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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성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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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기본정보

신라 제33대 왕.
생몰년: ?-737
재위기간: 712-737

일반정보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의 이름은 흥광(興光)이고 본명은 융기(隆基)이다. 아버지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고 어머니는 신문왕의 둘째 비(妃)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젊은 나이로 후사(後嗣)없이 사망하자, 국인에 의하여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첫 번째 비(妃)는 원태(元大) 아간(阿干)의 딸인 배소왕후(陪炤王后)이고, 두 번째 비(妃)는 순원(順元) 각간(角干)의 딸 점물왕후(占勿王后)이다. 성덕왕은 범물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자 승경(承慶)을 낳았는데, 후에 신라 제34대 효성왕(孝成王)으로 즉위하였다. 재위한지 36년째 되는 해인 737에 사망하여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였다.

전문정보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의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왕의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당(唐)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흥광으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즉위조의 세주(細註)에는 “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였다.(唐書言金志誠)”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모두 이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0 외신부 조공 신룡(新龍) 원년(705) 3월조에는 “신라왕 김지성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新羅王金志誠 遣使朝貢)”라는 기사가 보여 여기서 언급된 “당서”란 『책부원귀』를 가리킨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책부원귀』의 기록은 당시 사신으로 입당(入唐)한 김지성(金志誠)을 신라왕으로 잘못 표기한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末松保和, 1954)

성덕왕의 출자에 대해서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효소왕(孝昭王)의 동복동생이다.(孝昭之母弟也)”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즉위조에는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고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효소왕이 아들 없이 죽자 국인들이 그를 추대하였다(神文王第二子 孝昭同母弟也 孝昭王薨 無子 國人立之)”라고 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성덕왕의 아버지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고 어머니는 신문왕의 둘째 왕비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며, 친형은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된다. 즉, 그의 출자에 대해서 『삼국유사』 왕력과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신문왕의 아들이자 효소왕과 친형제라고 하여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효소왕이 후사(後嗣) 없이 사망하자 국인(國人)들이 성덕왕을 추대하여 즉위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효소왕과 성덕왕을 이복형제(異腹兄弟)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신종원, 1987) 이러한 견해는 앞서 살핀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보다도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조에 실려 있는 기록에 더욱 주목한 결과이다. 『삼국유사』 해당 조목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인 보천(寶川)과 그 동생 효명(孝明)이 하서부(河西府) 세헌 각간(世獻角干)의 집에 하룻밤 묵고는 오대산에 도망하여 속세를 잊고 수도했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는데 국인(國人)이 이를 폐하고 장군 네 사람을 산에 보내어 두 태자를 모셔 오게 하였다. 이 때 보천은 울며 굳이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몇 년 뒤인 신룡(神龍) 원년(성덕왕 4년, 705)에 왕이 친히 오대산에 행차하여 진여원(眞如院)을 개창(改創)하였다.

이 기록 속에 등장하는 효명태자(孝明太子)는 정신왕(淨神王)의 왕자(王子)로서 오대산(五臺山)에서 숨어 지내다가 국인(國人)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오르는 인물이다. 효소왕과 성덕왕을 이복형제로 보는 앞의 견해에서는 국인에 의해 추대된다는 효명태자를 성덕왕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가 오대산에 숨어 지낸 이유에 대해서는 이복형제인 효소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났기 때문으로 보았다.

성덕왕은 모두 두 명의 비(妃)를 맞이하였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성덕왕의 첫 번째 비(妃)는 원태(元大) 아간(阿干)의 딸인 배소왕후(陪炤王后)로 시호는 엄정왕후(嚴貞王后)이고, 두 번째 비(妃)는 순원(順元) 각간(角干)의 딸인 점물왕후(占勿王后)로 시호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5년(716)조에 따르면 성덕왕이 두 명의 비를 맞이하게 된 것은 첫 번째 비(妃)였던 배소왕후가 이 해에 출궁(出宮)당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소왕후의 출궁에 관하여 그녀의 아버지이자 반전제주의적 진골귀족으로 대표되는 김원태 세력이 왕당파로 대표되는 김순원 세력에게 제압당한 결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김수태, 1996) 이와 달리 김원태와 김순원 양 세력 모두를 효소왕에 반대하여 성덕왕을 추대했던 세력으로 설정하고 성덕왕 즉위 이후 정국 주도권을 놓고 양 세력이 각축을 벌이다가 김원태 세력이 패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박해현, 2003) 배소왕후의 출궁 후 4년 만인 성덕왕 19년(720)에 맞아들인 점물왕후와의 사이에서는 태자(太子) 승경(承慶)을 낳았는데, 그는 후에 신라 제34대 효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성덕왕은 재위 36년 동안 당(唐)에 사신을 43회나 파견하는 등 나당전쟁(羅唐戰爭) 이후 소원했던 당(唐)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자 하였다. 또한 성덕왕 20년(721)에는 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정부(丁夫) 2,000명을 징발해 북쪽 국경에 장성을 축조하였으며, 다음해인 21년(722)에는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였다. 또한 이해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32년(733)에는 발해가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당의 명을 받아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발해에 대한 공격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이 났지만 신라는 그 대가로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인정받게 되었다.

