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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태종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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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기본정보

신라 제29대왕
생몰년 : 603-661
재위기간 : 654-661

일반정보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이자, 김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며, 비는 문명왕후로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태종(太宗)은 묘호(廟號)이고 무열(武烈)은 시호이며, 이름은 춘추(春秋)이다. 김춘추는 진덕여왕 사후 진골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때의 나이가 53세였다. 즉위 후 7년(660)에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백제 멸망 다음해에 죽음으로써,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전문정보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이며 신라 역사상 진골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즉위부터를 중대(中代)로 설정했으며, 『삼국유사』에는 이때부터를 하고(下古)로 설정하였다. 이것은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후 신라 사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내는 시대구분이라 하겠다.

김춘추 집안은 진흥왕 33년(572) 태자 동륜의 죽음으로 차자 사륜이 진흥왕 후기의 정국을 주도하면서 등장하였으며, 진흥왕이 죽은 후에는 동륜의 아들인 백정(白淨)을 배제시키고 진지왕으로 즉위함으로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재위 4년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문란하다(政亂荒淫)”는 이유로 폐위되었고, 동륜의 아들인 백정이 진평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진지왕과 그의 아들 김용춘?손자 김춘추를 사륜계(舍輪系)라 이르게 된다. 이후 사륜계는 진평왕과 선덕여왕?진덕여왕을 거치면서 동륜계와의 관련 속에서 정치활동을 수행하다가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그의 가문이 재집권하게 된다.

사륜계의 활동은 금관가야(金官加倻)의 후예인 가야계의 활동과도 같이 한다. 가야계는 금관가야의 후예인 김무력을 중심으로 한 그의 직계 자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륜계와 가야계의 관계는 사륜이 진지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부터 성립되어 이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기까지 상호 긴밀한 협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文姬)와 김춘추의 결혼으로 더욱 강화되게 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결혼하게 되는 일화가 자세하게 전한다. 문희는 김유신의 막내 동생으로 그 손윗누이인 보희(寶姬)가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경주에 가득차는 꿈을 꿨다고 하자 치마로 값을 치러 그 꿈을 샀다. 그 후 10일이 지난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옷끈을 떼어내고는 자신의 집이 근처에 있으니 가서 꿰매자고 하였다. 그 때 김유신이 보희에게 그 옷끈을 꿰매라고 하니 보희는 사양하고, 김유신이 문희에게 꿰매는 것을 시키자 김춘추가 김유신의 뜻을 알고 관계하여 자주 왕래하였다고 한다. 그 후 문희가 임신하자 김유신이 문희를 꾸짖고 말을 퍼트려 그녀를 태워죽인다고 하였다. 김유신은 선덕왕이 남산에 놀러가는 때를 맞추어, 뜰에 장작을 놓고 불을 지펴 연기가 나게 했다. 선덕왕이 그 연기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신하들은 김유신이 남편도 없는 누이가 임신하여 그를 태워 죽이려는 듯하다고 하였다. 이에 선덕왕이 누구의 소행인지 묻자 김춘추의 안색이 변하여, 왕은 그가 한 일인 줄 알고 그보고 구원하라고 하였다. 김춘추는 달려가 왕의 명을 전해 문희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문희와 혼례를 행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상) 문무왕 즉위년(661)조에 전한다. 이것은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이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 김춘추가 진덕여왕대 당으로 가 군사를 청하였는데, 당 태종이 그를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시위(侍衛)하게 하였으나 굳이 청하여 귀국하였다고 한다.

진덕여왕 즉위 후 김춘추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대신(大臣)들을 교체하고, 그 자신은 대신회의를 초월하는 국상(國相)으로 또는 태자와 같은 비상의 직책을 가지고 진덕여왕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이로 보면 진덕여왕대는 사실 그의 즉위를 위한 준비기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신형식, 1984) 그가 직접 즉위하지 않았던 것은 아직 그의 즉위에 대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일 진덕여왕이 사망한 뒤 그가 집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등이었던 알천(閼川)의 양위를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김춘추는 문왕(文王) 이후 계속 그의 아들인 법민(法敏)을 당에 보내어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게 하고, 인문(仁問)을 당에 숙위(宿衛)시킴으로써 당과의 외교창구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는 당 문화 수용의 창구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의 정치적인 동향을 본국으로 연락해 주는 창구로서 기능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 그는 지배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당제(唐制)의 수용에 나선다.(김덕원, 2007)

