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삼국유사 키워드사전진지왕

연관목차보기

진지왕

기본정보

신라 제25대 왕
생몰년: ?-579
재위기간: 576-579

일반정보

신라 제25대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식도(息途) 혹은 색도부인(色刀夫人)이며 비는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삼국사기』에 진흥왕의 태자가 일찍 죽어 즉위하였다고 전한다

전문정보

신라 제25대 왕이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지왕(眞智王) 즉위년조에서는 “이름은 사륜(舍輪)이다.”라고 하고 세주에 “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아버지는 진흥왕(眞興王)이고, 어머니는 박영실(朴英失) 각간의 딸 식도(息途) 또는 색도부인(色刀夫人) 박씨이다. 왕비는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니 기오공(起烏公)의 딸 박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지왕(眞智王) 즉위년(576)조에서는 “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이고,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라고 나타나 있다. 한편『삼국유사』기이1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조를 통해서 죽은 진지왕과 도화녀 사이의 혼인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만에 정사는 어지러워지고 황음하여 국인(國人)이 그를 폐출 시켰다. 이에 앞서 사량부 서녀의 미모가 뛰어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는데 왕이 이를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하고자 하였다. 도화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였고, 왕은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하니 도화녀가 그러면 가능하다 하였다. 이해에 왕은 폐위 되어 돌아가셨고, 그 후 2년만에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이 넘은 후 별안간 밤중에 왕이 생시과 같이 그녀의 방에 찾아 왔다. 왕이 이제 남편이 없으니 가능한가 물으니, 도화녀는 부모에게 고하였고,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하여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7일 후에 자취가 별안간 없어졌으며, 도화녀는 태기가 있어 비형(鼻荊)이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진흥왕의 장자가 아닌 차자(次子)인데 불구하고 왕위를 이은 것에 대해서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지왕 즉위년(576)조를 통해서 이유를 살펴 볼 수 있다.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왕위에 올랐다.(太子早卒 故眞智立)”고 전한다. 한편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평왕 즉위년(579)조에는 “진평왕 즉위하였다.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의 아들이다.(眞平王 立 諱白淨 眞興王太子銅輪之子也)”라는 내용이 전하므로, 진흥왕의 태자 동륜에게는 백정(白淨)이라는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눌지왕대에 왕위계승의 장자상속이라는 원리가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신라에서, 진흥왕의 뒤를 이어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이 즉위하지 않고, 동륜태자의 동생인 사륜이 즉위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 된다. 따라서 왕위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진지왕의 즉위에 관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먼저 진흥왕의 첫째 아들이었던 동륜태자의 동륜계와 차자인 사륜, 즉 진지왕의 사륜계의 대립이 있었는데 진지왕이 결국은 거칠부의 지원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동륜계와 사륜계에 불화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진흥왕대 기록에 동륜 이외에 다른 태자의 책봉 기사가 없다는 것과 진흥왕이 승려로 일생을 마감하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진흥왕 말년에 왕위를 둘러싼 대립이 있은 후에 진지왕이 즉위하게 되는 것에 거칠부가 기여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지왕 원년(576)조에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위임하였다(以伊?居柒夫爲上大等 委以國事)”는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 비형랑조(桃花女鼻荊郞條)에서는 진지왕의 최후에 대해 “다스린지 4년 만에 정사(政事)가 어지럽고 황음(荒淫)하므로 국인(國人)이 그를 폐하였다.(御國四年 政亂荒淫 國人廢之)”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진지왕의 비정상적인 폐위도 동륜계와 사륜계의 갈등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신형식, 1984)

한편 진지왕의 즉위시에 동륜계와 대립이 있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거칠부가 진지왕을 추대하는 배경을 당시 귀족세력집단의 이익추구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당시 신라는 중고기로 들어서면서 법흥왕과 진흥왕과 같은 “대왕”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율령의 반포와 행정관부의 설치·개편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귀족들의 권한은 점차 약해지는데, 진지왕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귀족들은 신라의 법흥왕대 이후 “대왕”중심의 정치체제에 편승하려는 세력과 지증왕대 이전 귀족중심의 정치체제로 복귀하려는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고 한다. 거칠부는 범나물왕계의 진골귀족으로서 후자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정치체제를 귀족중심으로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정통성이 결여된 진지왕을 추대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김영하, 2002)

반면 진지왕의 즉위를 부당하지 않다고 보면서, 백정과의 연령 비교를 통해 연장자 혹은 우수자의 원리에 따라 왕위계승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 견해도 있다.(심우준, 1965) 더불어 진지왕이 지혜를 가진 인물이었음을 주장하며 진지왕의 즉위는 백제에 의한 대외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彌勒仙花未尸郞眞慈師條)의 기록에서는, 신라 흥륜사(興輪寺)의 승려였던 진자(眞慈)가 미륵상(彌勒像)에게 그가 세상에 나타나 곁에서 시종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꿈에서 미륵선화를 수원사(水源寺)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진지왕이 그를 불러 이유를 듣고 “낭(郎)이 자칭 경사인(京師人)이라 하였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늘 어찌하여 성 안을 찾아보지 않느냐(郎旣自稱京師人 聖不虛言 ?覓城中乎)”라고 하여 진자가 미륵선화를 찾도록 도와준다. 이 내용으로 보아 진지왕이 지혜로운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진지왕의 4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는 백제와의 전쟁과 축성에 대한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 이로 보아 백제의 침입 등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는데 있어서, 연장자이면서 지혜와 판단력이 뛰어난 진지왕이 백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보았다.(김덕원, 2007)

