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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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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기본정보

신라 제24대 왕
생몰년: ?-576
재위기간: 540-576

일반정보

제24대 신라왕으로 삼맥종(?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하며 법흥왕(法興王)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7세,『삼국유사』에 따르면 15세에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하였다고 한다. 진흥왕 12년(551)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정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또 영토를 확장하고 순수하며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守碑)」를 세웠다.

전문정보

진흥왕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로서 법흥왕의 조카 또는 지증왕의 손자가 되며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은 법흥왕의 딸이므로 법흥왕의 외손이 된다. 이렇게 법흥왕은 혈연관계만으로는 왕위계승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외척인 박씨족의 영향력이 정치적으로 작용하여 즉위할 수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이종욱, 1980; 이희관, 1990)

진흥왕의 즉위시 나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 각각 다르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조에 따르면, “그때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時年七歲…王幼少 王太后攝政)”고 전한다. 『삼국유사』권1 기이1 진흥왕조에는 “즉위 때 나이 15세이므로 태후가 섭정하였다(卽位時年十五歲 太后攝政)”라고 하였다. 이렇게 다른 두 사료의 내용을 두고 진흥왕의 즉위 나이가 언제인가에 관한 연구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에 따라 7세 즉위설이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576)조에 “왕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일심으로 부처를 받들었다(王幼年卽位 一心奉佛)”는 기록의 “유년(幼年)”과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제1행에 보이는 “과인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다(寡人幼年承基)”의 “유년(幼年)”이라는 용어를 이에 관한 방증자료로 제시하였다.(이병도, 1976)

한편 『삼국사기』에는 15?6세의 청소년들에게도 “유년(幼年)”?“유소(幼少)”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가 다수 나오고 있어 기존의 해석이 재고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5?6세의 사다함(斯多含)을 왕이 “유소(幼少)”하다고 한 것이나(『삼국사기』권 44 열전4 사다함조) 관창(官昌)을 그 아버지 품일(品日)이 “유년(幼年)”하다고 한 것(『삼국사기』권 47 열전7 관창조)에서 15?6세에 해당하는 연령을 신라사회에서 “유소(幼少)” 내지 “유년(幼年)”이라 통칭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추명(追銘)에 의하면 입종갈문왕(사부지갈문왕)은 법흥왕 24년(537)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입종의 세 자녀인 진흥왕, 숙흘종(肅訖宗), 만호부인(萬呼夫人)은 모두 537년 이전에 태어나야 하므로 진흥왕의 즉위년인 540년에 왕의 나이를 15세로 추정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고 보는 것이다.(이정숙, 1994)

진흥왕은 죽령(竹嶺)을 넘어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高靈)의 대가야(大加耶)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척경비(拓境碑)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花郞徒)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흥왕(眞興王)조에는 신라가 백제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할 때,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國之興亡在天 若天未?高麗 則我何敢望焉)”라는 진흥왕의 말이 실려있다. 그리고 이 말이 고구려에 전해져 감복한 고구려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밀약이 맺어진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즉 6세기 중엽 당시 고구려는 안으로 귀족간의 정쟁이 심화되고 밖으로는 북제와 돌궐 등의 압력으로 인해 남쪽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나제동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신라의 한강 유역 점유를 묵인했다는 것이다.(노태돈, 1976)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조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고 한다. 진흥이라는 칭호는 『삼국사기』에서 시호라고 하였으나 진흥왕 순수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생존시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6, 「眞興大王의 偉業」『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노태돈, 1976, 「高句麗의 漢水流域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韓國史硏究』13.
이종욱, 1980,『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영남대학교 출판부.
이희관, 1990, 「新羅上代 智證王系의 王位繼承과 朴氏王妃族」『東亞硏究』20.
이정숙, 1994, 「眞興王의 卽位에 대한 몇 가지 문제」『釜山女大史學』1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二十四 眞興王 [名?麥宗 (一)作深□ 金氏 父卽法興之弟立宗葛文王 母只召夫人 一作息道夫人朴氏 牟梁里<英>史伯□之女 終時亦<剃>髮而卒 庚申立 理三十七年] 開國[辛未] 十七 大昌[戊子] 四 <鴻>濟[壬辰] 十二
제24 진흥왕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아버지는 곧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이다 어머니는 지소부인이고 식도부인이라고도 하며 박씨이다. 모량리 영사백□의 딸이다. 임종 시에 또한 승려가 되어 죽었다. 경신에 즉위하여 37년간 다스렸다.] 개국[신미] 17년간이다. 대창[무자] 4년간이다. 홍제[임진] 12년간이다.

第二十五 <眞>智王 [名舍輪 一作金輪 金氏 父眞興 母<朴英失角>干之女 息(途) 一作 色刀夫人 朴氏 妃<知>刀夫人 起烏公之女 朴氏 <丙申>立 君四年 <墓在哀公寺>北]
제25 진지왕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아버지는 진흥, 어머니는 박영실각간의 딸 식도 혹은 색도부인으로 박씨이다. 비는 지도부인으로 기오공의 딸이며 박씨이다. 병신에 즉위하여 4년간 다스렸다. 묘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흥왕)
眞興王
第二十四眞興王 卽位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 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馬八千疋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제24대 진흥왕은 즉위할 때의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하였다. 태후는 곧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갈문왕의 비이다. 왕은 죽을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세상을 떠났다. 승성 3년(554) 9월에 백제 군사가 진성을 침범해와서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필을 빼앗아갔다. 이보다 앞서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했는데,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 말이 고구려에 전해지니 고구려는 그 말에 감복하여 신라와 우호를 맺었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원망하였으므로 신라를 침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