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삼국유사 키워드사전진평왕

연관목차보기

진평왕

기본정보

신라 제26대 왕
생몰년:?-632년
재위기간: 579-632년

일반정보

신라 제26대 왕으로 성은 김씨(金氏)이며 이름은 황지(皇地), 혹은 백정(白淨)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다.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전문정보

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으로, 『삼국유사』권1 기이1 천사옥대조에는 “제26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니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신장이 11척이었다. 내제석궁[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니, 왕이 세운 것이다.]에 행차할 때에 돌계단을 밟으니 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 (진평왕이) 즉위한 원년(579)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옥대를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친히 꿇어 앉아서 받으니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띠를 사용하였다.”라는 설화가 전한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즉위년조에는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諱白淨 眞興王太子銅輪之子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진지왕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지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이름은 사륜(舍輪)이고 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하였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諱舍輪 或云金輪 眞興王次子)”라고 하여, 진지왕이 진흥왕의 둘째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손자이면서, 제25대 진지왕의 조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자상속의 원칙을 따른다면, 진흥왕의 손자인 백정(진평왕)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의 뒤를 이은 것은 진평왕의 차자인 사륜(진지왕)이었다. 이렇게 사륜(진지왕)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로 즉위하는 것에 대해, 진평왕의 동륜계와 진지왕의 사륜계가 왕위를 두고 다투었으나 결국 진지왕이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즉위하게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김영하, 2002)

그러나 진지왕은 정통성이 결여된 군주로서 거칠부가 죽자 얼마 안 있어 짧은 재위기간을 마감한다. 진지왕의 마지막에 대해서,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비형랑조(桃花女鼻荊郞條)에서는 “(진지왕이) 다스린지 4년 만에 정사(政事)가 어지럽고 황음(荒淫)하므로 국인(國人)이 그를 폐하였다.(御國四年 政亂荒淫 國人廢之)”고 전한다. 이 기록을 통해 동륜계가 진지왕을 축출하는 데에 있어 국인의 입장을 내세웠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신형식, 1984)

한편, 진지왕의 즉위과정을 거칠부 등의 귀족세력이 지증왕계의 “대왕전제체제(大王專制體制)”로 이행에 대한 반발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진평왕의 즉위가 그 반대세력인 “대왕전제체제”를 지지하는 귀족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또한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원년조에는 “동모제(同母弟)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封母弟伯飯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고 전하는데, 이에 대해, 진평왕은 왕에 준하지만 왕이 될 수 없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동모제에게 부여함으로써 왕위의 장자계승원칙을 다시 천명하였다고 보았다.(김영하, 2002)

또한, 진평왕가는 석가 왕실을 재현하려고 했다고 한다. 진평왕의 이름인 “백정(白淨; 일명 정반왕(淨飯王))”과 왕비 “마야부인(摩耶夫人)”은 각기 석가의 부모이름을 취한 것이며 진정과 진안 갈문왕의 이름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은 석가의 삼촌들 이름과 같다. 이렇게 진평왕가의 이름이 석가의 왕실과 유사한 것은 진평왕가가 다른 왕족, 즉 사륜계 등과 차별적인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김두진, 1988)

진평왕은 즉위 후 관제를 정비한다. 특히『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3년(581)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고 동왕(同王) 7년 삼궁(三宮: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에 사신(私臣)을 각각 설치한다. 또 진평왕 43년(621)에는 왜전(倭典)을 고쳐서 영객전(領客典)으로 하였으며 다음해(622)에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다.

그밖에 진평왕은 원광(圓光)·담육(曇育) 등 승려를 중국에 보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진흥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수나라와 수교하였고,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와 수교하였다.

참고문헌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김두진, 1988, 「新羅 眞平王代의 釋迦佛信仰」『한국학논총』10.
김영하, 2002, 『한국 고대사회의 군사와 정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二十六 眞平王 [名皇地 (父銅輪) (一)云東語太子 母立宗葛文王之女 萬呼 一云 萬寧夫人 名行義 <先>妃摩耶夫人 金氏 名福?口 後妃僧滿夫人 孫氏 己亥立]
제26 진평왕 [이름은 황지이다. 아버지는 동륜 혹은 동어태자라고 한다.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 만호 혹은 만녕부인으로 이름은 행의이다. 처음의 왕비는 마야부인 김씨로 이름은 복힐구이고 다음 왕비는 승만부인으로 손씨다. 기해에 즉위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천사옥대)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 諡眞平大王 金氏 大建十一年己亥八月卽位 身長十一尺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 王之所創] 踏石梯 二石幷折 王謂左右曰 不動此石 以示後來 卽城中五不動石之一也 卽位元年 有天使降於殿庭 謂王曰 上皇命我傳賜玉帶 王親奉?受 然後其使上天 凡郊廟大祀皆服之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讚曰 雲外天頒玉帶圍 ?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准擬明朝鐵作?
하늘이 내려준 옥대[청태 4년 정유(937) 5월에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치니, 길이가 10위요, 새겨 넣은 장식이 62개였다. 이것은 진평왕(眞平王)이 하늘에서 받은 띠라고 한다. 고려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서 내고(內庫)에 두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579) 8월 왕위에 올랐는데 키가 11척이었다. 내제석궁에 행차하여[또한 천주사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 돌계단을 밟으니 돌 2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들에게 보여라”고 하였으니, 성 안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즉위 원년에 천사(天使)가 궁전의 뜰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명하여 옥대(玉帶)를 전해주라 하였습니다.”하니 왕은 친히 꿇어앉아서 받았다. 그 후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큰 제사 때에는 모두 이 옥대를 착용하였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장차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면서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하니,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입니다.”하고 이에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찬하여 말하였다. 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를 내리니, 임금의 곤룡포에 알맞게 둘렀구나, 우리 임금 이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왕지기삼사)
善德王知幾三事
第二十七德曼[一作万]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待其開落 果如其言 二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 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取殺之 百濟將軍?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王無恙時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 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武>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畵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眞德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제27대 덕만(德曼)[혹은 만(万)으로 쓰기도 함]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6년 동안에 무릇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되를 보내왔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씨를 뜰에 심도록 명령하고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여러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사람들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을 시켜 정병(精兵) 2천명을 뽑아서 급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잡아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천 명씩을 이끌고 서교(西郊)로 나가 물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백명이 와서 그곳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召)라는 자가 남산령(南山嶺)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병력 1천 2백 명이 있었는데, 이를 쳐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셋째는 왕이 병을 앓지 않을 때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利天) 가운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입니까?”라고 물었다.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의 남쪽이다.”라고 하였다.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나니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 사지냈다. 10여 년 후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에 대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모란꽃과 개구리가 우는 두 가지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여자의 생식기이다. 여자는 음이 되니, 그 음의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 뛰어난 지혜에 감복하였다. 꽃을 세 가지 색으로 보낸 것은 아마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것인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을 말함이니 당나라 황제도 헤아려 알아 맞추는 명석함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것은 『양지사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별기』에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