참고문헌

심우준, 1965, 「신라왕실의 혼인법칙」『曉城趙明基博士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효성조명기박사 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 간행위원회.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김영하, 2002, 『한국 고대사회의 군사와 정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김덕원, 2007, 『신라중고정치사연구』,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二十五 <眞>智王 [名舍輪 一作金輪 金氏 父眞興 母<朴英失角>干之女 息(途) 一作 色刀夫人 朴氏 妃<知>刀夫人 起烏公之女 朴氏 (丙申)立 君四年 (陵在哀公寺)北]
제25 진지왕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아버지는 진흥, 어머니는 박영실각간의 딸 식도 혹은 색도부인으로 박씨이다. 비는 지도부인으로 기오공의 딸이며 박씨이다. 병신에 즉위하여 4년간 다스렸다. 묘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도화녀 비형랑)
桃花女鼻荊郞
第二十五舍輪王 諡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公之女 知刀夫人 大建八年丙申卽位[古本云 十一年己亥 誤矣] 御國四年 政亂荒<淫> 國人廢之 前此 沙梁部之庶女 姿容艶美 時號桃花娘 王聞而召致宮中 欲幸之 女曰 女之所守不事二夫 有夫而適他 雖萬乘之威 終不奪也 王曰 殺之何 女曰 寧斬于市 有願靡他 王戱曰 無夫 則可乎 曰可 王放而遣之 是年 王見廢而崩 後二年其夫亦死 浹旬忽夜中 王如平昔來於女房曰 <汝>昔有諾 今無汝夫 可乎 女不輕諾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常有五色雲覆屋 <香>氣滿室 七日後 忽然無? 女因而有娠 月滿將産 天地振動 産得一男 名曰鼻荊 眞平大王聞其殊異 收養宮中 年至十五 授差執事 每夜逃去遠遊 王使勇士五十人守之 每飛過月城 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 率鬼衆遊 勇士伏林中窺伺 鬼衆聞諸寺曉鐘各散 郞亦歸矣 軍士以事來奏 王召鼻荊曰 <汝>領鬼遊 信乎 郞曰 然 王曰 然則<汝><使>鬼衆成橋於<神>元寺北渠[一作 神衆寺 誤 一云 荒川東深渠] 荊奉? 使其徒鍊石 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間輔朝政者乎 曰 有吉達者 可輔國政 王曰 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林宗無子 王?爲嗣子 林宗命吉達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故其衆聞鼻荊之名 怖畏而走 時人作詞曰 聖帝魂生子 鼻荊郞室亭 飛馳諸鬼衆 此處莫留停 鄕俗帖此詞以?鬼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다.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 8년 병신(576)에 왕위에 즉위하였다.[고본에는 11년 기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년 만에 정사가 혼란해지고 주색에 빠져 국인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 서녀가 용모가 아름답고 고와 당시 도화랑이라고 불렀다.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 상관(相關)하고자 하니 여인이 아뢰기를, “여자가 지킬 일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로 가는 것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서도 끝내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차라리 저자거리에서 참수될지라도 딴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하니 왕이 희롱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하옵니다.”하였다. 왕은 여인을 놓아줘 돌려보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다. 그 후 2년 만에 여자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후에 홀연히 밤 중에 왕은 평소처럼 여자의 방에 와서 말하기를, “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하니 여자는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물었다. 부모가 말하기를, “군왕의 말씀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그 딸을 방에 들여보냈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뒤 홀연히 자취가 없어졌다. 여인은 이내 임신을 하였고 달이 차서 낳으려 하자 천지가 진동하더니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기이함을 듣고 거두어들여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직(執事職)을 주었다.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노니 왕은 용사 50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 황천 언덕 위[서울 서쪽에 있다]에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뿔뿔이 흩어졌고, 비형랑도 또한 돌아왔다. 군사가 돌아와 사실대로 와서 아뢰니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을 데리고 논다는 말이 정말이냐?” 낭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북쪽 도랑[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또는 황천(荒川) 동쪽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하니, 비형랑이 명을 받들어 귀신들을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러므로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은 또 묻기를, “귀신들 가운데 인간으로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자가 있느냐?”하니,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너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랑이 길달을 데리고 함께 와서 뵈었다. 집사 벼슬을 주었는데,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견줄 바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명하여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명하여 길달로 하여금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니, 밤마다 그 문 위에 가서 잤으므로 길달문이라 하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가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글을 지어 이르기를, “성제(聖帝)의 혼령이 낳은 아들인 비형랑의 집과 정자이니, 날고뛰는 모든 귀신들아, 이곳에 머물지 마라!” 라고 하였다. 민간풍속에 이 글을 집에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