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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지정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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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마립간

기본정보

신라의 제22대 왕
재위기간: 500-514
생몰년: 437-514

일반정보

지철로(智哲老) 또는 지도로왕(智度路王)이라고도 한다.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姓)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눌지왕의 동생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이고, 어머니는 오생부인(烏生夫人)으로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영제부인(迎帝夫人)으로 검람대한지등허(儉攬代漢只登許)의 딸이다. 경진(500)에 즉위하여 14년 간 다스렸다.

전문정보

신라 제22대 왕이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으로 『삼국유사』권2 기이2 지철로왕(智哲老王)조에는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에서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즉위년(500)조에는 “지대로(智大路)이다.”라고 하고, 세주에 “지도로(智度路) 혹은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의 가계에 대하여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눌지왕의 아우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이고, 어머니는 오생부인(烏生夫人)으로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영제부인(延帝夫人)으로 검람대한지등허(儉攬代漢只登許) 각간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즉위년(500)조에는 “나물왕(奈勿王)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炤知王)의 제종동생이며,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鳥生夫人)으로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으로 등흔(登欣) 이찬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권2 기이2 지철로왕(智哲老王)조을 통해 지정마립간의 혼인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볼 수 있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나 됨에 배필을 얻기 어려워 사자를 3도에 보내 구하도록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러,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를 양쪽 끝을 물면서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였더니, 한 소녀가 고하기를, 이것은 부(部)의 상공(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여자의 키가 7자 5치나 되었으며, 이 사실을 자세히 왕께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황후(皇后)로 봉하니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고 한다.

지증마립간대는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500년 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직계인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이 죽은 뒤 왕위는 그 방계혈통인 지증마립간으로 이어졌는데, 그의 왕위계승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나물마립간의 손자인 습보갈문왕의 아들로 전왕(前王)인 소지의 재종제(再從弟)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나물마립간의 손자로 되어 있어 소지의 재종숙(再從叔)이 된다. 이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단정할 수 없으나, 그의 혈통이 나물마립간의 방계로 왕위계승의 제1후보자가 아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이기동, 1984) 그리고 영일냉수리신라비에 의하면 503년 계미년에 그는 갈문왕의 직함을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는 그의 재위 4년째 되는 해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지 4년이 되도록 정식의 왕이 되지 못하고 갈문왕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왕위계승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문경현, 1989; 이희관,1990) 이렇게 하여 새로이 등장한 지증마립간은 그 이후 중고왕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된다는 점에서 신라정치사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신궁(神宮)설치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9년(487)조와 『삼국사기』권32 잡지1 제사조인 사료 두 군데에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권32 잡지1 제사조에 지증마립간대에 처음으로 신궁(神宮)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지증마립간대의 새로운 왕계의 형성과 관련되어 생각할 수 있다. 소지마립간 9년(487)에 이미 신궁을 설치하였으나 신궁에 친히 제사를 지낸 것은 소지마립간 17년(495) 정월에야 이루어졌으며, 왕이 즉위 직후 신궁에 친히 제사를 지낸 것은 지증마립간때가 처음이다. 시조묘나 신궁에 대한 친사가 즉위 직후에 정기적으로 행한 것을 감안하여 제사지에서는 정기적인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소지왕대에 처음으로 설치되고 친사까지 행하였으나 아직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못하다가 지증왕대부터 비로소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이다.(최광식, 1994)

지증마립간대에는 주목할 만한 일련의 개혁이 단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선 주목되는 것이 국호와 왕호에 대한 개정이다. 이에 관해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4년조에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 는 뜻이고 나는 “사방을 망라한다.” 는 뜻이므로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또 살펴 보건대 예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나 왕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만을 칭하고 높이는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뭇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해 나감에 따라 선진적인 중국식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해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만 명칭상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장(殉葬)의 금지, 우경(牛耕)의 보급, 지방제도의 실시, 상복법(喪服法)의 제정 등 일련의 개혁정책이 모두 동일한 목적으로 추진된 것임을 암시해 준다. 지증마립간대에 실시된 지방제도의 정비는 주(州)?군(郡) 등의 명칭으로 보아 다분히 중국적인 제도를 채택한 것인데, 이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군사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우경의 보급도 중국의 발달한 생산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장려된 것이다. 그리고 순장의 금지와 상복법의 제정은 동족(同族)적 관계를 명시하는 중국적 사회 편제방법의 도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우태, 1997)

아들로는 원종(原宗)이 있는데, 후의 법흥왕(法興王)이다. 지증마립간은 재위 15년(514)에 죽었다.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이기동, 1984,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일조각.
문경현, 1989,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보이는 部의 성격과 政治運營問題」『迎日冷水里新羅碑(假稱)의 綜合的 檢討』, 한국고대사연구회.
이희관, 1990, 「新羅上代 智證王系의 王位繼承과 朴氏王妃族」『東亞硏究』20.
최광식, 1994,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이우태, 1997, 「Ⅱ. 신라의 융성」『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二十二 智訂麻立干 [一作智哲<老> 又智度路王 金氏 父訥祗王弟期寶葛文王 母烏生夫人 訥祗王之女 妃迎帝夫人 儉攬代漢只登許 (一)作□□角干之女 庚辰立 理十四年 已上爲上古 已下爲中古]
제22 지정마립간 [지철로 또는 지도로왕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아버지는 눌지왕의 동생 기보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오생부인으로 눌지왕의 딸이다. 비는 영제부인으로 검람대한지등허 또는 □□각간의 딸이다. 경진에 즉위하여 14년 다스렸다. 이상은 상고이고, 이하는 중고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지철로왕)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 辛巳則三年也]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一屎塊如鼓大 爭?其兩端.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 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 有亐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不臣.王命伊<飡>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향칭(鄕稱)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500)에 즉위하였다.[혹은 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나 됨에 배필을 얻기 어려워 사자를 3도에 보내 구하도록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러,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를 양쪽 끝을 물면서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였더니, 한 소녀가 고하기를, “이것은 부(部)의 상공(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여자의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자세히 왕께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황후(皇后)로 봉하니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亐陵島)[지금은 우릉(羽陵)으로 쓴다.]가 있다. 둘레가 2만 6천 7백 30보이다. 이 섬의 오랑캐들은 그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이 이찬(伊?) 박이종(朴伊宗)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라고 하였다. 섬의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이에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백(州伯)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