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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효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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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왕

기본정보

신라의 제32대 왕.
생몰년 : ?-702
재위기간 : 692-702

일반정보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의 이름은 이공(?恭, 理恭) 혹은 이홍(?洪, 理洪)이다. 아버지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고 어머니는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신문왕의 뒤를 이어 신문왕 12년(692)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10년째 되는 해인 효소왕 10년(701) 7월에 사망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의 이름은 “이공(?恭)” 혹은 “이홍(?洪)”이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효소왕 즉위조에서는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고 어머니는 김운공(金運公)의 딸이자 신문왕의 두 번째 비(妃)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한편 『삼국유사』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조에는 죽지랑에 관한 기록이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를 모량(牟粱)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차출하여 부역을 시키자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였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의 도움으로 득오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익선의 악행을 들은 화주(花主)는 익선을 벌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도망치자 그 아들을 대신 벌하였다.

이공은 신문왕 7년(687)에 태어나 같은 왕 11년(691)에 5세의 나이로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책봉 다음 해인 신문왕 12년(692)에 왕이 사망하자 곧바로 신라 제32대 효소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효소왕은 6세라는 어린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신라에서는 진흥왕(眞興王)이나 혜공왕(惠恭王)의 사례와 같이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하게 되면 응당 태후(太后)의 섭정이 행해졌다. 따라서 효소왕의 경우에도 왕의 어머니인 신목왕후(神穆王后)의 섭정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김수태, 1996) 반면 효소왕의 경우 진흥왕이나 혜공왕과 같이 사료 상의 섭정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에 주목하여 신목왕후의 세력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에 섭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박해현, 2003)

효소왕은 즉위와 동시에 부왕(父王)인 신문왕(神文王)의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에 반발하는 진골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러한 움직임이 결정적으로 표출된 정치적 사건은 바로 효소왕 9년(700)에 일어난 이찬(伊?) 경영(慶永)의 모반이었다. 경영은 반역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하였고, 시중(侍中) 김순원(金順元)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당했다. 경영의 모반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 김순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왕당파(王黨派)들이 전제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모반을 꾀한 것이라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김수태, 1996) 이와 반대로 성덕왕(聖德王)을 지지하는 경영 등의 세력이 효소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보기도 한다.(박해현, 2003)

효소왕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황복사금동사리함명문(皇福寺金銅函舍利銘文)」에서는 모두 효소왕 11년(702) 7월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3 문무천황 대보 3년(703) 윤4월조에서는 같은 해 정월(正月)에 신라 사신이 올린 표(表)를 인용하여 “지난 가을부터 병이 들어 올 봄에 돌아가셨다.(自去秋疾 以今春薨)”라고 전하고 있다. 신라 사신이 703년 정월 초에 일본에 도착한 것을 감안한다면 표가 작성된 시기는 702년이므로 효소왕의 사망 연도는 앞의 두 기록과 서로 일치한다.(최근영 외 편, 1994) 다만 사망한 계절이 봄이라고 한 점과 그 사인(死因)이 병 때문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은 차이를 보인다.

참고문헌

김수태, 1996, 『新羅中代 政治史硏究』, 일조각.
최근영 외 편, 1994, 『日本 六國史 韓國關係記事 譯註』,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박해현, 2003,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二 孝昭王 [名?恭(一)作洪 金氏 父神文王 母神穆王后 (壬)辰立 理十年 陵在望德寺東]
제32 효소왕 [이름은 이공, 혹은 이홍이라고 하며 김씨이다. 아버지는 신문왕이고 어머니는 신목왕후이다. 임진년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능은 망덕사 동쪽에 있다.]

