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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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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기본정보

신라 제27대 왕
생몰년 : ?-647
재위기간: 632-647

일반정보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장녀로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재위기간동안 귀족자제들을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키고, 황룡사(皇龍寺)에 9층 목탑을 세우는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업적을 쌓았다. 또한 대당외교(對唐外交)를 한층 긴밀히 하였으며, 정치?군사적으로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647년 정월에 일어난 비담(毗曇)?염종(廉宗)의 난 와중에 죽었다.

전문정보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를 통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선덕여왕이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진평왕의 왕권강화의 결과와 함께, 김용춘(金龍春)을 대표로 하는 신귀족세력과 비담(毗曇)을 대표로 하는 구귀족세력 사이에 일정한 정치적인 타협의 결과라고 보여 진다. 즉 여왕의 즉위를 지지하는 신귀족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대립 갈등하였고, 결국 그들간의 정치적인 타협에 의해서 나온 비상적(非常的)인 정치운영 형태였다.(신형식, 1984; 주보돈, 1993) 이러한 정치운영 형태는 선덕여왕이 즉위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데, 여왕은 이미 성장해버린 귀족세력과 여성이라는 자기 한계 때문에 왕권강화를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이 시기의 형국은 진평왕 말엽의 사륜계(舍輪系)와 왕권이 결합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권력구조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김영하, 2002)

이와 같은 상태에서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 동안에는 백제의 계속된 침공과 더불어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았다. 이에 선덕여왕은 불교를 숭상하여 자장(慈藏)과 같은 불교세력을 등용하였고, 황룡사 9층탑의 건립과 같은 불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위기상황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한 목적은 대야성의 함락 이후에 신라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그로 말미암아 실추된 왕실과 여왕의 권위를 회복하며, 아울러 왕권의 강화와 국력의 신장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이기백, 1986; 김상현, 1999) 또한 불국토설(佛國土說)을 제시함으로써 선덕여왕은 불교치국책(佛敎治國策)으로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신종원, 2004)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5 선덕왕 12년(643)조에 따르면, 신라는 백제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인해 당에 청병(請兵)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여자 군주는 정치를 잘 할 수 없다(女主不能善理)”고 하며, 오히려 당의 황족을 신라왕으로 대신 봉하려고 했다. 이러한 당 태종의 여왕 통치에 대한 발언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으며, 선덕여왕 16년(647) 1월에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구귀족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하나의 구실이 되었다. 이후 이를 김유신이 진압함으로써, 신라 내정은 김춘추?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귀족세력이 정권을 완벽히 잡게 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는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모여 3-4일을 우는 것을 보고 서교(西郊)의 여근곡에 숨어 있는 적병을 미리 예견하였다는 이야기, 당태종이 보낸 모란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없음을 예견하였다는 이야기, 죽을 날을 예견하고 낭산에 자신의 능 자리를 지정한다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예견한 세가지 설화가 전한다.

여왕은 이 내란(內亂)의 시기에 재위 16년 만에 죽게 되는데,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이기백, 1986,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주보돈, 1993, 「金春秋의 對外活動과 新羅內政」 『한국학논집』20.
김상현, 1999, 『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김영하, 2002, 『韓國 古代社會의 軍事와 政治』,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신종원, 2004, 『삼국유사 새로 읽기』 1,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二十七 善德女王[名德曼 父眞平王 母<摩>耶<夫>人金氏 聖骨男盡 故女王立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治十四年]
제27 선덕여왕[이름은 덕만이다. 아버지는 진평왕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이다. 성골의 남자가 없었으므로 여왕이 즉위하였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 인평 갑오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왕지기삼사)
善德王知幾三事
第二十七德曼[一作万]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待其開落 果如其言 二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 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取殺之 百濟將軍?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王無恙時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 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武>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畵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眞德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제27대 덕만(德曼)[혹은 만(万)으로 쓰기도 함]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6년 동안에 무릇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되를 보내왔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씨를 뜰에 심도록 명령하고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여러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사람들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을 시켜 정병(精兵) 2천명을 뽑아서 급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잡아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천 명씩을 이끌고 서교(西郊)로 나가 물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백명이 와서 그곳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召)라는 자가 남산령(南山嶺)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병력 1천 2백 명이 있었는데, 이를 쳐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셋째는 왕이 병을 앓지 않을 때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利天) 가운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입니까?”라고 물었다.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의 남쪽이다.”라고 하였다.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나니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 사지냈다. 10여 년 후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에 대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모란꽃과 개구리가 우는 두 가지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여자의 생식기이다. 여자는 음이 되니, 그 음의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 뛰어난 지혜에 감복하였다. 꽃을 세 가지 색으로 보낸 것은 아마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것인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을 말함이니 당나라 황제도 헤아려 알아 맞추는 명석함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것은 『양지사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별기』에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