성덕왕(聖德王)은 재위 36년만인 737년에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36년(737)조에는 왕을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葬移車寺南)”라고 하였고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능은 동촌 남쪽에 있는데, 또는 양장곡이라고 한다.(陵在東村南 一云楊長谷)”라고 하였다. 현재 신라성덕왕릉(新羅聖德王陵)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에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신종원, 1987, 「五臺山 事蹟과 聖德王의 卽位背景」 『崔永喜先生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탐구당.
김수태, 1996, 『新羅中代政治史硏究』, 일조각.
박해현, 2003,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三 聖德王 [名興光 本名隆基 孝昭之母弟也 先妃陪炤王后 諡嚴貞 元大(阿)(干)之女也 後妃占勿王后 諡炤德 順<元>角干之女 壬寅立 理三十五年 陵在東村南 一云楊長谷]
제33 성덕왕 [이름은 흥광이며 본명은 융기로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첫째 비는 배소왕후인데, 시호는 엄정으로 원대아간의 딸이다. 둘째 비는 점물왕후로 시호는 소덕이고 순원 각간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하여 35년간 다스렸다. 능은 동촌 남쪽에 있는데 양장곡이라고도 한다.]

第三十四 孝成王 [金氏 名承慶 父聖德王 母炤德大后 妃惠明王后 眞宗角干之女 丁丑立 理五年 法流寺火葬 骨散東海]
제34 효성왕 [김씨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아버지는 성덕왕이고, 어머니는 소덕태후이다. 왕비는 혜명왕후로, 진종각간의 딸이다. 정축에 즉위하여 5년간 다스렸다. 법류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동해에 뿌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성덕왕)
聖德王
第三十三聖德王 神龍二年丙午 歲<禾>不登 人民飢甚 丁未正月初一日至七月三十日 救民給租 一口一日三升爲式 終事而計 三十萬五百碩也 王爲太宗大王<創>奉德寺 設仁王道場七日 大赦 始有侍中職[一本系孝成王]
성덕왕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굶주림이 심하였다. 정미(丁未)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한 사람에 하루 3승(升)으로 하였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보니 모두 30만 5백 석(碩)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 봉덕사(奉德寺)를 창건하고, 인왕도량(仁王道場)을 7일 동안 열고 크게 사면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시중(侍中)의 직(職)을 두었다.[어떤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수로부인)
水路夫人
聖德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今<溟>州] 行次海汀晝饍 傍有石?如屛臨海 高千丈 上有??花盛開 公之夫人水路見之 謂左右曰 折花獻者其誰 從者曰 非人跡所到 皆辭不能 傍有老翁 牽?牛而過者 聞夫人言折其花 亦作歌詞獻之 其翁不知何許人也 便行二日程 又有臨海亭 晝<饍>次 海龍忽攬夫人入海 公顚倒?地 計無所出 又有一老人告曰 故人有言 衆口?金 今海中傍生 何不畏衆口乎 宜進界內民 作歌唱之 以杖打岸 <則>可見夫人矣 公從之 龍奉夫人出海獻之 公問夫人海中事 <曰>七寶宮殿 所<饍>甘滑香潔 非人間煙火 此夫人衣襲異香 非世所聞 水路姿容絶代 每經過深山大澤 屢被神物掠攬 衆人唱海歌 詞曰 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悖>逆不出獻 入綱捕掠燔之喫 老人獻花歌曰 紫布岩乎過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不喩??伊賜等 花?折叱可獻乎理音如
수로부인
성덕왕때 순정공이 강릉[지금의 명주]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러 있고,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꽃을 꺽어다 줄 사람은 없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사양하였다. 그 곁으로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와 또한 가사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이틀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엎어지면서 땅을 쳐보아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따르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속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칠보 궁전에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는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는 용모와 자색이 세상에서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에게 붙들려갔다. 여러 사람이 해가를 불렀는데 가사는 이렇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빼앗아 간 죄가 얼마나 크냐.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노인의 헌화가는 이렇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