第三十三 聖德王 [名興光 本名隆基 孝昭之母弟也 先妃陪炤王后 諡嚴貞 元大(阿)(干)之女也 後妃占勿王后 諡炤德 順<元>角干之女 壬寅立 理三十五年 陵在東村南 一云楊長谷]
제33 성덕왕 [이름은 흥광이며 본명은 융기로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첫째 비는 배소왕후인데, 시호는 엄정으로 원대아간의 딸이다. 둘째 비는 점물왕후로 시호는 소덕이고 순원 각간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하여 35년간 다스렸다. 능은 동촌 남쪽에 있는데 양장곡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
孝昭王代 竹旨郞[亦作竹曼 亦名智官]
第三十二孝昭王代 竹曼郞之徒 有得烏[一云谷]級干 隷名於風流黃卷 追日仕進 隔旬日不見 郞喚其母問 爾子何在 母曰 幢典牟梁益宣阿干 以我子差富山城倉直 馳去行急 未暇告辭於郞 郞曰 汝子若私事適彼則不須尋訪 今以公事進去須歸享矣 乃以舌餠一合酒一缸,<率>左人[鄕云 皆叱知言奴僕也]而行 郞徒百三十七人亦具儀侍從 到富山城問?人 得烏失奚在 人曰 今在益宣田 隨例赴役 郞歸田 以所將酒餠饗之 請暇於益宣 將欲偕還 益宣固禁不許 時有使吏侃珍 管收推火郡能節租三十石輸送城中 美郞之重士風味 鄙宣暗塞不通 乃以所領三十石 贈益宣助請猶不許 又以珍節舍知騎馬鞍具貽之乃許 朝廷花主聞之 遣使取益宣 將洗浴其垢醜 宣逃隱 掠其長子而去 時仲冬極寒之日 浴洗於城內池中仍合凍死 大王聞之 勅牟梁里人從官者竝合黜遣 更不接公署 不著黑衣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勅史上侃珍子孫 爲枰定戶孫 標異之 <圓>測法師是海東高德 以牟梁里人 故不授僧職 初述宗公爲朔州都督使 將歸<治>所 時三韓兵亂以騎兵三千護送之 行至竹旨嶺 有一居士平理其嶺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治>隔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驚怪尤甚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人曰 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 其死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軀安於塚前 妻氏自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與庾信公爲副帥統三韓 眞德太宗文武神文四代爲?宰 安定厥邦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 哭屋尸以憂音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 宿尸夜音有叱下是
효소왕대 죽지랑[또는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 죽만랑(竹曼郞)의 낭도 중에 득오(得烏)[또는 곡(谷)]급간(級干)이 있었다.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출근하였다. 열흘 동안 보이지 않기에 낭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당전(幢典)인 모량(牟粱)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직(倉直)으로 뽑아갔는데, 빨리 가느라고 미처 낭에게 말씀드릴 겨를도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당신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이제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라고 하고, 이에 설병(舌餠)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좌인(左人)[우리말에 개질지(皆叱知)라고 하니 노복(奴僕)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갔다. 낭의 무리 1백37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문지기는 답하기를,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져간 술과 떡을 대접하였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니 함께 돌아가려고 했으니 익선은 굳이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고 있었는데,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어리석은 고집과 융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또 진절(珍節) 사지(舍知)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을 씻기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그때는 중동(仲冬)의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이내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칙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는 모두 쫒아내어 다시는 관서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도 종고(鐘鼓)를 단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사에게 명하여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고 그를 표창하였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海東)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장차 임지로 가려 하는데, 이때 삼한에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3천 명으로 그를 호송하였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그 고개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이를 보고 찬탄하였고,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성함을 존대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다. 공이 주의 치소에 부임한 지 한 달이 더 되던 때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놀라고 괴이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는데, 그가 죽은 날이 꿈꾸던 바로 그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불 한 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봉안하였다. 부인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부수(副帥)가 되어 유신공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고, 진덕(眞德)?태종(太宗)?문무(文武)?신무(神武)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이렇다. 간 봄 그리워하매 못 살으사 울어 설워하더이다. 애닯음 나토시던 모습이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가이더이다. 눈 돌이킬새 만나 뵙기 어찌 지으오리까. 낭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 다봊 마을에 잘 밤 있사오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