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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법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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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기본정보

신라 제23대 왕
재위기간: 514-539
생몰년:?-540

일반정보

이름은 원종(原宗)이고, 성(姓)은 김씨이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즉위년조에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귀에는 성은 모이고 이름은 진이라 하였다.(法興王立 諱原宗 冊府元龜 姓募名秦)”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지정왕(智訂王) 즉 지증마립간이고, 어머니는 영제부인(迎帝夫人)이다. 법흥(法興)은 시호로, 신라의 시호제도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갑오(514)에 즉위하여 26년간 다스렸다. 능은 애공사(哀公寺)북쪽에 있다. 왕비는 파도(巴刀)부인으로 법흥왕이 죽은 후 출가하였으며, 법명은 법류(法流)이고, 영흥사(永興寺)에 살았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頒布)하였으며, 십재일(十齋日)을 시행하여 살생을 금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에 보이는 법흥왕(法興王)의 이름인 원종(原宗)과 모진(募秦)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즉위년조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책부원귀』 권996 외신부(外臣部) 제역조(?譯條)에 실려 있다. 그밖에 그의 이름에 대해 『양서(梁書)』 권54 신라전에는 “왕성모명진(王姓募名秦)”이라 하였고, 『남사(南史)』 권79 신라전에는 “왕성모명태(王姓募名泰)”라 하였으며 『통전(通典)』 권185 변방(邊防) 신라전에는 “왕성모명진(王姓慕名秦)”이라 하였다. 그리고 울진봉평신라비에는 왕의 이름을“모즉지(牟卽智)”이라 하였다. 그의 부인이름은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법흥왕 즉위년조에 보도부인(保刀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법흥왕대에 이루어진 여러 정책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율령(律令)의 반포이다. 율령의 제정은 곧 국가적 성문법의 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율령의 반포를 흔히 고대국가체제 완성을 가리키는 지표로 삼는 것으로 본다. 이에 율령의 반포가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법흥왕 4년(517)에 병부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문헌자료에 보이는 최초의 신라의 관부라는 점에서도 중요성이 크다. 병부의 설치는 군정(軍政)과 군령(軍令)을 분리시킴으로 인해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 이래의 병권(兵權)의 분산성을 극복하고 이를 왕권하에 통속시키기 위한 조처로도 이해되고 있는데, 법흥왕대의 병부 내부조직에는 법흥왕 10년(523)에 설치된 감사지(監舍知)와 11년에 설치된 군사당주(軍師幢主)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노중국, 1987) 한편 신라 군사제도의 본격적인 정비는 진흥왕대 대당(大幢)의 설치에서 비롯한다고 하겠으나, 진흥왕대의 군사제도 정비의 토대는 이미 법흥왕대에 마련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법흥왕 8년(521)에는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두 나라 사이에 정식으로 외교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호불(好佛)의 군주로 유명한 양나라의 무제(武帝)가 보낸 사신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해 비로소 왕실에 불교가 정식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하여 왕실과 불교가 인연을 맺은 이후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기 위해 천경림(天鏡林)을 베어서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법흥왕의 이러한 시도는 귀족들의 반대로 인하여 무산되었고, 법흥왕 14년에 왕의 신임을 받는 이차돈(異次頓)은 왕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하여 창사(創寺) 준비의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차돈의 순교를 고유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곧 왕과 이차돈은 흥법에 의견을 같이 하고 왕이 이차돈으로 하여금 절을 짓게 했는데, 이차돈은 왕의 허락없이 고유신앙과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려 했고, 이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이차돈은 교명죄(矯命罪)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최광식, 2007) 흔히 이를 계기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이차돈의 죽음으로 인해 곧바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경림에 짓고 있던 흥륜사(興輪寺)의 공사는 중단되었으므로 이 해는 오히려 불교가 박해를 받은 해이며, 법흥왕 22년에 그간 중단되었던 흥륜사의 공사가 재개되었는데 아마도 이 때에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되었던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이기백, 1992). 이와는 달리 불교의 공인은 법흥왕의 다음 왕인 진흥왕 때 가서 이루어진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신라의 불교는 소지왕 때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이루어졌으며, 법흥왕 때 이를 공인하려했으나 실패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불교공인은 진흥왕 5년(544)에 흥륜사가 완성되고, 승려의 출가를 허용하는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최광식, 2007)

이렇듯 법흥왕대에는 지증왕대의 업적을 토대로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상대등의 설치, 금관가야의 병합, 연호의 사용 등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들 정책의 의의는 신라가 대내적으로는 왕권이 확립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내세우면서 또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이우태, 1997).

법흥왕은 재위 27년(540) 가을 7월에 죽었다.

참고문헌

노중국, 1987, 『統一期의 新羅社會硏究』,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이기백, 1992,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이우태, 1997, 「Ⅱ. 신라의 융성」『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최광식, 2007,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학교 출판부.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三法興王 [名原宗 金氏 <冊>府<元>龜云 姓募 名秦 父智訂 母迎帝夫人 法興諡 諡號 乎此 甲午立 理二十六年 陵在哀公寺北 妃<巴刀>夫人 出家名法流住永興寺 始行律令始行十<齋>日禁殺度□爲僧尼] 建元[丙辰 是年始置年號始此]
제23 법흥왕 [이름은 원종이고, 김씨이다. 『책부원귀』에는 성을 모(募), 이름을 진(秦)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지정이고, 어머니는 영제부인이다. 법흥은 시호인데, 시호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오(514)에 즉위하여 26년간 다스렸다. 능은 애공사북쪽에 있다. 왕비는 파도부인으로 출가한 법명은 법류이고 영흥사에서 살았다. 처음으로 율령을 시행하였으며, 처음으로 십재일을 시행하여 살생을 금하고 승니가 됨을 허락하였다.] 건원 [병진(536) 이 해에 처음으로 연호를 설치하였는데, 연호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