울 11월에 죽었다.

참고문헌

변태섭, 1964, 「廟制의 變遷을 통하여 본 新羅社會의 發展過程」『歷史敎育』8.
노태돈, 1975,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韓國史論』2.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기동, 1978, 「新羅 太祖 星漢의 문제와 興德王陵碑의 발견」『大丘史學』15?16.
신종원,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최광식, 1994,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강종훈, 1994, 「神宮의 設置를 통해 본 麻立干時期의 新羅」『韓國古代史論叢』6
이우태, 1997, 「Ⅱ. 신라의 융성」『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나희라, 2003,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二十一 毗處麻立干 [(一)作□知王 金氏 慈悲王第三子 母未斯角干之女 己未立 理二十一年 妃期寶葛文王之女]
제21 비처마립간 [혹은 □지왕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자비왕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미흔각간의 딸이다. 기미에 왕위에 올라 21년을 다스렸다. 왕비는 기보갈문왕의 딸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사금갑)
射琴匣.
第二十一毗處王[一作炤智王]卽位十年戊辰 幸於天泉亭 時有烏與鼠來鳴 鼠作人語云 此烏去處尋之 [或云 神德王欲行香興輪寺 路見衆鼠含尾 怪之而還占之 明日先鳴烏尋之云云 此說非也]王命騎士追之 南至避村[今壤避寺村 在南山東麓] 兩猪相鬪 留連見之 忽失烏所在 徘徊路旁 時有老翁 自池中出奉書 外面題云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使來獻之 王曰 與其二人死 莫若不開但一人死耳 日官奏云 二人者庶民也 一人者王也 王然之開見 書中云 射琴匣 王入宮 見琴匣射之 乃內殿焚修僧與宮主 潛通而所奸也 二人伏誅 自爾國俗每正月上亥上子上午等日 忌愼百事 不敢動作 以十六日爲烏忌之日 以?飯祭之 至今行之 俚言?? 言悲愁而禁忌百事也 命其池曰書出池
거문고갑을 쏘다.
제 21대 비처왕(毗處王)[또는 소지왕(炤智王)이다.] 즉위 10년 무진(戊辰)(488)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로 이르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하였다. [혹은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가서 행향하려 할 때, 길에서 여러 마리의 쥐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괴이 여겨 돌아와 점을 쳐보니 이튿날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으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 설은 잘못이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이를 쫓게 하였다. 남쪽 피촌(避村)[지금의 양피사촌(壤避寺村)이니 남산(南山)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 것을 한참동안 구경하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가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때 노옹(老翁)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리니, 겉봉에 쓰기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사(騎士)가 돌아와 이것을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 보다는 떼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사람은 서민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렇게 여겨 떼어보니, 그 글에 “거문고갑을 활로 쏘라.”하였다. 왕이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갑을 보고 쏘니, 내전분수승(內殿焚修僧)과 궁주(宮主)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正月)의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일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꺼려 함부로 움직이지 않으며, 16일을 오기일(烏忌之日)이라고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 지내니, 지금도 이를 행하고 있다. 세속의 말에 이를 달도(??)라고 하니, 슬퍼하고 근심하며 모든 일을 꺼려 금한다는 말이다. 그 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이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