김춘추는 나당동맹의 체결이라는 군사적인 목적과 함께 당의 제도를 수용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대당외교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당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복장을 수용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것은 당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면서도 당 태종의 환심을 사기 위한 김춘추의 고도의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된 제스처였다.(최현화, 2004) 또한 관리들의 복장을 통일시킴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결과까지 예상하였던 치밀하게 계획된 조치였을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인 정치이념은 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자신의 부모를 문흥대왕(文興大王)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한 사실이 그러하다. 무열왕 이전에는 왕의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왕의 어머니를 부인으로 추봉하였으나,(변태섭, 1964) 무열왕대부터는 사실상 갈문왕이 폐지되고 새롭게 대왕의 칭호를 추봉한다. 이는 자신의 가문을 존숭(尊崇)시켜서 왕의 권위를 고양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문존숭과 함께 김춘추는 율령(律令)에 대한 정비를 단행하였는데, 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에 형률에 관한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실시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배체제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열왕에 의해서 실시된 율령체제는 문무왕대에도 다시 정비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김춘추는 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수용하여 가조존숭(家祖尊崇)과 율령제에 의한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중고기의 정치이념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토대로 중대 무열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김덕원, 2007)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태종무열왕 8년(661)에 죽음으로써,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변태섭, 1964, 「墓制의 變遷을 通하여 본 新羅社會의 變遷過程」 『역사교육』8.
신형식, 1984,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최현화, 2004, 「7세기 중엽 羅唐關係에 관한 考察」 『사학연구』73.
김덕원, 2007, 『新羅 中古政治史硏究』,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二十九 太宗武烈王[名春秋 金氏 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 母天明夫人 諡<文貞>太后 眞平王之女也 妃訓帝夫人 諡文明王后 庾<信>之妹 小名文熙也 甲寅立 治七年]
제29 태종무열왕[이름은 춘추이고 김씨이다. 진지왕의 아들 용춘 탁문흥갈문왕의 아들이다. 용춘은 또는 용수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시호는 문정태후이고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훈제부인으로 시호는 문명왕후이고, 유신의 누이동생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문희이다. 갑인에 즉위하여 7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
太宗春秋公
第二十九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 ?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 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初文姬之?寶姬 夢登西岳捨溺 ?滿京城 旦與妹說夢 文姬聞之謂曰 我買此夢 ?曰 與何物乎 曰 ?錦裙可乎 ?曰 諾 妹開襟受之 ?曰 疇昔之夢 <傳>付於汝 妹以錦裙酬之 後旬日 庾信與春秋公 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 乃崔致遠之說] 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 故踏春秋之裙 裂其襟紐曰 請入吾家縫之 公從之 庾信命阿海奉針 海曰 豈以細事輕近貴公子<乎> 因辭[古本云 因病不進] 乃命阿之 公知庾信之意 遂幸之 自後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之曰 爾不告父母 而有娠何也 乃宣言於國中 欲焚其妹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何烟 左右奏曰 殆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侍在前 顔色<大>變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救之 公受命馳馬 傳宣沮之 自後現行婚禮 眞德王薨 以永徽五年甲寅卽位 御國八年 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葬於哀公寺東 有碑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太子法敏 角干仁問 角干文王 角干老且 角干智鏡 角干愷元等 皆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 現於此矣 庶子曰 皆知文級干 車得令公 馬得阿干 幷女五人 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饍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 城中市價 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 民謂之聖代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時百濟<末>王義慈乃<武>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以貞觀十五年辛丑卽位 耽?酒色 政荒國危 佐平[百濟爵名]成忠 極諫不聽 囚於獄中 瘦困濱死 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審擇其地 處上流而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 沈峴 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顯>慶四年己未 百濟烏會寺[亦云 烏合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寺行道 二月 衆狐入義慈宮中 一白狐坐佐平書案上 四月 太子宮雌?與小雀交婚 五月 泗[扶餘江名]岸大魚出死 長三丈 人食之者皆死 九月 宮中槐樹鳴如人哭 夜鬼哭宮南路上
태종춘추공
제29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성은 김씨이다. 용수[또는 용춘라고도 한다]각간 추봉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로, 곧 유신공의 막내 누이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흘러서 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아우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문희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습니다.”라고 했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겠느냐?”라고 하니,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려 받았는데,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라고 하니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후에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위의 사금갑(射琴匣)조에 보이는데, 최치원(崔致遠)의 설이다]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다가[신라 사람들이 말하는 축국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이른다] 고의로 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떼어버리고 말하기를 “청컨대 우리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명하여 꿰매드리라고 하니, 아해가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로써 귀공자를 가벼이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사양하였다.[고본(古本)에는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에게 명하였더니 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관계하였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이 그의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어 말하길 “네가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고, 이에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리고 누이를 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것을 기다려, 뜰 가운데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가 아뢰기를 “아마도 유신이 그의 누이를 태우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의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짓인가?”라고 하였는데, 마침 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이 한 일이니 가서 구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이를 막고, 그 후 드러내어 혼례를 행했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 5년 갑인(654)에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더불어 지모와 힘을 합해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사직(社稷)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 각간 문왕(文王), 각간 노차(老且), 각간 지경(智鏡), 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 거득(車得) 영공(令公) 마득(馬得) 아간과 딸을 합하여 모두 5명이다.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였는데, 경신년(660)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는 점심은 하지 않고 다만 조석만 들 뿐이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 성 중 시장의 값은 베 한 필에 조(租) 30석 혹은 50석이었다.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했다. 동궁에 있을 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갔더니, 당나라 황제가 그 풍채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굳이 머물러두고 시위(侍衛)하게 했으나, 힘써 청하여 이에 돌아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정관(貞觀) 15년 신축(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 정사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좌평(佐平)[백제의 관작 이름] 성충(成忠)이 극력으로 간해도 듣지 않고 옥에 가두니, 몸이 여위고 지쳐 거의 죽게 되었다. 글을 써서 아뢰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겠습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할 것이니, 상류에 머물러 적을 맞이하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해처이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곧 장암(長?)이니 또는 손량(孫梁), 혹은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은 연후에 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살피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하루 종일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떼가 의자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부여의 강 이름]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이었으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의 괴수(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우는 것과 같았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 위에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